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주구(走狗)(2)
117화 주구(走狗)(2)
애초 신라의 최고 정예군은 김백정의 슬하에 있었다. 뒤늦게 편성된 수을부의 3천 명은 사실상 급조한 병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전력의 차이도 현격했기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였다.
폐주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오직 정치적 사유에 불과했기에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더욱이 김백정은 선정을 베풀었기에 민심을 사로잡았다.
그러기에 김백정의 등장은 가장 피하고 싶은 경우의 수였다.
하지만 이는 현실이 되었다.
선봉에 서서 호통을 치는 김백정으로 인하여 신라군은 와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더냐?”
이미 패장이 된 수을부는 싸늘하게 노려보는 김백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한시라도 신라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았더냐?”
“······.”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참담한 패배였다. 수을부는 멍한 표정으로 김백정을 쳐다만 봤다.
“나는 신라를 위하여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싸웠다. 비록 패배했으나 신라의 군왕이었다. 한데, 너희는 어떠한 협상이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기껏 한 짓은 화백회의를 앞세워 나를 폐위시키는 것이었어.”
“······.”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
수을부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김백정은 그 꼴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그래서인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그 요망한 입을 움직여 변명이라도 하라.”
“정도를 찾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패하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하! 정도라고 했느냐?”
“발본색원하여 고구려의 주구를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끝내 을지문덕에게 패하였을 뿐입니다.”
찰나 김백정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김후직이 선봉으로 출병한 직후 을지문덕이 찾아왔다.
-당장 물러나라고 했다.
-폐하. 적어도 북원소경은 도모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하! 애초 나의 영토이니라!
-만일, 탈이 나지 않으면 되돌려드릴 것이옵니다.
-뭐······? 내가 그 말을 어찌 믿느냐?
-폐하. 어차피 아군이 점령하고자 한다면 당장 가능한 일이옵니다. 믿고 안 믿고는 폐하의 의지이옵니다.
-······.
수을부의 대군이 북상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만일, 일전을 각오한 병력이라면 크게 환대하였을 것이다. 함께 손을 잡고 기세 좋게 을지문덕을 패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수을부는 역도였다.
되새길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패장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방식으로 마무리하십시오.”
“······.”
“개인의 서사는 여기서 마무리되었으나 신라의 서사는 이제부터 시작할 겁니다. 죽어서라도 그 위대한 서사를 지켜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 참하십시오.”
“내가······.”
김백정은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못할 것 같으냐?”
“지금 당장 참하십시오.”
“너는 내가 고구려의 주구라고 했다.”
“사실입니다.”
“큭. 그래. 하지만, 죽기 전에 새겨라. 내가 진짜 고구려의 주구가 되었을 때 역도의 서사가 어찌 귀결되는지 보여줄 것이니라.”
수을부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라의 역사가 이렇게 끝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그 마지막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래서 내가 폐위를 반대한 것이다. 신라의 분열은 자명하기에.’
그런데도 대군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건 폐주의 마지막을 비참하지 않게 예를 다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일은 이미 이리되었으니 말이다.
수을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신라의 서사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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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후직을 빤히 쳐다봤다. 최근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들어서 눈도 두세 번 껌뻑거렸다.
아. 이래서 시대의 선각자들은 주기적으로 먼 산을 바라본 것이 분명했다. 이는 실로 큰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진심으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먼 산이었다. 하지만, 김후직의 간곡한 목소리가 먼 산을 계속 치워버렸다. 아니, 은근슬쩍 당위성까지 담아내니 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인. 힘을 보태주십시오.”
“적극적으로 보태지 않았는가. 을지문덕이 북원소경까지 점령했는데 대체 뭘 더 도와달라는 것인가.”
“그러한들 신라의 왕도가 역도의 손에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곤란하게 됩니다.”
“아니, 이보게. 이미 1만에 가까운 병력을 확보하지 않았는가. 그들을 이끌고 남진하면 어찌 역도들이 저항하겠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도들이 수성으로 전환하면 수시로 공성전을 펼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쉽게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비상시국이었다. 신라의 심장부는 역도가 장악하고 있고, 군왕은 변방에 머물고 있다. 이를 진압하자면 최대한 빠르게 남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이론상으로 가능할 뿐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신라이기에 김백정은 이미 폐주에 불과했다.
조만간 모든 신라의 세력이 그를 적대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유가 뻔했다.
