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대계란 무엇인가(1)
124화 대계란 무엇인가(1)
작은 일을 처리할 때도 셀 수 없는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일국의 대계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국가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은 밤잠을 설치며 변수를 고려하고, 대안을 마련한다.
물론, 정확하게 무언가를 파악한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데 대돌궐 외교의 변수를 완벽하게 파악한 고정의는 실로 대단했다.
이럴 때는 찬사를 아끼거나 참으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다.
“진실로 감탄했소이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넘게 감탄했소. 어찌 모든 변수를 예측할 수가 있소?”
나의 극찬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돼지 떼를 이끌고 이동할 때 대카간 아사나 섭도가 강력하게 제동을 걸 수도 있다는 상황을 우려한 사람이 바로 고정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런 매뉴얼을 미리 고려하지 않았다면 초원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단지 돼지를 넘겨주고 끝난 게 아니었다. 그 행위 자체가 돌궐의 분열로 직결하게 되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실로 거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외다.”
내가 연이어 찬사를 쏟아내자 고정의는 전혀 부정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과찬이시오. 뭐. 사실 대단한 건 아니외다. 그저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훤하게 보이는 것이었소.”
“허. 이렇게 겸손하다니요! 내가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소이다.”
“하하하! 무릇 고구려인이라면 가끔 겸손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이까!”
겸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대화가 절정으로 향할 때 연자유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나의 계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데, 어찌 이를 언급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불편함이 가득했다. 슬쩍 봤는데 고정의는 아예 대꾸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라도 나서서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하하······어찌 자네를 잊겠는가.”
“거. 시작부터 끝까지 억지로 꺼내는 말 같습니다만.”
“이런. 굳이 그런 걸 느끼고 그러나? 그러지 말게.”
“허.”
“사실 말은 바로 해야지. 만일, 자네가 아니었다면 필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네.”
연자유가 오적을 설득하여 아사나 섭도에게 밀사를 보낸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최종적으로 돌궐의 분열을 가속할 것이니 말이다. 물론, 지금 거론될 일은 아니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인데, 연자유가 이리 나오니 어쩌겠는가. 웃어야지.
“하하하! 나는 필시 이리 생각한다네.”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대체 어찌 여겨야 하는 겁니까?”
“오해일세. 오해가 확실하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눈도 웃었다.
“보시게. 결과, 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우리가 대라편과 손을 잡았다고 여기게 되었네. 이보다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나? 그래. 맞네. 자네가 가장 중요했네.”
“허.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군요.”
그때였다.
“이러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을 박차며 들어온 사람은 애석하게도 고식이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대 돌궐 외교는 내가 전문가입니다! 내 동의가 없으면 아무것도 집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데, 여기서 작당 모의를 하고 있습니까!”
노발대발이라는 건 바로 이를 말하는 게 아닐까?
정말이지 고식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만 같았다.
동시에 나와 고정의 그리고 연자유는 순식간에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교환했다. 이는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리고
“이 사람! 왜 이제 왔는가!”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형님. 일찍 좀 다니십시오. 형님이 없으셔서 아무것도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일제히 강렬하게 환호하며 고식을 맞이했다. 정말 열과 성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식이 잠시 멈칫했다. 이는 우리의 판단이 유효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럴 때는 더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말해주는 게 옳은 법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가 먼저 모여서 안건을 대략적이나마 정리하고 있었네. 생각해보게. 어차피 자네가 최종 승인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실은 우리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다르니 말일세.”
“그렇지 않아도 의견을 정리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는데, 참으로 적절할 때 오셨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오셨으니 단번에 정리될 겁니다. 참으로 든든합니다.”
“잘 왔네.”
고정의는 딱 세 음절만 말했다. 그래도 그냥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쨌거나 연이은 안타에 기뻤을까?
