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이제이
123화 이이제이
아파가한 대라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당장 욕설을 내뱉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고구려에서 우호의 표현으로 보낸 수만 마리의 돼지였다. 정치, 외교적 의미를 떠나서 기근이 발생하여 모든 초원이 허덕이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돼지 떼라는 건 그야말로 천군만마나 다름이 없었다.
“하!”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은 살기까지 매섭게 치솟았다.
“기근으로 뼈를 갈아 양식으로 삼고, 역병까지 창궐했다. 고구려의 지원이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한데, 우리의 성과를 대카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로챈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치솟는 화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하! 게다가 고구려는 그걸 또 뺏기는 건 뭐라는 말인가!”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예 이해가 안 됐다. 고구려가 어떤 나라였던가. 과거의 일은 하나씩 거론할 필요도 없다. 수나라의 사신의 면전에서 선전포고까지 한 오만한 나라다. 한데, 이렇게 허무하게 돼지를 빼앗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고, 돼지를 떠올리면 속이 쓰리고 아팠다.
“이를 어찌한다······.”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기근도 부족하여 대카간의 정치적 견제까지 발생할 위기였다.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날은 보장할 수가 없었다.
이것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다소 황당한 소식까지 보태졌다. 그러니까 돌라가 보낸 밀사의 말이었다.
“뭐? 고구려가 대카간과 다시 손을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
이 경우 고구려가 별다른 충돌도 없이 대카간에게 돼지를 준 이유가 설명된다. 그러나 이리되려면 가장 중요한 지점을 해결해야만 한다. 문제가 있었다.
“대카간이 수나라와 협상하며 고구려와 외교적 단절을 선언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고구려가 수만 마리의 돼지를 조공하고 머리를 숙였다는 말이 된다. 이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는 지금껏 이렇게 일방적으로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곧 오만과 직결하지 않던가.
대라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고구려 막리지 고정의의 말이었습니다.”
“······.”
“정말입니다. 소인이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오랜 신뢰를 버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허.”
명확한 것이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대라편은 생각이 깊어졌다.
‘만일,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구려가 돼지를 보낸 걸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분명 공식적으로 돼지의 주인은 나였다. 그런데 애초 대카간이 주인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직 하나였다.
‘내분······?’
고구려가 교묘하게 돌궐의 분열을 꾀한다면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세력의 분열이라는 건 최악과 직결한다. 평온한 시절에도 그러한데 지금과 같은 난세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데, 분열은 최악일까?’
당연히 분열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카간을 바라보는 데 이를 곡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었다.
대라편은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다. 복잡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고구려든 대카간이든 지금 기근 극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수나라의 세폐가 대카간에게 향하고, 고구려와 우호적이다? 이는 돌궐이 아니라 내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집중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정확하게 당장 해야 할 일은 추진하는 게 옳았다.
바로
‘기근을 벗어난다.’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내가 가로채야 한다.’
어차피 수나라도 돌궐의 분열이라면 환호성을 지를 것이니 말이다.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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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찰은 머리가 아팠다.
아니, 그냥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허.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려. 내가 틀린 말을 했소?”
“하!”
“화를 내지 말고 정확하게 말을 해보시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이오?”
지근찰의 목소리와 표정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상대의 화는 더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이계찰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아파가한을 거세하자는 말을 내가 어찌 이해해야 하오? 그건 곧 돌궐의 분열이외다.”
“분열? 아니지요. 정확한 위계의 정립이자 돌궐의 통합이외다. 또한, 불순한 무리가 돌궐의 일에 개입하는 걸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이참에 물어야겠소. 실은 전부터 내가 참으로 궁금하였소. 공은 대체 왜 이렇게 고구려에 집착하오? 우리의 국익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오?”
지근찰은 턱을 치켜들며 이계찰을 내려봤다. 그의 눈동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고구려가 아파가한과 밀약을 체결했소. 이를 듣고도 그들을 두둔하는 건 대체 어찌 된 이유요?”
“만일 오적의 밀서가 정말이라면 고흘이 돼지를 우리에게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외다. 어찌 이런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오?”
“어차피 우리가 강제하면 가지도 못할 상황이었소. 그러니 좋게 대화로 타협한 것이외다. 우리가 돼지의 절반이라도 아파가한에게 전해주길 바라지 않겠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소. 아파가한은 감히 대카간을 노리고 있으니 말이외다.”
지근찰은 경멸 어린 시선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전례 없는 기근이 들이닥친 이때 아파가한이 동진하고, 고구려가 서진하면 감당할 수 있소? 고구려 군은 공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고흘이 나설 것인데 말이외다.”
“······.”
