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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26화 (126/199)

126화 대계란 무엇인가(3)

126화 대계란 무엇인가(3)

왕고덕을 만난 목리문차는 참담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의 무례함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냉정한 동방의 천하에서 일시적인 수모는 백 번이라도 참을 수 있다. 곤혹스러운 건 제대로 협상을 진행하기도 전에 큰 난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 고구려 막리지는 동맹의 대가로 위계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심지어 그것도 굴욕적인 수준으로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백제가 고구려의 번국 수준으로 고개를 숙여야만 동맹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과감하게 내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요구라도 다 수용하시오.

이미 군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이는 정치적 언어였기에 모든 걸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정치적 언어였기에 모든 걸 벌할 수도 있다.

즉, 행위에 대한 책임은 철저하게 사신단의 몫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목리문차는 쓰게 웃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폐하께서는 외교 실패의 책임을 내게 덮어씌우실 것이다.’

이미 군왕의 노여움에 노출된 상태였다. 이번에 고구려 외교를 책임지게 된 이유는 신뢰가 아니라 징벌의 의미와 직결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굴욕을 참고 동맹을 체결할지라도 폐하께서는 실리만 취하고 나를 문책하실 것이다.’

그야말로 외통수였다.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답답했고, 속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처량한 신세였다. 사실상 토사구팽이나 다름이 없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되돌아보면 태자 시절부터 군왕의 능력을 입증했었다. 하지만, 연이은 패배로 위축되었을 뿐이었다. 다시 기회가 오자 누구보다도 명쾌한 판단으로 백제의 부흥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이를 함께 모색하지 않고, 군왕을 탓한 세월이 있었으니 어찌 함부로 원망할 수 있겠는가.

“휴······.”

깊은 고민에 홀로 평양 도성을 배회했다. 왕고덕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감시할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아직은 명확한 적대국인데 너무 허술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

오래 걸리지 않아 왕고덕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목리문차의 눈동자는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런 생기라니······.’

과거 선왕 시절 중흥의 기치를 꺼내어 동방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때도 백제의 사비도성은 이와 같은 생기가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고구려 백성은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을 수도 있고, 희미한 웃음을 보일 수도 있다. 다양한 웃음, 이는 분명한 생기였다.

‘고구려라고 하여 어찌 본국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끝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기에 백성은 피폐할 수밖에 없을 것이거늘.’

동방의 패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철저하게 분열되었기에 수백 년간 첨예한 쟁투가 이어졌다. 이 시간에서 백성은 웃을 수 없다.

그런데 평양 도성의 백성은 왜 웃고 있는 것인가. 목리문차는 평생 이토록 맑고 거대한 생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단서라도 찾고자 할 때였다.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니 어찌 지나칠 수 있겠소이까.”

목리문차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반갑소. 나는 막리지 고정의라고 하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예를 보이며 다가왔다. 딱 그 정도였는데도 목리문차는 크게 감탄했다.

‘어찌 이토록 상대를 존중하고 예를 갖출 수 있는가. 분명 이 자도 막리지이거늘.’

그 순간 오만하고 무례하던 왕고덕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

목리문차는 진실로 고정의가 반가웠다. 대화가 잘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나는 양국의 동맹에 아주 많은 관심이 있소.”

시작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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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라는 오묘한 두 글자를 정의 내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생각이나 접근이 다를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외교는 가만히 있어도 모두가 찾아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역량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또한 간단했다.

단순하게 힘의 외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교도 결국 말과 말이 오가는 처세의 확장이기에 누군가를 상대할 때 불필요한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찾아오게 하는 역량이라는 것이었다.

하여,

“외교라는 건 결국, 약소국이 하는 것이옵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외교 공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었다.

우리는 복잡한 수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힘을 빌리러 온 상대와 대화할 때 백 가지 변수를 고민해야 한다면 국력은 왜 키우겠는가.

적어도 동방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리된 것이었다.

이번에 백제가 찾아온 것도 다르지 않은 이유였다. 엄밀히 따질 때 그들과 우리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라의 남북조 시대가 개막되면서 상황이 아예 바뀐 것이다.

“백제 왕은 철저하게 실리를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한 것이옵니다. 바로 외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사옵니까.”

선대왕 시절 크게 패하여 국가가 휘청였던 백제였기에 신라의 분열은 다시는 오지 않을 호기로 인지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어찌 활용할지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옵니다.”

그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계책을 펼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신이 이미 오만한 태도로 목리문차를 크게 자극했사옵니다. 우매한 자가 아니기에 본국이 위계를 요구하는 방침을 세웠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아무리 백제가 다급하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고개 숙이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들과 싸웠던 장구한 세월이 이를 말해주고 있소.”

“그러하옵니다. 설령 지금은 진심일지라도 언제 다시 태도가 바뀔지 모르옵니다. 더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수지 않겠사옵니까.”

만일, 백제가 남조 신라를 평정하기라도 한다면 고구려는 남쪽에 거대한 근심을 만들게 된다.

아니, 애초 사안을 더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신라와 백제는 아예 결이 다른 나라였다. 지금 고구려가 백제를 정벌하고자 한다면 온 국력을 동원하더라도 부족함이 있다. 그만큼 내재한 백제의 역량이라는 건 대단했다. 이건 원 역사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나라는 멸망한 뒤에도 미친 바람처럼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 엄청난 역량을 감당하려면 고구려는 정말 거덜 날지도 모른다. 이러한데, 백제가 남조 신라를 병합하는 걸 넋 놓고 지켜만 본다는 건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그랬다.

