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주구(走狗)(1)
116화 주구(走狗)(1)
수만 명의 대군이 깃발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만, 특이한 건 바라보고 나아가는 방향이 점차 달라진 것이다. 게다가 병졸의 복색 따위도 상당히 차이가 났다.
이들은 바로 고구려군과 번국의 병력이었다. 함께 한수로 남하했으나 신라군의 저항을 제압한 뒤에는 수만의 대군이 집결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남은 건 개국할 터전에 재빨리 깃발을 꽂는 것이니 말이다.
김후직은 이 참담한 광경을 바라보며 속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바로 며칠 전, 왕고덕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왕고덕의 표정에는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더는 시간을 더 허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내 말이 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
“이대로 시간을 더 보내다가 신라에서 신왕을 옹립하면 우리 입장이 참으로 난처하지 않겠나? 현재로는 한수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네. 한데, 신라가 신왕을 옹립하여 결사 항전을 부르짖으면 첨예한 전선이 형성되는 것일세. 무엇을 선택할지는 뻔하지 않나?”
“대인.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허. 우리 솔직해져 보지.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
“내가 괜한 이간질을 하는 건 아닐세. 그래서 다시 묻겠네. 정말 그리 생각하나?”
왕고덕이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김후직은 차마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속내를 들킬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뭐. 좋네. 이대로 떠나고 싶다면 보내줄 수도 있네. 그런데 자네는 섣불리 결정할 수 없을 것이네. 돌아간들 할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니 말일세.”
“······대인.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이미 여러 번 말했네. 자네와 폐하께는 얼마든지 시간을 준다고 말일세. 그러나 아군은 내일 남하할 것이네.”
결국, 이렇게 되었다. 김후직의 눈동자는 크게 동요했다.
“고구려군 1만과 번국의 병력 5만이 남하할 것이네. 저항하면 싸우겠지.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네.”
전쟁이기에 승패를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북방 체계가 무너졌다. 왕도에서는 중앙군이 섣불리 달려오기도 힘든데 6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한수의 성들이 감당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
김후직은 절망적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할수록 괴롭기만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를 막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 왕고덕이 찾아온 건 최후통첩을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런데 왕고덕은 여전히 바라보고만 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네. 자네의 마음속에 담긴 불안함을 내가 모두 치워줄 수 있다는 걸세.”
“······대가는 한수 원정에 우리 폐하께서 선봉에 서는 것이겠군요.”
“그리만 해준다면 신라군 포로도 내어줄 것이네. 아직 수천의 규모이니 쓸만하지 않겠나. 아. 물론, 불편하다면 이후의 일은 우리가 관여하지 않겠네. 철저하게 불간섭하겠다는 말일세.”
*****
상념을 걷어낸 김후직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후회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후회해야 한다면 친정했던 시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병부령.”
“예. 폐하.”
“이게 옳은 건지 모르겠소.”
“이 길이 유일한 대안이었사옵니다. 만일, 폐하께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평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하옵고 어차피 빼앗길 한수였사옵니다. 그러니 더는 되돌아보지 마시옵소서.”
“하. 하루라도 빨리 왕도로 돌아가고 싶소.”
“신이 보필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폐하.”
김후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가온 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상대는 바로
“소인이 일전에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 죄를 어찌 씻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을지문덕이었다.
김후직이 눈을 부라리며 나서려고 했으나 김백정이 손을 내저었다. 을지문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네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너의 무례함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한데, 감히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인가.”
“소인의 입이 백 개라고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소인이 폐하를 잠시라도 보필하고자 하옵니다.”
“하! 썩 물러가라!”
말과는 달리 김백정은 을지문덕에 대해서 알아본 것이 사실이었다. 고구려의 차세대 무장의 선봉이었다. 부마 온달의 놀라운 승전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싸울 수 있는 신라군이 6천여 명이옵니다. 조만간 당도할 것이옵니다.”
“······.”
“곧장 왕도로 가시길 원한다면 능히 지원해드릴 수 있사옵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러니 썩 물러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하오나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시옵소서. 소인이 폐하의 앞을 막는 무리를 모두 치워낼 수 있사옵니다.”
“신라에서 내 앞을 가로막는 무리는 없다.”
“응당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저 힘이 필요할 때 일러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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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순탄했다.
좋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고구려가 약조를 잘 지켰다는 것이었다. 을지문덕의 말대로 6천여 명의 신라군이 당도했다. 그러니 이제 이들을 이끌고 왕도로 진군하면 될 일이었다.
당연하겠으나 김후직이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서둘러 출발했다. 한수 점령의 여파가 어디까지 번졌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빠르게 일을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오!”
왕도에서 출병한 것이 분명한 수천의 병력과 조우했다. 얼핏 봐도 3천여 명은 되었다. 얼마 전 1만의 대병을 출병했던 걸 고려할 때 쥐어짜듯 모아낸 병력이 분명했다.
김후직은 환하게 웃었다.
‘심지어 지휘관이 원칙을 중시하는 수을부다. 하면, 최악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이야.’
그간 왕도에서 대응이 느렸던 건 병력을 집결시키기 위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만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으나 복잡한 계산은 그냥 치워버렸다.