“고구려와 아파가한이 밀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명백한 상황이오. 해서, 확실히 말하리다. 두 번 다시 대카간의 앞에서 고구려와의 동맹을 언급하지 마시오. 아시겠소? 이는 내가 베푸는 마지막 배려이자 경고라는 걸 잊지 마시오.”
“······.”
“수나라의 세폐까지 확보한다면 아파가한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소.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할 것이외다.”
이 말을 끝으로 지근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계찰을 바라보는 경멸 어린 시선은 강도를 더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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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기근은 수나라에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니, 아주 기쁜 소식이었다. 양견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려.”
“그러하옵니다. 폐하. 유목에 치중한 저들은 기근을 극복할 힘이 없사옵니다.”
소위 역시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 이리될 줄 알았으면 굳이 북방을 다녀올 필요도 없었을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아니외다. 최고의 성과를 도출한 일정이었는데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그렇사옵니까.”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위를 바라보는 양견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돌궐의 분열 가능성을 가져오지 않았소이까.”
소위는 잠시 멈칫했다.
‘이번 일정에 분열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가.’
다시 곱씹었으나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양견의 미소는 더 진해져만 갔다. 소위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엷게 웃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농을 하시니 신이 감당할 수가 없사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일러주시길 바라옵니다.”
“하하하!”
양견은 호탕하게 웃었다.
“돌궐은 이미 고구려 외교로 홍역을 앓았소. 우리는 이를 확인하지 않았소이까.”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돌궐의 심대한 내분으로 이어질 사안은 아니라고 여겼사옵니다.”
“아니지요. 만일, 돌궐이 고구려와 동맹을 굳게 체결했다면 이번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 남진을 감행했을 것이외다.”
“그렇긴 하옵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고구려와 돌궐의 군사 동맹이라는 건 말이옵니다.”
“그렇소. 그러나 우리는 양국의 동맹을 분쇄했소. 돌궐이 우리의 세폐에 정신이 홀린 것이란 말이외다. 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오.”
모든 것을 함축한 말이었다. 소위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만일, 세폐가 없으면 돌궐은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옵니다. 외교 실패에 대한 책임론도 불거질 것이며, 늦게라도 고구려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도 나올 것이옵니다. 허. 그러하옵니다. 이대로라면 기근 극복의 책임을 두고 돌궐은 큰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사옵니다.”
“바로 그것이오!”
소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 북방의 모든 것이 단번에 정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시오. 이때 우리가 손을 뻗으면 어찌 되겠소?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이 눈앞에 있는데 뿌리칠 수 있겠소?”
“이런. 혹시 아파가한을 고려하시옵니까?”
“그렇소.”
아파가한 대라편이 승계 문제로 대카간 아사나 섭도와 갈등을 일으킨 사실은 수나라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전례 없는 기근이 들이닥친 이때 손을 내밀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대카간과 대립 관계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소. 또한, 지금 중요한 건 제 세력을 보존하는 게 아니겠소? 필시 고개를 숙일 것이오. 하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대카간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하오.”
“과연 그러하옵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재물을 하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말이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아파가한이 돌궐의 분열을 제압하는 건 꼭 막아야 하오.”
여차하면 더 강력한 돌궐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신의라고는 찾을 수 없는 무리였기에 힘을 가지면 다시 전처럼 남진을 운운하며 세폐를 요구할 것이다.
양견으로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상의 재앙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소위도 고개를 끄덕였으나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파가한과 대카간이 팽팽한 대립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이는 수나라가 외교적 역량을 총집중해도 쉽사리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소위가 우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본국이 아파가한을 지원한다면 승패는 자명하지 않사옵니까. 대카간은 기근으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니 말이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있지 않소이까.”
양견의 답변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대카간과 고구려가 다시 힘을 합치면 상황은 아예 달라지는 것이외다.”
소위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본국이 아파가한을 지원하고, 대카간이 고구려의 힘을 빌리면 초원이 제법 팽팽하게 다투고, 피가 흘러넘치지 않겠소?”
이이제이였다.
심지어 동방과 북방을 모조리 엮어내는 초유의 방책이었다.
“이미 북방에 발을 들이밀었던 고구려외다. 우리가 지원하는 아파가한이 초원의 주인이 되는 걸 절대로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응당 그리할 것이옵니다.”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무리의 힘을 확실히 빼는 것이외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소위는 흥분하며 말했다.
“고구려는 후방에서 신라를 상대하고, 북방에서는 대카간을 지원해야 하기에 국력이 크게 쇠할 것이옵니다.”
“그렇소. 그새 남쪽의 근심을 해결한다면 천하의 주인은 응당 수나라가 될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