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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19화 (119/199)

119화 무너지는 북방(2)

119화 무너지는 북방(2)

이계찰은 괜히 가슴이 울렁이는 것만 같았다. 단지 마주했을 뿐인데도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애써 이를 숨기면서 말을 꺼냈다.

“익히 명성은 들었습니다. 장군.”

“하하하! 허명에 불과하오.”

노익장을 과시하듯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꾸하는 이는 바로 고흘이었다. 그의 모습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게다가 자신감이 너무나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이계찰은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며 지근찰와의 첨예한 논쟁을 떠올렸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아파가한에게 수만 마리의 돼지를 보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의문을 짓누르는 건 강렬한 탐욕이었다. 이미 대기근이 도래한 초원이었기에 수만 마리의 돼지는 너무나도 탐이 나는 것이었다.

지근찰은 눈을 번뜩이며 재빨리 나섰다.

“이를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돼지를 강탈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강탈이라니요? 말씀을 똑바로 하시오. 그들은 우리의 초원을 지나가고 있소. 응당 응대해야지요. 게다가 정확하게 합시다. 아파가한은 대카간의 수하가 아니오? 우리가 개입하는 건 당연하오.”

“그,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허. 매사 반대만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물론, 수만 마리의 돼지가 탐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훗날 아파가한과 따로 정리할 부분이었다. 현재로는 명백하게 고구려의 소유인 돼지 떼에 손이라도 댔다가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돼지 한 마리라도 손을 대보시오. 고구려가 웃으며 넘어갈 것 같소?”

“허. 이건 놀라운 일이외다. 그렇군요. 고구려는 기근에 허덕이는 우리를 도발하는 것이외다. 어찌 이웃의 비극을 이렇게 조롱할 수가 있소이까. 이보다 고약할 수는 없소.”

“제발 망상에서 벗어나시오! 이런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정녕 모르는 것이오? 애초 저열한 방법으로 고구려를 외면하지 않았다면 발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도무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고구려를 도발이나 하려는 지근찰을 이해하기조차 하기 싫었다.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일단 지나가게 해야 하오. 아파가한과 따로 정리해야 할 일이외다.”

“하! 됐소. 그러고 망상이라고 하셨소? 내가 더 제대로 된 망상을 말해줘도 되오?”

“뭐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아파가한은 계승 문제로 대카간께 불만을 품고 있소. 이를 잊으셨소?”

“······.”

“보시오. 고구려의 지원으로 기근을 이겨낸 아파가한이 대카간이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소?”

아파가한의 불만과 욕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명분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근찰의 말은 합당한 것이었기에 이계찰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돼지 떼가 먹을 초지도 없소. 저대로 이동해봤자 다 죽소. 하면, 어찌하면 되겠소? 우리가 인계한다고 하면 되오.”

다시 이계찰의 말문을 막는 말이었다.

그런데

“돼지를 이끌고 가는 이가 고흘입니다.”

애초에 감당할 수 없는 무장의 이름이 등장했다.

일찍이 돌궐의 대군을 도륙했던 고구려 최고의 무장이 언급됐다. 돌궐이 가장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고, 침묵을 불러일으키는 무게감이었다.

자연스레 분위기는 경직됐다.

또한,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내 지근찰이 입술을 깨물며 날카롭게 말했다.

“고흘이 두려운 건 대군을 이끌 때나 그런 겁니다. 고작 돼지 떼를 이끌고 오는데 무엇이 대수입니까. 그러니······.”

“이보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이계찰은 대카간의 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노발대발했다.

다 알겠으나 이 말만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흘이었다. 그에게 겁박한다는 건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소? 그를 어찌한다는 건 고구려의 30만 강병이 돌궐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하오. 묻겠소. 이를 감당할 수 있소? 만일 그러하다면 실성한 것이외다!”

“하! 하면, 이대로 그냥 두자는 것이오?”

“내가!”

이계찰은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만날 것이오. 하여, 사정을 말하면 되오.”

“큭. 사정을 말한다? 그래. 구걸이라도 하려는 것이오?”

“공은 수나라 세폐나 챙기시오. 고구려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 제발 더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말만 하지 말고 성과를 구체적으로 가져오라는 말이외다. 적어도 내가 고구려와 동맹을 도출했었던 것처럼 말이오.”

“하! 만일 내가 수나라와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소? 수십만의 대군을 출병하여 장성을 넘었다고 한들 초원의 대기근으로 크게 곤혹스러웠을 것이오. 그래. 내 말이 틀렸소?”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말에 불과했다. 기근을 예상하고 수나라의 세폐를 받고, 고구려와 적대한 게 아니지 않은가. 이계찰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사나 섭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이미 그는 이 난관을 극복할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

상념을 걷어낸 이계찰은 심호흡하며 말을 꺼냈다.

