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대계란 무엇인가(2)
125화 대계란 무엇인가(2)
작금의 천하에서 고구려를 바라보고 있다면 부월수를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이 행한 지부상소는 그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연좌였기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놀라운 정치적 행위를 진두지휘했다고 하니 이계찰은 크게 동요했다.
‘이 사람이 지부상소의 설계자······? 허. 이런 거물이 직접 왔단 말인가?
일국의 대계는 표면상 외교와 정치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재적인 역량을 분출하는 건 역시 사상의 영역이었다. 한마디로 의연은 고구려의 중추에 있으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보니 의연은 참으로 법력이 높아 보였다. 특히, 미소가 너무나도 자애로웠다. 보고 있노라면 부처님의 말씀이 그냥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음도 참으로 편해졌다.
“이런. 내가 대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소.”
“하하하! 아닙니다. 소승이 평소 법력을 숨기고 다닙니다. 그러니 쉽사리 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하하. 이리도 너그럽게 이해해주니 내가 마음이 참으로 편하오.”
“모르셨습니까. 관세음보살께서는 다 이해하십니다. 자비로우시거든요.”
“하하하! 관세음보살이었소?”
“그렇습니다. 대인.”
“오늘 내가 크게 배우게 되었소.”
부월수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순탄하게 이어졌다. 걸림돌이라는 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이는 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최근 이계찰은 정치적으로 수세적인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고구려의 중추가 분명한 부월수의 설계자가 은밀히 찾아왔다는 건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의연 역시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고자 부지런히 미소를 지었다. 이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최선을 다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력했다. 자애롭게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아파가한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또한, 고흘 장군께서도 이계찰과의 만남을 이르셨다.’
일부러 가시밭길을 갈 필요는 없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돌궐의 주류와 손을 잡는 게 가장 좋다.
그러나 지금 돌궐은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수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 편히 수나라의 세폐를 받는 걸 선호하고 있다. 애초 그들의 목표가 세폐이기도 했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데, 이계찰만은 예외로 고구려 동맹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유학을 전할 곳은 아파가한이 아니라 이계찰이 있는 이곳이었다. 즉, 목표와 대상 그리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대인. 소승이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사. 나는 그 도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소만.”
“어렵지 않습니다. 소승의 활동을 보장해주신다면 고구려 조정에서 대인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겁니다.”
“지지라. 외부의 지지란 허상과도 같은 것이외다.”
“대인께서 요구하시면 고구려에서 과감한 결정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돌궐의 어려운 순간마다 대인의 결단으로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데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뭄의 단비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계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 기회다. 이미 내게 수만 마리의 돼지를 넘겼으나 성과를 전혀 보지 못한 고구려가 아닌가. 지금 의연이 내 앞에 있다는 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생각을 정리하니 절박함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이계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공간을 마련해주리다.”
“하하하. 이렇게 호탕하시니 소승의 마음이 참으로 가볍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무엇을 먼저 논의하면 좋겠소?”
“응당 지부상소가 아니겠습니까?”
지부상소, 이 넉 자가 언급되자 이계찰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지부상소라니. 그래. 어쩌면 돌궐 내부의 여론을 한 번에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기쁜 일이었으니 말이다.
-----
이건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신라의 남북조 시대가 펼쳐졌기로서니 그 콧대 높은 백제가 먼저 사신을 보내온다는 건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하니 어쩌겠는가.
환하게 웃으며 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예 환호성까지 지르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나의 격한 인사에 흡족한 것일까?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짓던 백제 사신단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이가 나서면서 말했다.
“반갑소. 백제국 사신단 정사 목리문차라고 하오.”
“하하하!”
나는 정말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 오게!”
내 말에 목리문차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딱딱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리 만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암. 그렇지. 우리 고구려와 백제는 언젠가는 만날 운명이었네. 아주 잘 오셨네. 그래. 밥은 챙겨 먹었나? 많이 시장할 것인데 일단 한 끼 하겠나?”
“······.”
“이런. 말할 힘도 없나 보군.”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멀다면 먼 길이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일단 식사부터 하시게. 내가 최고의 연회를 준비하겠네!”
“이보시오······.”
“허.”
목리문차의 말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외교라고 할지라도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진지하게 한 마디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어찌 이리도 무례한가?”
“나는 백제를 대표하여 온 사신단의 정사요. 어찌 하대하오? 참으로 무례하오.”
“음? 허. 자네는 또 왜 이러나?”
