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천명(1)
128화 천명(1)
나와 고정의의 맹활약은 대백제 외교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성왕이 전사하면서 중흥의 기세가 꺾였을 뿐 백제가 가진 힘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북방에 힘을 실어야 할 우리 고구려로서는 남부 전선의 안정이 절실했다. 괜히 거란족, 고막해족, 말갈족을 한강으로 대규모 이주시킨 게 아니었다.
그러한데 건국과 혈통만으로 백제 사신단의 정사인 목리문차에게 하대하며 함부로 대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미친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리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건 철저하게 계획하여 진행한 것이었다. 우리의 힘을 과시함과 동시에 고정의가 위계를 펼친 것이었다.
결과, 목리문차는 우리의 계책에 완벽하게 넘어갔고, 훗날 고정의가 대규모 내전을 일으킬 것으로 판단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백제는 본국의 내전을 고려할 것이니 거침없이 남조 신라를 공격할 것이외다.”
내 말에 고정의가 키득거리며 답변했다.
“큭. 그렇지요. 그들이 남조 신라를 압박하는 만큼 남부 전선은 평안해질 수밖에 없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이까.”
이제 막 개막된 신라의 남북조 시대는 한반도 중남부 역사를 송두리째 흔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는 우리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기반이 불안정한 것이었다.
고정의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둘 때 오래 갈 수 없는 성격의 내전이긴 하오. 그런데 우리가 또 누구요? 천하에서 가장 오랜 세월 내전을 치르고 있는 고구려의 막리지가 아니겠소? 이를 잘 꼬아내는 건 일도 아니외다.”
그렇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왕고덕과 앞에 있는 고정의는 고구려 내전사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하니 누구보다도 내전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었고, 이해도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무릇 내전이라고 하면 권력에 대한 뜨거운 열망에서 시작되어야 제맛이지요. 그런 뒤 사활을 걸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한 대규모 전투라 시작부터 끝없이 이어져야 하는 법이외다.”
“그렇소. 그러나 신라는 아니외다. 고 막리지의 말대로 애초 신라 내부에서 모순이 발생했거나, 권력 투쟁이 아니기 때문이오.”
신라 내부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개입으로 발생한 내전이었기에 보편적인 성격과는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 막리지의 말대로 우리의 힘이 깃든 분열이외다. 그래서 북조 신라와 남조 신라 모두 서로를 노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오.”
“유일한 변수는 남조 신라가 힘을 모아서 북진하는 것이었지요.”
“물론이외다. 남조 신라가 온 힘을 다하여 북진한다면 어쨌거나 변방에 위치하고 기반이 없는 북조 신라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소.”
“문제는 우리가 그런 움직임을 매번 주시하며 도와줄 여력이 없다는 것이외다.”
사실 말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았다. 북방의 일도 일이지만 수나라 황제 양견이 조금이라도 장기판에서 벗어나서 움직이면 우리의 서부 전선은 비상이 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변수라는 건 결국 수나라의 수십만 대군이 요동으로 향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이것이 아니더라도 돌궐의 분열이 예상과는 달리 강도가 약하여 빠르게 혼란을 수습한다면 고구려의 전력은 요동 전선에 배치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어찌 김백정이나 매번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번국에 지원군을 보내라고 하기도 어렵다. 한성에서 벗어나 한강 유역에서 공식적으로 개국을 성립한 그들은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게 쉽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향력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만, 그들의 병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또한 이제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외교가 아주 성공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할수록 흐뭇하여 방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백제는 이를 악물고 남조 신라를 공격할 것이외다.”
“그렇소. 그리한다면 북조 신라는 천천히 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소.”
“이는 신라의 남북조가 단순히 내전이 아니라 영원한 분열로 이어지는 서막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소이까.”
그랬다.
우리는 신라의 남북조를 단지 왕위를 둘러싼 구왕과 신왕의 내전으로 귀결시킬 생각이 없었다. 아예 다른 성격의 두 개의 나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목표였다.
여기서 바로 예술이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가 힘이 남는다고 하여 섣불리 북조 신라를 지원하여 남조 신라를 도모하면 혼란은 끝난다. 그런데 그 뒤에 김백정은 이를 악물고 우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도와주지 않으면 북조 신라는 순식간에 남조 신라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죽 쒀서 개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로 이때 백제가 남조 신라를 맹렬하게 공격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는가.
“그러나 백제는 남조 신라를 도모할 수는 없소.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어렵지요.”
“큭. 바로 그것이외다. 지금 생각하면 목리문차의 자신감을 보일 때 아니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참으로 어렵더이다.”
“하하하! 고 막리지. 잘 참으셨소.”
“내가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외다.”
말이 샜다.
백제가 남조 신라를 도모할 수 없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다른 이유를 떠나서 결정적인 시기에는 반드시 우리가 개입할 것이니 어찌 도모할 수 있겠소이까.”
그랬다.