고식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우리로서는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늘 그렇듯 우리가 고식을 나쁜 의도로 배제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와 고식이 점하고 있는 영역은 분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취합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건 분명하게 고식의 일이었다.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나 그만큼 정확하고 세밀하게 문서로 도출하니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바탕으로 대국적인 판을 수립하는 능력은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우리가 바로 이를 해야 했기에 종종 따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고식은 이런 전문 영역의 차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카간 아사나 섭도가 돼지 떼를 강탈했습니다. 이로 인한 결과를 분석해야만 우리는 새로운 행보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매사 너무 정확한 분석이 이뤄진 이후 일을 추진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지 않은가. 마냥 기다리면 시기를 다 놓칠 것이니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썩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예하 부족의 반란을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지.”
영혼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나의 답변이 불편했을까. 고식의 눈이 상당히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좌우를 바라보며 대뜸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 예. 좋습니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고구려는 다시 대카간 아사나 섭도와 손을 잡겠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이보게. 아파가한이 아니라?”
“형님. 우리는 아파가한입니다.”
일제히 반문을 꺼냈다.
그러나 고식은 코웃음을 치면서 우리를 비웃었다. 눈빛에도 한심함이 잔뜩 담겨 있었는데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참아봤다.
“허. 이 반응은 대체 뭡니까?”
“그게 아니라 일국의 대북방 정책인데 너무 줏대가 없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걸세.”
“줏대? 지금 줏대라고 하셨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래서 내가 그동안 뭐라고 했습니까. 제발 일단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아닙니까.”
“음. 그건 맞지.”
“그리고 보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대체 뭡니까. 어쨌거나 고구려의 국익이 아닙니까? 한데, 무조건 아파가한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음.”
“그와 함께 대카간을 압살하여 초원을 넘겨주기라도 할 겁니까?”
“그건 아니지.”
고식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굉장히 칼칼했다. 그래서 집중이 잘됐다.
“지금 우리는 분열할 가능성이 큰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 대카간과 다시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가 아파간을 향해서 공격해도 좋고, 아파가한이 들고 일어나도 됩니다. 그러니 이번에 보낸 돼지는 우호의 뜻이 되겠지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방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파가한, 대카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아.”
“하!”
그런데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러게 그냥 좀 가만히 계시라고 한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다 전략을 수립할 것이거늘!”
다시 혼나게 됐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먼 산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고정의가 이미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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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찰은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어서 의연을 빤히 쳐다만 봤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고구려의 승려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대인?”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찌 승려의 목소리가 이토록 속세와 가까울 수 있을까. 심지어 정치인 뺨치는 은밀한 태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
“소승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셨습니까?”
“미안하오. 내가 요즘 정신이 없소.”
의연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이계찰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
이내 합장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계찰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승려의 합장이 이토록 어색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난생처음이었다.
“대인. 소승은 우리 태왕 폐하의 왕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렇소······? 한데, 아무런 기별을 듣지 못했소. 또한, 우리는 승려를 요청하지도 않았소만.”
“소승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는데 종교보다 편리한 게 있겠습니까. 소승은 필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구려가 다시 우리와 우호를 증진하고자 한다는 것이오?”
“고흘 장군께서 왜 돼지를 그냥 넘겼겠습니까. 그분의 성정을 모르십니까?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을 겁니다.”
“한데, 분명 아파가한에게 가는 돼지라고 들었소.”
의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말했다.
“그래야만 대인께서 협상하러 오시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 방법이야말로 대인께서 다시 고구려 외교를 주창할 명분을 얻고, 상황을 이끌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보십시오. 돼지가 수만 마리입니다. 이 정도로 의사를 표현했는데 부족하다는 겁니까?”
“음.”
“대인. 다시 말씀드리지만, 소승은 왕명을 수행하는 승려입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 번 하셨소만.”
“허. 당장 소승이 달려가서 고흘 장군을 모셔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그리할까요?”
이계찰은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승려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도 말이 괴이하고 행동이 앞선다는 말인가.’
이계찰은 황급히 의연을 붙잡았다.
“내, 내가 실언했소. 일단 앉으시오.”
“대인께서 잡지 않았다면 축지법을 사용해서 달릴 뻔했습니다.”
“하하하······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어떤 일을 하시오? 이토록 은밀하게 왕명을 수행할 정도면 가벼운 위치는 아닐 듯하여 묻는 것이외다.”
의연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중해졌고, 어떤 감정이 담겼다.
세상은
“부월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자부심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