129화 천명(2)
129화 천명(2)
수나라 황제 양견이 고구려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태왕 고양성과 태자 고대원을 이간질한다고 가정하자.
그리되었을 때 우리는 필시
-미친놈
이 세 음절을 먼저 꺼낼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고정의의 말을 쉽게 이해하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놀라운 건 누구도 어불성설로 여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음. 불가능한 건 아니외다. 그 정도야 뭐······.”
무려 태왕 폐하께서 친히 동의까지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랬다.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단지 일회성 내전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내전을 치른 고구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더 놀라운 건 내전이라는 특정 주제로 논의하게 되자 우리 고구려인들은 굉장히 합리적인 모습을 쉬지 않고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제안입니다. 한데, 처라후와 아사나 섭도의 사이는 원만합니다. 아니, 나쁠 게 없지요. 친형제로서 차기 지존의 자리까지 약조하고 받은 사이가 아닙니까. 이를 쉽사리 가르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외교를 부르짖던 고식만 하더라도 내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방법의 유무를 언급했다.
그리고
“이런. 내가 말했지만, 참으로 아둔했군요.”
갑자기 자기비판까지 했다.
또, 그리고
“지금 사이가 좋은 건 아사나 섭도가 명실상부한 대카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군요. 이를 균열 낼 수 있다면 그의 뒤를 이어야 할 처라후를 불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었으면 모를까 이미 맛을 본 권력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대카간만 잘하면 계승은 확실한 입장이니 말입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가능합니다.”
순식간에 적을 분열시킬 방책으로 모든 걸 동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연자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식을 바라봤다.
“아아. 그렇게 바라보는 건 너무 외부의 시선입니다.”
“무슨 말인가? 외부의 시선이라니?”
“형님. 만일, 내가 처라후나 그의 가신이라면 돌궐에 속한 소수 세력의 불만을 더 고취할 방법을 찾을 겁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거병을 유도하여 대카간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겠지요. 이게 시작입니다. 그런데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박고와 동흘라의 거병 시기까지 완벽하게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이게 왜 어렵습니까?”
단지 불만을 고취해 저항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각본을 써보자는 말이었다. 참으로 대담한 말이었다.
“거기에 내가 하나 보태겠네.”
고정의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연자유를 바라봤다.
“기근에 허덕일 때 고구려가 물자를 지원한다고 한 것이네.”
“음. 아파가한 대라편에게 한 행동이 있습니다. 상당히 불안하겠군요.”
“무엇이 불안한가.”
“아사나 섭도가 노려볼까 두려운 게 아니라 물자를 빼앗길까 봐 불안한 것이지요. 선례도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것일세.”
평소 앙숙처럼 노려보며 호의적인 말을 하지 않았던 고정의와 연자유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내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역시 전공자끼리 전공을 논의하는 건 행복한 것이었다.
그새 고정의가 고식을 바라봤다.
“아파가한을 규탄했던 세력들이 이 경우 처라후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 수 있다고 여기는가?”
“어림도 없지요. 명실공히 후계자인데 어찌 같은 잣대를 들이밀겠습니까. 여기에 돌궐 전문가인 나의 감각에 의하면 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번뇌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그렇지. 하면, 어떤가. 자네가 볼 때 아사나 섭도는 고구려가 보내는 물자를 뺏지 않을 가능성이 있나?”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나쁘지 않지요.”
“처라후나 그의 가신으로서는 그렇지요.”
이미 처라후 일파로 빙의해버린 연자유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우리의 물자를 확보하면 기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빼앗긴다면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상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통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옳은 말일세. 이미 우리는 절반을 이긴 것이네.”
어떤 경우의 수가 실현되더라도 돌궐의 분열은 확정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돌궐을 사분오열 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대계에서 가장 쉬운 건 역시 분열이 아니겠소? 그러니 바로 집행하시오.”
고양성이 전격적으로 동의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가에는 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패기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논의는 이만하면 될 것이외다. 그래. 고 막리지는 어느 정도의 지원을 생각하시오?”
“폐하. 고구려가 유례없는 대풍을 맞이했사옵니다.”
“쌀을 보내자는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신이 고민하였사온데 3만 석이면 적당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3만 석이라.”
가볍게 따질 때 5만 대군의 한 달 군량이 4만 석 전후였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준비하는 병졸이 배를 채우는 것이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죽을 써줘야 할 상황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더 오래, 많은 이를 먹일 수 있다.
“하옵고 폐하. 이미 수만 마리의 돼지로 대카간과 아파가한을 분열시켰사옵니다. 이제는 후계자인 처라후를 동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전처럼 막대한 수량을 보낼 필요가 없사옵니다. 3만 석, 2만 석, 1만 석, 5천석······숨통이 붙어 있을 정도면 충분하옵니다. 그럴수록 우리를 더 갈망하게 될 것이니 말이옵니다.”
역시나 내전의 최고 권위자다운 섬세함이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나저나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현재 고구려를 둘러싼 모든 세력을 갈라버리는 중이었다. 물론,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이 엄청났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으나 때가 되면 우리의 손길이 닿을 수밖에 없는 장치를 해두었다.
