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대계란 무엇인가(4)
127화 대계란 무엇인가(4)
고정의가 정말 훌륭하게 활동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뀔 수가 없었다.
“동맹 체결을 원하지 않는 듯 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만 물러가겠네.”
나의 하대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버벅거리던 목리문차의 태도가 너무나도 놀랍지 않은가.
나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고정의의 능력에 감탄했다. 여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사람도 분명 회귀인이 분명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진실은 시간 내어 알아보기로 하고 나는 목리문차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허. 이런. 참으로 아쉽군. 나는 우리가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는데 말일세. 이는 진심이라네.”
“하하하. 어차피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었나? 굳이 억지로 좋은 관계로 나아가자고 애를 쓸 필요는 없지. 나 역시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찾아온 것일세. 뭐. 그런데 왜 왔느냐고는 묻지 말게. 자네나 나나 모두 군왕의 말을 따르는 신하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게.”
목리문차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기에 정신 똑바로 차리니까 보통은 아니었다. 아니, 외교에 제대로 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기에 이럴지도 모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할 수가 없군. 그래. 부디 조심히 가게나. 한데, 말일세. 다음에 만난다면 오늘과는 다를 것이네.”
“하하하! 당연히 그럴 것이네.”
“듣자 하니 나와 생각이 다소 다른 것 같군.”
“이보게. 다음에 우리가 만난다면 본국이 남조 신라를 취했을 때가 아니겠는가.”
“허.”
“본국의 중흥이 동방을 뒤흔들 것인데 어찌 자네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겠는가. 그때는 제대로 예를 갖춰야 할 것이네. 지금처럼 불순한 태도는 아주 곤란할 것이니 말일세.”
고정의의 세 치 혀를 분석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리되었을까.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래. 그 정도의 포부는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 추모왕의 혈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
“건국을 언급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네.”
“허. 이러지 말게. 애초 신라를 감당하지 못해서 국운이 휘청이던 백제가 아니었나? 한데, 우리 태왕 폐하께서 단번에 신라를 남북으로 가르셨네. 그러하니 이제 겨우 뭐라도 해보려는 그 가련한 처지가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하는가.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나는 말을 끌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 고구려는 북조 신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네. 그러한데 자네들이 남조 신라를 취하게 둘 거 같은가?”
“하하하. 어디서 괜한 말을 하나? 애초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네. 고구려는 신라의 영원한 분열을 꾀하지 않나? 한데, 북조 신라를 지원하여 신라의 통합을 꾀한다?”
목리문차는 광인처럼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신라와 손을 잡은 나라는 모두 지독한 배신에 당했네. 고구려도 그런 역사가 있는데, 진심으로 그들을 지원할 리가 있겠는가. 아니지. 내 말이 틀렸나?”
“이런. 다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군. 바로 그래서 우리는 번국을 두고 있네. 그들이 집요하게 백제의 국경을 교란할 것일세.”
“큭. 그게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군.”
“이런.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모르겠군.”
“이보게.”
목리문차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건 나도 움찔할 정도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차이를 아는가?”
“음. 너무나도 많지만,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군.”
“백제는 사활을 걸고 남조 신라를 취할 것이네. 한데, 고구려는 남쪽 전선을 우리처럼 목숨을 걸고 바라보지 않지. 내 말이 틀렸나?”
“맞는 말일세. 우리가 남쪽을 바라보는 것과 백제가 신라를 보는 건 아예 다르지. 그게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지 않겠나?”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고구려는 남쪽을 안정만 시킬 뿐, 무언가를 더 하지 않지.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우리 백제는 자네들의 남쪽이 곧 천하의 모든 것일세.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결사의 각오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목리문차의 눈빛에 담긴 결심과 살의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또 하나가 더 있네.”
“듣고 싶군. 말해보게.”
“고구려는 1. 백제는 2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전사한 왕의 수일세.”
“······.”
“우리는 고구려와 신라. 양쪽이 하나씩 기록해주었지.”
그의 눈빛이 변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숫자를 늘리지 않을 것이네. 이는 결사라고 한다네.”
제대로 각오를 세운 모양이었다. 나는 호응해주면서 말했다.
“그래. 3은 피해야겠지. 그러니 최선을 다하게. 내가 더는 말하지 않겠네.”
“고구려도 더 늘리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게. 그리고 나는 자네를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
“나 역시 기대하는 바일세.”
서슬 퍼런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적어도 이 순간 서로가 원하는 건 모두 얻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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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신라의 상대등 김세종은 숨을 고르게 쉬었다. 좌우를 돌아보니 모두 안색이 어두웠다.
