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4)
113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4)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기어이 제대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바라보게 되었다. 단지 강력한 국세를 가진 패권국이 아니라 질적으로 나아지는 나라였다.
그래.
이게 옳다.
처음부터 이리했어야 한다.
단지 군사력이 강한 나라는 이미 하늘 아래 너무 많다. 단적으로 돌궐이 그렇다. 그러나 누가 그들의 풍요로움을 부러워하던가. 오히려 그들이 오직 군사력만 앞세워 타국의 과실을 탐할 뿐이었으니 멸시나 당할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고자 한 길이 돌궐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늦게나마 이를 깨달았으니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다.
아직 역사는 크게 진행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었다.
고양성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폐하. 천하의 모든 의서를 수집하겠사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자 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있다.
입신양명? 아니다.
이건 조선에서나 하는 것이다.
바로 영원한 부귀영화였다.
-의과 시험을 치르겠사옵니다.
-의원이 되는 시험이오?
-의원은 누구나 될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의과 시험을 통과한 의원은 귀족의 반열에 오를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어찌 나서지 않겠사옵니까.
-귀족이라. 하면, 어디까지 바라보시오?
-윤허하여주신다면 태대사자를 고려하고 있사옵니다.
-하하하! 의원의 수장이 태대사자라. 이거 탐이 날 수밖에 없겠구려.
-그는 의원이지만 최소한 수백 명의 사병을 거느리는 귀족이 될 것이옵니다. 대대손손 부귀와 영화도 보장될 것이니 어찌 욕심내지 않겠사옵니까.
-좋소! 참으로 좋소.
이는 참으로 탁월한 계책이었다.
이미 고구려에서 정치로서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마지막 길은 이미 온달이 차지했다.
그러니 의과라는 길을 아예 새로 개척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수나라 출신 의원을 만나고 있었다. 고구려인이 아닌 이유는 명백하다. 기존의 고구려가 하지 못한 일을 추진할 것이니 외국의 기술을 빌려오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작금의 천하에서 의술이 가장 발전한 곳도 수나라였다. 그러니 수나라 의원을 세우는 건 전혀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의원을 지그시 바라봤다.
“의원이라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나는 자네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수나라인에 대한 처우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여긴다네.”
수나라 의원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가볍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돼지고기일세. 아주 일품이지. 상추에 싸 먹으면 죽을 때까지 생각나는 맛이라네.”
“예, 예.”
그는 조금 당황했으나 내가 시킨 대로 상추쌈을 잘 싸서 먹었다.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 고구려 돼지고기와 상추는 천하제일이 아닐 수 없다.
“맛이 괜찮은가?”
“소인은 평생 이런 별미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입에 맞다니 다행이군.”
꼭 음식이 맛있다고 하기보다는 포로로 끌려와서 노비로 살다 보니 고기가 간절했을 것이다. 물론, 맛도 좋긴 하지만 말이다.
“이보게. 자네가 가진 재주에 따라서 동향 사람들이 늘 이런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편히 살 수 있다는 말일세. 해서, 나는 자네가 아주 뛰어나길 바란다네.”
“소, 소인의 부족한 재주가 부디 대인을 만족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네가 부족하면 또 다른 이가 있을 수도 있지. 이미 고구려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수나라 땅에 있는 의원일지도 모르고.”
한 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말을 수행하라는 말이었다.
나는 말을 길게 끌지 않고 말했다.
“외상(外傷)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참으로 적합하겠지. 나는 자네가 이러했으면 좋겠네. 물론, 어렵다면 할 수 있는 이를 데려오게. 모든 걸 지원할 것이니까.”
“아, 아닙니다. 대인. 외상이라면 황제내경을 익힌 의원이 능합니다.”
“음. 듣자니 자네는 아니라는 말이군.”
“대인. 소인은 황제내경을 아주 제대로 익혔습니다.”
수나라 의원은 참으로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내용도 알차서 나의 흥미를 크게 자아냈다.
“심지어 소인은 내장과 경맥의 크기, 성질을 연구한 기백파를 계승했습니다.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기백파? 자세히 말해보겠나?”
“외상이라고 쓰고 기백파라고 읽습니다.”
“오. 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일찍이 기백파는 역도 왕망 시기 왕손경의 사체를 해부하여 혈관의 길이를 재기도 했습니다. 해서, 사람의 몸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인도 이를 익혔습니다.”
“음?”
나는 눈을 껌뻑이며 의원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기에 내 시선을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훗날 화타가 이를 계승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백파가 제대로 명맥을 이어가지는 못했으나 어찌 고고한 흐름이 끊어졌겠습니까! 소인은 분명 기백파가 맞습니다.”
“아니, 잠시만.”
“이르십시오.”
“화타는 됐고. 자네 해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내가 확 꽂힌 건 바로 해부라는 두 음절이었다. 현대인인 내게는 너무나도 가까운 단어였으나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나에게 전근대의 해부학이라는 건 허준이 사부님의 배를 갈랐다는 전설과도 같은 드라마의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분명하게 해부라고 했다.
해부학이 무엇이던가. 의학 발전을 견인할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었던가. 나는 설렘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자네 사람의 배를 갈라 보았나?”