우리는 백제의 총공세를 그냥 지켜만 볼 생각이 아예 없었다. 간단하게는 번국의 생존 전략인 약탈이 이어질 것이다. 남조 신라가 아무리 허약해졌다고 한들 단번에 무너질 리도 없다. 지금 그들은 악으로 버틸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이번 외교를 통해서 근심을 제거했기에 우리는 북방 전선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북방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이 일을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동방은 오직 고구려 일국으로 개편될 것이외다.”
훗날 백제가 두들겨 패서 엉망이 된 남조 신라는 우리가 여력이 될 때 북조 신라를 앞세워서 대대적으로 정벌을 감행할 것이다.
김백정은 원래 신라의 왕이었기에 전투에만 승리하면 통치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어설픈 부흥 운동 따위는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밖에서 손을 보탠다고 할지라도 김백정이 선두에 서는 이상 신라인들은 철저하게 내전으로 인지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그때 우리는 신라를 완벽하게 도모할 수 있다.
김백정을 신라 왕이 아니라 지방관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지금 고구려는 철저한 관료제를 도입하고 있기에 그때가 되면 체계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다.
이후 백제를 정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능히 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너무 쉽소.”
“하하하! 그렇소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우리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내전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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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좋은 일만 있었지만, 이건 더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 역시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 고구려 전역에서 오곡과 벼가 풍성하게 익었사옵니다. 그야말로 대풍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사옵니까. 이 모든 건 폐하께서 이루신 것이옵니다.”
고양성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어찌 이것이 나만의 노력이겠소이까.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일궈낸 쾌거요. 나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하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엄밀히 따지면 내 공이 제일 크다.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양성이 나를 슬쩍 노려봤으나 모른 척했다. 진실과 마주하는 이는 언제나 이렇게 괴로운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하던 말이나 이어갔다.
“폐하. 우리는 대풍이옵니다. 하온데, 돌궐의 기근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사옵니다. 북방의 패권을 탐하고 있거늘 어찌 이를 바라만 보겠사옵니까.”
“음. 대카간은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들었소.”
“죽어도 수나라의 세폐만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수나라 황제가 어찌 행동할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으나 세폐를 쉽사리 꺼내지 않을 게 분명하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공세적으로 행동하는 게 옳사옵니다.”
그때였다.
“폐하. 신에게 묘책이 있사옵니다.”
바로 대돌궐 전문가인 고식이었다. 그의 표정은 오늘따라 더 의기양양했다. 보아하니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만 같았다.
“최근 확보한 정보에 의하면 돌궐의 통제를 받는 박고와 동흘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사옵니다.”
“기근에 허덕이는 대카간이 그들을 크게 압박하나 보오?”
“그러하옵니다.”
“하면, 그들을 지원하여 움직이자는 말이오?”
“바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미 신이 모든 준비를 끝냈사옵니다. 윤허하신다면 즉각 시행할 수 있사옵니다.”
“아. 그건 곤란하지 않겠나?”
대화의 와중 끼어든 이는 바로 고정의였다. 고식의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곤란하다니요? 그리고 누차 말씀드렸지만, 내가 돌궐 외교의 책임자입니다.”
“돌궐 외교가 아니라 본질을 따지자니 말을 보탤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세.”
“본질이라고 하셨습니까?”
고식이 주춤하자 고정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래서 나도 피식 웃었다. 지금 고정의가 왜 나선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지금부터 돌궐의 정세를 단지 외교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돌궐은 분열을 시작했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합을 유지하고 있으나 우리의 돼지를 대카간이 취하면서 내분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세. 물론, 자네가 추진하는 외교가 주축이 되어야 하지만, 뒤로는 내전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걸세.”
역시 유려한 언변의 소유자답게 고식의 영역을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했다.
“박고와 동흘라에 접선하여 우리의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네. 한데, 지금 그들을 지원하면 어찌 되겠나? 대카간은 아파가한의 사례처럼 모든 물자를 뺏어갈 것이네. 이리되면 고구려는 체면만 구길 뿐 아무런 실리도 확보할 수 없네.”
수만 마리의 돼지를 아사나 섭도가 가져가면서 분열은 시작됐다. 그런데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우리로서는 상당히 곤란해진다.
“아니지요. 대카간이 물자를 또 뺏어가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하면 박고와 동흘라의 불만이 폭발하여 거병에 이를 겁니다. 즉, 대카간 중심의 돌궐의 붕괴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나쁘지 않네. 한데, 다시 말하자면 그건 외교의 영역일세. 나는 내전을 주도하는 게 더 우선이라는 말을 하는 걸세.”
우리의 눈과 귀는 자연스레 고정의에게로 집중됐다.
“외교는 외교대로, 내전은 내전대로 진행하는 옳지 않겠나? 해서, 나는 우리의 지원을 대카간의 후계자인 처라후에게 하자는 걸세.”
아주 공격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내전사의 적통 후계자인 고정의의 입가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렇다.
우리의 손이 닿은 곳이 어찌 한반도 중남부에 국한하겠는가. 천하가 모두 분열되고 있으니 고구려가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이는 그야말로 천명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