-고구려의 주구.
이 프레임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을지문덕의 북원소경 점령으로 김백정은 신라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병사들에게 큰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신라의 왕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역모를 제압하지 않으면 신라는 역도의 손에 통째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할 때 김후직이 다급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나는 다소 과장스레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아니,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신라 왕도까지 함께 가자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우리가 그럴 여력은 없네.”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국원소경까지 확보하지 않았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대화의 단절을 시도했다. 하지만, 김후직은 절박했기에 다시 질척거렸다.
“대인.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왕도에 역도가 있지 않습니까. 1만의 대병이 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역도는 명분을 세울 것이니 기세가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마음먹고 말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닌가. 북원소경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힘을 키워서 기어이 내전의 승자가 되게나.”
내 말이 끝나자 김후직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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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직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말을 꺼냈다.
“설마······.”
“음?”
“설마 본국의 분열을 꾀하신 겁니까?”
“그걸 이제 알았나?”
“대인!”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왕고덕은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한데,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이 사안은 우리가 주도한 게 아니지 않나? 처음부터 끝까지 신라가 선택한 것일세. 애초 우리가 요구한 공물이나 제대로 바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네. 사실 우리도 신라인 노비를 기대하고 일을 펼쳤네. 한데, 지금 상황이 참으로 복잡하게 됐다는 말일세. 우리야말로 피해자일세.”
“하!”
“그리고 실은 그냥 무시하려다가 처지가 너무 가련하여 북원소경이라도 내준 것일세. 어떤가. 이만하면 우리도 최선을 다한 게 아닌가? 성의는 제대로 표시한 것 같은데?”
김후직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처음부터 본국을 영구적인 내전을 원한 것이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휘말린 것이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래. 고구려가 미치지 않고서 아무런 대가 없이 북원소경을 내주었겠는가. 최소한의 국세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었다.’
장기판 위의 말이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김후직은 머릿속이 아찔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 행여 힘이 부족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면 본국의 대군이 반드시 지원해줄 것이네.”
왕고덕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자네가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한 가지 좋은 말을 해주겠네. 고구려의 국세가 유지되는 한 자네는 절대 몰락하지 않을 것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러니 편히 움직이게.”
“······.”
“양국의 통로는 오직 자네로 단일화될 것이라는 말일세.”
김후직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선택하게.”
바보가 아닌 이상 왕고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말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영원한 부귀영화가 보장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서 아예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꼭 찬탈이 아닐지라도 그러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고구려가 뒤를 봐준다면 역도는 절대로 우리를 범할 수 없다. 승리하지 못할지라도 패배하지 않는 싸움이다. 만일, 기어이 내전의 종지부를 찍어낼 수만······.’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생각을 정리한 김후직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하하. 무엇인가.”
“역모의 진압을 방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보게. 내가 어찌 자네를 곤란한 입장으로 내몰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가?”
이는 되도록 분열의 장기화를 요구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김후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수성을 중심으로 하겠으나 기어이 품어야 할 땅이긴 합니다. 이를 약조하셔야 합니다. 꼭 필요한 말입니다.”
“음. 뭐 좋네.”
왕고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철저한 불개입을 약조하겠네.”
“좋습니다. 대인의 뜻을 따르지요.”
“암. 나만 믿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자네의 몰락은 없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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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직을 물린 뒤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굉장히 색다른 내용이었다.
“수나라 사신이라.”
수나라 사신이 신라 땅이었던 당항성에 당도했다가 우리에게 잡혀버렸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고정의는 즐거움을 참을 수 없는지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신라에게 일러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수나라 황제 양견의 헛소리가 적혀 있었소이다.”
“하하하! 그자는 아직도 천하 정세를 읽지 못하나 보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외다.”
사실 수나라에서 동방의 사정까지 어찌 세세하게 알겠는가. 정확하게 따질 때 양견으로서는 적절한 판단을 하긴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신라가 눈을 부라리며 덤비면 고구려도 상당히 성가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왕 막리지. 내가 볼 때 상황이 너무 좋소.”
“오. 그렇소? 어찌 그러하오?”
“수나라 사신을 신라의 왕도로 보내어 신왕의 권위에 힘을 보태주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것이외다.”
“큭.”
나도 모르게 웃었다.
“미친 듯이 우리 신라와 싸우겠구려.”
“바로 그렇소. 이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소이까.”
정말 세상이 쾌적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