“이보시오!”
“하! 이보시오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사람이 당황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목리문차가 딱 이랬다.
그런데 나 역시 심각할 정도로 불쾌했기에 목리문차의 감정까지 고려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가르침이라는 걸 내리는 것이 선각자의 도리인 것을.
불쾌함을 밀어내며 애써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진실을.
“백제의 건국을 되돌아보게.”
“뭐요?”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정확하게는 백제의 시조가 우리 추모왕의 아들이 아니던가? 이는 양국의 관계가 정확하게 부자 관계라는 걸 말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거늘!”
“감히 타국의 건국을 이렇게 조롱할 수는 없소!”
“해서, 추모왕께서 온조왕의 부친이 아니신가!”
“그, 그건······.”
“하! 지금 건국을 왜곡하고 날조하자는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자고로 일국의 신하라면 제 나라의 건국에 자부심을 품어야 하거늘! 이리 부끄러워하다니! 자네가 그러고도 백제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신단의 정사로까지 왔다면 군왕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다는 증거이거늘! 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참으로 답답하도다!”
일목요연하게 질타하게 목리문차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재차 핵심을 언급했다.
“말해보게. 내 말이 틀렸나? 백제의 온조왕께서는 우리 고구려 추모왕의 혈통이 아닌가?”
“그, 그건······.”
건국이 어떤 과정을 거쳤더라도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간 양국이 피를 얼마나 봤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러니 목리문차의 입장은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건국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찌 공식적인 외교 협상의 자리에서 하대할 수가 있소?”
아직도 모른다.
나는 정말 답답했다.
“건국의 위계가 명백하거늘 어찌 하대하지 않겠나.”
“하! 이보시오!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외다. 심지어 내가 공보다 연배가 훨씬 높거늘.”
그렇긴 했다.
누가 봐도 목리문차가 연장자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주도하는 동방에서는 이는 참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곧은 가르침을 받지 못한 백제였기에 아직도 어리석은 사고로 생각하고,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나씩 가르쳐줘야지.
“동방의 질서는 우리 고구려가 주도하는 것일세. 백제라고 하여 예외는 아닐세. 왜? 백제 역시 동방에 속하였으니까.”
“대체 무슨······.”
“어허! 듣게!”
나는 손을 거칠게 내저으며 목리문차의 말을 끊었다.
-----
신라의 몰락을 목도했기 때문이었을까? 무기력하던 군왕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의욕적으로 정사에 임했고, 귀족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그리고
-과거의 불경함을 모두 잊겠소. 그러니 반드시 성사하시오.
왕명을 수행하게 됐다.
숙적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다는 건 참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대 신라 전선을 확실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군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구려와는 훗날 혈전을 펼치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 고구려가 거절하더라도 상관없소.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는 것이니 말이외다. 어차피 신라가 무언가를 할 상황도 아니지 않소이까.
너무나도 타당한 말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이렇게 성급한가!”
고구려 막리지라는 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내 말을 끊지 말고 듣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왕고덕이 무례하고 억지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화를 내고 있다. 심지어 말까지 잘라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냥 말문이 막혀버렸다. 급기야 미친 게 분명한 고구려 막리지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게 될 정도였다.
“요즘 고구려는 유학을 아주 중시하고 있네. 자네 유학은 알고 있나?”
“······.”
“모르나? 답답하군.”
“알고 있소!”
“오. 제법이군.”
더 큰 문제는 답변하지 않으면 속을 박박 긁어대는 화법이었다. 아주 그냥 미칠 노릇이었다. 잘못 걸린 게 분명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잘 듣게.”
“······.”
“유학은 말일세. 실제 나이보다 종법상 위계가 아주 중요하다네.”
“······.”
“다시 말하지만, 우리 추모왕께서 백제 온조왕의 부친이 아니신가.”
“······.”
지긋지긋했다.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건국의 서사가 아니던가. 아니, 애초 위대했던 백제의 서사가 어쩌다가 지금 숨통을 옥죄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자네에게 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아우님이라고 한 것일세.”
정신이 너무 혼미해졌기에 그만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목리문차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유학은 예를 강조하오.”
“내가 자네에게 하대하는 게 바로 예법일세. 아니, 그리고 우리 고구려의 유학을 오늘 처음 접하면서 어디 함부로 말을 보태는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차라리 잘됐네. 온 김에 제대로 배우고 가게.”
드디어 알게 되었다.
왕고덕은 애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