이는 너무나도 곤란한 일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북방의 패권을 확보하기 전까지 남조 신라는 건재해야 한다. 고구려가 수십만 대군으로 한반도 남부를 도모할 역량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그리되어야 했다.

물론, 고작 한반도 남부의 일부를 지배하는 백제도 쉽사리 어찌하지 못하는 역량으로 세계 제국인 돌궐을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 건 유목 국가인 돌궐과 정주 국가인 백제의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발생하는 차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방은 천천히 고사시키며, 단번에 내지르면 가능하지만, 백제는 목숨을 걸고 성을 점령해야 하기에 아예 다른 것이었다.

“해서, 이번 대계가 중요한 게 아니겠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번 사안은 북방의 일보다 더 신중하고, 정확하게 접근해야 해야 하오.”

“그러하옵니다. 아마 지금쯤 막리지 고정의가 목리문차를 만나고 있을 것이옵니다.”

“고 막리지라면 실수하지 않을 것이외다. 필시 큰 성과를 낼 것이니 우리는 미리 다음을 준비하면 되오.”

“그렇사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번국에 일러 백제의 국경을 약탈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바로 집행하시오.”

이미 기병만 수만에 이르는 나라들이다. 그들이 눈을 부라리며 백제를 약탈하면 감당하는 게 절대 쉽지 않다. 아니, 이건 천하의 누구라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 고구려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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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리문차는 속이 시원했다. 평생 이처럼 속이 쾌적하고 평안한 건 처음이었다. 너무 후련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질 정도였다. 물론, 고정의를 그냥 두고 그리할 수는 없었기에 호탕한 웃음으로 합의 봤다.

“하하하! 참으로 말이 잘 통하오. 내가 너무 기쁘오.”

“이런. 그리 일러주니 나 역시 마음이 한결 가볍소이다.”

“아니외다. 나는 진심이오. 그렇지 않아도 대체 어찌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는데 말이외다.”

고정의는 대놓고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목리문차를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왕 막리지의 말에 언짢았을 것이오. 하. 참으로 부끄럽소.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하하하. 아니외다. 나는 고 막리지와 대화를 나누며 이미 잊었소.”

“허. 이토록 호탕하고 배포가 크니 내가 어찌 감탄하지 않겠소이까.”

“하하하! 과찬이외다.”

고정의의 미소는 더 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 막리지가 정말 제대로 속을 긁었구나. 몇 마디 가벼운 말에도 이토록 사람이 호의를 베풀다니.’

정말 한 게 없었다.

최소한의 예의만 보였을 뿐인데 목리문차가 너무나도 기뻐하고 있었다. 아니, 과장을 좀 보태서 하대만 안 한 수준인데도 말이다.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구나.’

의도치 않게 환심을 사게 되었으니 대화가 잘 풀릴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가볍게 말을 꺼냈다.

“대대로 평양계 귀족들이 호전적이고 외교에 무지하오.”

“허. 그렇소?”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모르는 척할 필요 없소. 본국과 귀국은 오랜 세월 혈전을 치르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국내계와 평양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모르지 않을 것이외다.”

“음. 뭐. 사실 그렇소. 한데, 갈등이 봉합되었다고 들었소만.”

“허. 싸우지 않으면 화해한 것이겠소? 그저 다툴만한 사안이 없었을 뿐이외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결국, 다른 관점이 도출되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소이까.”

“그 말씀은······.”

“이미 짐작하셨으리라고 생각하오.”

고정의는 몸을 앞으로 슬쩍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국내계는 백제와 항구적인 동맹을 원하오.”

“정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국내계도 남진은 선호한다고 들었소만.”

“이미 한수 일대를 우리의 번국이 도모했소이다. 더 내려갈 이유는 없소. 그럴 여력도 없소.”

“그 말은 한수는 우리가 포기하라는 뜻이구려.”

“꼭 한수가 아닐지라도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이 들어온 곳이외다. 한데, 백제가 탐을 내면 결국 전쟁이 발생하지 않겠소? 그리고 나는 이런 대화가 서로에게 별로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소이다.”

맞는 말이었다.

목리문차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면, 남조 신라를 우리가 도모하는 걸 동의한다는 것이오?”

“물론이오. 우리 국내계는 무의미한 전쟁을 찬성하지 않소. 만일, 백제에서 더는 북을 바라보지 않으면 양국은 적어도 100년은 평화를 이어갈 수 있소. 어떻소?”

“이 내용이 고구려의 공식 입장이 될 수 있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소? 아니······.”

고정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보다는 세월이 더 지났을 때 공식 입장이 되어도 무탈하다고 생각하오.”

너무나도 익숙한 향이 나는 말이었다. 목리문차의 심장이 매섭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 국내계는 작금의 태왕을 찬성한 적이 없소.”

그리고

“나 역시 왕족이라면 왕족이 아니겠소?”

이는 백제에도 너무나도 익숙한 향이었다.

목리문차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정말 혈통이 같긴 같은 것이로다. 그러니 내전을 즐기는 것인가?’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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