그래서 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수나라도 갈라버릴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 역사에 수양제로 이름이 남은 양광이 황제라도 된다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능력만 보면 양견이 압도적이긴 하다. 그런데 양광은 다른 의미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냥 미친개처럼 한번 물면 죽을 때까지 이빨을 거두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은 양광과 같은 미친개는 잠시 피하는 게 옳았다.
상념을 거두었을 때 고양성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휼미 3만 석을 동의하느냐는 눈빛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발의한 것이니 말이다.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10할 승산이 있는 일이옵니다. 어찌 머뭇거리겠사옵니까.”
“좋소. 지금 당장 시행하시오.”
시원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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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부서를 출범시켰다면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게 바람직했다. 농업부가 바로 그랬다. 내가 아무리 농법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고구려 전역을 대상으로 농업 개혁을 추진하는 기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농업부였다. 그랬기에 나는 출범 직후 이문진에게 입을 대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 모두 농업부의 역량으로 귀결될 것이기에 지켜보는 걸 선택한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건 늘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농법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역시 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면화 밭이라.”
“그렇습니다. 면화 밭에 좋은 시비법이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없는 건 아닐세. 음. 이를 제대로 해볼 생각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백성의 의복과 직결하는 농사가 아닙니까. 소생이 역량을 빼어 다시 살펴볼 생각입니다. 이는······.”
“아. 됐네. 자네가 알아서 판단하게. 나는 물어보면 답해줄 뿐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문진의 판단에 더는 개입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내가 주도하는 농업 개혁이었고, 이문진은 식객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 말이다.
“면화 밭에는 소똥, 물, 인분, 숙분이 주류를 이루네. 또한, 싹의 발아와 촉진을 위한 덧거름도 중요하지. 이는······.”
전처럼 복잡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딱 핵심만 전했다. 이리한 이유는 특별 산업일수록 고구려의 기후와 제반 상황에 따라서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확하고 객관적인 내용만 전해야 했다. 이후 현장에 직접 적용하는 건 역시 농업부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문진의 필기가 끝나갈 때쯤 슬쩍 운을 하나 던져보긴 했다.
“다른 시비법은 아직 필요 없나?”
“음. 아직 시행되는 시비법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때 새로운 시비법을 도입한다고 할지라도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겠네.”
사실 송나라 시절의 시비법보다 명청시대의 시비법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지만, 무조건 도입할 수도 없다. 그게 가능하면 그냥 현대농법을 적용하면 된다. 아무리 전통 시대 시비법이라고 할지라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도입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화두를 돌렸다.
“번국의 사정은 좀 어떠한가.”
“애초 농업과는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기초적인 수준으로 자리잡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시일이 걸리겠지. 어쩌면 그들의 의지가 문제일지도 모르고.”
사실 오적을 제외한 세력은 농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 특이한 건 아회씨는 유학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업은 쳐다보지 않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혼종이 탄생할 것 같기도 했다.
“소생이 볼 때 적당하게 체계를 정비한 뒤 백제를 약탈할 생각인 듯 합니다.”
“뭐. 그 정도는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지.”
사실 4개나 되는 번국을 우리가 하나씩 세세하게 지도해준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고급 인력의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이른 시일 내로 중국인 중 문자를 아는 이를 모두 관리로 삼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러하니 번국의 일을 어찌 다 잡아 줄 수 있겠는가.
“음.”
딱 한 음절이었으나 고민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농업부의 권한을 넘어선 일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편히 말하게.”
“대인께서는 제후국에 농업을 크게 알릴 생각이십니까.”
“한수와 같은 옥토를 차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낭비가 아니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동방의 남부에서 농업을 제대로 일궈내지 못하면 철저한 몰락을 경험할 뿐이네. 그들이 애초 무엇을 하던 세력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 결국은 농업을 익힐 수밖에 없네. 지금은 멀리할지라도 기본은 갖출 수 있도록 거들어야 하지 않겠나? 또한, 그들의 성장이 곧 우리의 국력과 직결할 것인데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 그들에게도 고구려의 비기를 다 알려주는 겁니까?”
“물론일세.”
이문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한데, 대인. 실은 소생은 이러다가 우리의 시비법이 타국에 전파되는 것도 두렵습니다.”
“음?”
“사실 우리를 둘러싼 세력은 우호 세력보다 적대국이 더 많지 않습니까. 수나라까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장 백제만 하더라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한들 바뀌는 건 없을 것이네. 그리고 이건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닐세. 생각해보게. 군사 비밀도 아니고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될 농법이었다. 평범한 백성도 사용할 것인데 전파를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상상에서 사는 것일세.”
농법의 전파를 막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라 농사를 짓는 백성이라면 모두 알게 되는 내용을 대체 무슨 수로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또, 이런 현실은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보게. 내가 왜 목리문차가 우리 도성을 마음껏 활보하게 뒀는지 아는가?”
“설마 우리의 내부 사정을 일부러 알린 겁니까?”
“일국의 명운을 책임지는 이라면 봤을 것이네. 생기가 가득하다는 걸 말일세.”
그리고 말했다.
“그가 본 모든 건 백제의 분열을 유도할 것이네.”
그랬다. 이미 고구려의 농업은 백제 분열의 씨앗으로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