“참으로 반갑소. 너무나도 반갑소.”
“음.”
“이리 직접 오시다니. 폐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외다.”
“그래서 궁금하오. 폐주는 어디 있소?”
“폐하께서는······지금 뭐라고 하셨소?”
폐주라니······.
분명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김후직은 상황을 강력하게 부정하며 물었다.
“하하하. 폐하께서는 본군과 함께 움직이고 계시오.”
“본국의 폐하께서는 왕도에 계시지요. 내가 물어본 건 폐주요.”
“뭐, 뭐요?”
“상황을 정확하게 말해주리다.”
김후직은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군막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백회의의 결정이오.”
“그, 그런······.”
“신라에서 공과 폐주를 반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소. 다만 한탄스러운 건 조금 더 일찍 결정되었다면 우리의 영토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오.”
“그, 그럴 수는 없소. 대체 누구 마음대로 폐위를 운운하오? 이럴 수는 없소.”
“선왕께서는 능히 군왕의 자질을 갖췄는데 무도한 폐주가 화백회의를 움직여 왕위를 찬탈했소.”
“뭐요······?”
“참으로 참담한 세월이었지요. 그러나 하늘은 신라를 버리지 않았소. 어질었던 선왕의 혈육이 살아남아 기어이 제 자리를 되찾았소. 이제 신라가 제대로 된 것이오.”
선왕의 아들 김용수가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고작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를 옹립했다는 말이었다. 김후직은 격하게 따졌다.
“공은 늘 법도를 중시했소. 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소?!”
“그래서 이러는 것이오. 귀공이 데리고 있는 폐주 김백정은 신라의 왕이 아니었소. 고구려가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소.”
“!!!”
“단지 표현을 한 게 아니외다. 이미 모든 것이 명백해졌소. 보시오. 모두가 반대하는 친정을 꾀하여 1만의 대병을 고구려에 바쳤소.”
“이보시오!”
“게다가 선대께서 피와 땀으로 확보했던 한수 유역을 몽땅 조공했소.”
수을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늘은 고구려의 선봉으로 우리 신라를 공격하고 있소이다. 하. 그저 의문인 건 대체 언제부터 김백정이 고구려의 주구(走狗)가 되었냐는 것이외다.”
이미 모든 건 각색됐다.
폐위의 명분은 너무나도 저열했으나 압도적인 서사로 귀결되고 있었다.
김후직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서사의 주인공은 이미 김용수가 되었다는 걸 말이다. 기승전결 너무나도 완벽했다. 고구려의 주구에게 억울하게 폐위된 부왕의 원한을 잊지 않고 기어이 신라의 군왕이 된 서사가 아닌가.
성공한다면 신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서사였다.
김후직의 목울대가 강렬하게 움직였다. 수을부는 그의 모습을 빠지지 않고 살폈다.
“귀공이 무슨 죄가 있겠소? 그러니 다시 신라의 신하로 살 기회는 있소. 어찌하겠소?”
“······.”
“귀공이 이끄는 선봉대가 이미 수천이외다. 어차피 본국의 병력이오. 그들의 식솔도 모두 신라에 있소. 한데, 기어이 싸워야 한다면 어찌 되겠소?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외다.”
“······.”
“다시 말하지요. 아직 기회가 있소.”
“······.”
김후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격하게 동요하고 있었고, 표정도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수을부는 그 모든 현상의 내면을 정확하게 분석했다.
‘탐이 날 것이다. 신라인이라면 응당 그러하겠지.’
그래서 말했다.
“신왕의 서사, 공이 거들 수 있소. 이를 포기할 것이오?”
“······.”
“느끼셨을 것이오.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서사라는 걸. 화백회의가 연이어 폐위를 결정한 것도 이를 고려했기 때문이오.”
김후직은 흔들렸다.
아니,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수을부의 말대로 최고의 서사라는 건 반론의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꺼냈다.
홀린 듯.
그런데 그때 군막으로 다급히 부관이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정국의 엄중함을 전했다.
“고, 고구려군이 진군했습니다.”
“뭐······?”
“국원소경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
국원소경은 신라의 왕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수을부는 눈을 부라리며 김후직을 노려봤다.
“하! 골수까지 고구려에 넘기셨소?! 아군의 발목을 잡아두고 고구려군을 이용해 국원소경을 노리다니! 진정 주구였단 말이오!”
김후직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움직였다.
“어찌 이렇게 비열할 수가······!”
“······.”
“당신과 폐주는 신라사의 오점이외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오! 우리의 서사가 기어이 그리 만들 것이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김후직은 냉정해졌다.
‘서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오히려 태연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선택을 행동으로 옮겼다.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내가 귀공의 발목을 잡을 것이니 말이외다.”
“뭐, 뭐요?”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다.
아니, 이길 수 있다.
일찍이 내물마립간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았다. 서사는 이렇게 반복될 뿐이다.
“상황을 정리해주리다. 신라의 군왕은 오직 한 분이시오. 어떻소? 감당하실 수 있겠소?”
덧붙였다.
“지금부터 역모를 제압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