‘폐주를 사로잡지 못하면서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심지어 폐주는 남진도 도모하지 않고 중원에서 힘을 키우고 있다. 사상 초유의 내전이 발생한 것이야.’
이러하니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맑거나 밝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세종은 경직된 분위기를 밀어내고자 억지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는 좋은 일이외다. 수나라 황제가 우리를 동반자로 인정한 것이니 말이오.”
물론, 이를 둘러싼 전후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미 당항성과 한수 일대가 통째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나라 사신단이 멀쩡하게 이동했다는 건 고구려가 대놓고 이동시켜줬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절대로 평범하거나 호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이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수나라 사신단을 어찌 활용할 것인지였다.
즉, 수나라 황제 양견은 사신단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남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자는 호전적인 내용이었기에 신라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훗날 기어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다면 신라도 국운을 걸고 공세를 펼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나라 사신단이 우리 왕도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고구려의 철저한 개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찬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올곧고 절대로 물러섬이 없는 찬덕이 굳이 사실관계를 언급하자 김세종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결국, 우리 신라의 내분을 더 격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예 우리를 조롱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찬덕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세종은 서둘러 진화하듯 말했다.
“진정하게.”
“대인. 모르시겠습니까. 수나라 사신단이 고구려 정벌을 언급했습니다. 한데, 고구려가 이를 파악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고구려가 비웃는 책봉이나 받게 된 겁니다.”
“······.”
“우리 신라의 정통성이 수나라 황제의 사신단으로 세워지는 모양새로 비치게 만드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수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않을 수는 없네. 아니, 애초에 폐주가 고구려의 주구가 된 이상 우리는 수나라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지 않나? 당항성을 되찾기 전에 우리는 그들과 다시 통할 수도 없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손을 맞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일세.”
김세종의 말 또한 옳았다. 철저하게 고구려와 손을 잡았을 김백정과 겨루자면 외교적으로 수나라의 책봉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니, 대대로 수나라 황제의 책봉이 절대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아니, 평소였다면 강렬하게 갈망했을 것이다. 이는 명확하게 동방의 중추로 인정받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모순이라는 겁니다. 고구려는 대체 왜 수나라 사신의 이동을 허락해줬겠습니까.”
“······.”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지금 신라는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폐주는 필시 선대와의 연관성을 꺼내서 정통성을 강조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나라 황제의 책봉으로 왕위를 이어가는 수준이 된 겁니다. 이를 가볍게 넘기시면 큰 화가 미칠 겁니다.”
“······폐주가 이를 활용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고작 고구려의 주구에 불과한 이를 우려하는 건 압니다. 그러나 내전이라는 심대한 정국에서 우리는 모든 걸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잊으셨습니까? 천하에서 가장 오랜 세월 내전을 치른 나라가 바로 고구려입니다. 그들은 어떤 방식을 취하면 내전에서 승리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수나라의 사신단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 단지 조롱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아직은 무엇 하나 명쾌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간악한 고구려라면 필시 경천동지할 계책을 시작했을 겁니다.”
타당한 접근방법이었다. 그래서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찬덕은 한숨을 쉬며 오만상을 지었다.
김세종 역시 찬덕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반박의 여지가 없는 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상대등으로서 상황을 복잡하게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명쾌한 해결책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확실하게 규정해야 하네. 분하지만 고구려가 주도하는 동방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 것일세. 그러나 이는 처음 경험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다시 준비하며 시작해야 하는 것이네.”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까.”
“어쨌거나 수나라 황제의 책봉은 호재일세. 고구려의 의도 따위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힘을 키우는 방책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모든 건 명분에 불과하고, 허언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보다 이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선왕 시절 구축한 광활한 영토는 이미 3할이 사라졌을 정도로 위기 상황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도 폐주가 성주들을 설득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백 번을 생각해봐도 고구려는 신라의 내전을 해결할 생각이 없다고 여긴다네. 최대한 길게 그리고 치열하게 이어지도록 유도할 것이네. 하면, 폐주가 남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이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누구겠는가.”
“응당 백제일 겁니다. 그들은 이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네. 그들이 대군을 일으켜 우리의 변방을 공격한다면 쉽사리 막아낼 수 없는 것도 작금의 처지일세. 즉, 우리가 당장 해야 할 건 고구려가 지원하는 폐주를 도모하는 게 아니라 대백제 전선을 공고하게 구축하는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