“송구하지만, 소인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백파이기에 대략적인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음. 그래? 하면, 그 유명한 화타가 기백파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백고파이기도 합니다.”
“백고파?”
“대인.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소인이 그 찾기 어려운 외상 전문 의원이라는 것입니다.”
대화의 어디쯤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원은 절정의 흥분상태로 변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자네가 외상 전문 의원이라는 게 중요하지.”
“그렇습니다. 대인.”
그래. 이 사람이 고구려 외상 센터의 장을 열어낼 것이다. 일이 잘 풀렸다. 첫 상담부터 이런 의욕적인 사람을 만났으니 말이다.
“자네 이름이 뭔가?”
“남길만한 이름은 없습니다. 편히 장가 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장 의원이라고 부르지.”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큰 차이가 있네. 어쨌거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네. 수나라 사람이라도 좋고 고구려 백성이어도 좋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재주가 있다면 모조리 의술을 알리게.”
그리고 포상은 정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자네는 고구려의 귀족이 되는 것일세.”
“소인이 드디어 고향에 왔습니다.”
“참으로 탁월하군.”
시작이 좋다.
그리고 중요한 내용을 한 가지 더 보탰다.
“해부할 생각 있으면 말하게. 구해 줄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물론일세. 고구려는 다 할 수 있네.”
여기가 괜히 쟁투의 역사로 천년을 지탱한 게 아니다. 구하는 건 순식간이다. 또한, 사고방식도 실용적이라서 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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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는 이렇게 진행되었는데 내과는 어찌하는가. 그런데 이건 정말 애석하게도 당장 여력이 없었다.
물론, 의서를 구하거나 새롭게 편찬하는 건 기존 인력으로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고구려의 역량을 고려할 때 내과 전문의까지 대거 확보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외과부터 육성하는 게 현실과 가장 부합했다.
급하지 않다.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나저나 연자유는 왜 이렇게 오만상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안 좋을 수는 있는데 굳이 우리 집까지 와서 이러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왜 그러나? 무슨 일이 있나?”
“음.”
“이 사람아. 말을 해야 내가 알지.”
“형님.”
“말하게.”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대체 무엇이 곤란하다는 것인가.”
“일국의 방침입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바뀝니다.”
이런.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버럭 화를 냈다.
“미안하네.”
“······.”
“내가 할 줄 아는 게 농사밖에 없다 보니 실수가 잦았네.”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닙니다만.”
“어색해서······.”
나의 비루한 변명에 연자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형님.”
“새겨듣겠네.”
“천하 만민이 상당한 착각을 합니다.”
“지필묵을 챙겨서 필기할 의향도 있네.”
“시끄럽습니다.”
“조용하겠네.”
연자유는 한숨을 푹 쉬면서 나를 쳐다봤다.
“고구려가 30만의 강병을 동원하여 싸우니 그저 부강한 줄만 알고 있습니다.”
“······.”
“동방의 패권을 가지고 있으니 북방 그리고 서토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여깁니다.”
“······.”
“혹시 형님도 이러십니까?”
“아닐세.”
“그렇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30만 대군을 동원한다는 건 나라의 역량을 크게 갉아 먹습니다. 게다가 동방의 패권도 늘 불안정합니다.”
연자유는 냉철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돌궐이 북방의 패권을 가졌지요. 한데, 북방에 그들과 대적할 무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동방에는 우리와 겨룰 수 있는 나라가 백제와 신라가 있습니다. 무려 두 나라이지요.”
역사를 아는 내가 무슨 반박을 하겠는가.
실제로 고구려는 동방의 패권을 사수하지 못하고 붕괴했으니 말이다.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역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힘을 한데 모아야 합니다.”
“알고 있네.”
“그렇습니까?”
“물론일세.”
“처음에 형님께서 농업 개혁을 입안하셨을 때 내부의 역량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셨지요. 한데, 언제부터인가 북방의 패권을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이게 아니군요.”
“그······.”
“변명하지 마십시오.”
“오해일세.”
“뭐가 오해라는 겁니까?”
“이번에는 두 개 다 해보자는 것일세.”
연자유의 눈이 가서일처럼 가늘어졌다.
괜히 무서웠다.
“형님. 혹시 고 대인의 안건에 동의하는 겁니까?”
“괜찮지 않나? 고구려가 돌궐 일부를 흡수하여 동방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것일세. 그러면 누구라도 감히 우리를 범할 수 없을 것이네.”
“허.”
갑자기 연자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입술까지 파르르 떠는 걸 보니 내 말이 영 별로인 것 같았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음? 왜 그러나?”
“고 대인의 안건대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내부의 역량을 강화하면서 북방의 패권을 가져야겠습니다. 무조건.”
“가능하겠나?”
“난세입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이대로 고 대인에게 밀릴 수는 없습니다. 이는 나의 자존심입니다.”
“사실 이런 경쟁은 바람직하지. 잊지 말게. 나는 늘 자네 편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하. 됐습니다.”
“알겠네.”
“······.”
한 번도 의도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됐다.
고구려 내부에서 치열한 노선 경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겨도 결과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슬쩍 먼 산을 바라봤다. 일단 연자유의 화는 피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