“장군. 초원의 기근으로 돼지 떼를 이동시키는 게 여의찮을 겁니다.”

“음. 그 말을 하려고 나를 찾은 것이오? 나는 정치와 외교를 잘 모르오. 그러니 말을 어렵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송구합니다. 아파가한에게 돼지를 지원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폐하께서 왕명을 내리셨소. 그게 다요.”

말문이 막힐 정도로 고지식한 답변이었다. 이러면 속 깊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본국과 돌궐의 대카간은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들었소. 한데, 나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참으로 당황스럽소만.”

“그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고구려와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대화가 계속 헛돌고 있소.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제대로 하시오.”

“······돼지를 우리에게 넘겨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이 일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가 다시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허. 본국이 귀국에 친선을 위해서 조공이라도 바쳐야 하오? 심지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좋아질 수도 있다? 내가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하오?”

“송구합니다. 실언에 불과하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고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 대화에 흥미가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장군.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또한······.”

“알겠소.”

“예······?”

허를 찌르는 고흘의 반응에 이계찰은 당황했다. 물론, 원하던 일이었으나 이렇게 성사될 줄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도와달라고 하여 알겠다고 한 것이오. 돼지를 모두 데려가시오.”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오.”

고흘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잊으면 양국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는 걸 새기시오.”

“물론입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감격한 이계찰의 말을 고흘은 적당하게 받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돼지를 대카간에서 넘겨야 한다고 했으니 되었다.’

이 일을 아파가한이 알면 어찌 나올지 벌써 궁금했다. 눈으로 보지 못하여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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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찰의 눈은 가늘어졌다. 씰룩거리는 볼은 그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당황 혹은 충격의 감정이 아닌 불쾌함이 표출된 것이다. 그는 고개를 뒤틀며 오적의 밀사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자세히 말해주시오.”

“말 그대로입니다. 본국이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습니다.”

“허······.”

지근찰의 눈동자가 밀사를 위아래로 훑었다. 입가에는 묘한 비웃음도 담겼다.

이를 느낀 밀사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대놓고 이렇게 멸시하니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소국이지만 족히 수만의 기병입니다. 기습을 가하면 고구려의 도성을 단번에 타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소?”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거란족의 기병은 제법 용맹했다. 그들이 일제히 고구려의 후방을 타격하면 상당한 효과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지근찰은 이를 전혀 티 내지 않고 여전히 비웃으며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다 알겠소만 내게 이를 전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애초 고구려의 번국이 되고자 그 먼 길을 이주했소. 시일이 오래 지나지도 않았소. 나는 이 의문을 해소해야 할 것 같소만.”

“애초 거란국은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약조를 어기고 두 개의 나라를 만들었으니 어찌 불만이 없겠습니까.”

대략 무슨 사정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고구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웠다.

‘고구려가 후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구나.’

감당하지 못한 무리한 팽창이 초라한 결과가 분명했다.

“또한, 소인이 파악하니 일전에 아파가한의 밀사가 평양을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뭐요······?”

“어떤 내용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이번 돼지 떼의 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

지근찰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파가한이 고구려와 결탁한 것이다.’

이러면 모든 의문을 말끔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무조건 돼지의 이동을 막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파가한과 고구려가 무슨 짓을 할지 훤히 보이지 않는가.’

수나라의 세폐를 받게 되면서 고구려가 아파가한과 은밀히 내통하며 북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게 분명했다.

이를 악물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해줄 수 있다는 말을 믿겠소.”

“물론입니다. 하지만, 시기가 정말 결정적이어야 합니다. 본국이 공세를 펼칠지라도 고구려가 건재한다면 참으로 곤혹스러우니 말입니다.”

“그런 걱정은 넣어두시오. 수만의 기병이 후방을 교란하는 고구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돌궐이 무능하지 않소.”

“이런.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하면, 살펴 가시오.”

대화는 아주 순탄했다.

지근찰은 미소를 지었다.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주장하는 이계찰을 치워버려야겠군.’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어차피 고구려는 적국이다. 대군을 일으켜 돼지를 뺏으면 될 일이다. 또한, 이참에 고흘까지 제거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생각만 해도 상황이 즐거웠다.

방긋 웃으면 아사나 섭도를 찾았다.

그런데

“하하하! 내가 장군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소.”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대카간께서 이토록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아니외다.”

고흘이 이 자리에 왜 있단 말인가.

본능적으로 이계찰을 바라봤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동자가 참으로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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