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1)
110화 다가오는 또 다른 세상(1)
농부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땀을 닦아내며 벼의 모종을 옮기는 그들의 움직임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불순한 움직임이 존재했다. 모두 한숨을 쉬면서 진원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가서일이 허둥지둥거리며 모종과 논과 씨름하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농부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선생. 그냥 두십시오. 농사가 보기에는 쉬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끙.”
“아니, 애초 평양에 계신 분이 도랍현(배천군)까지는 왜 오신 겁니까.”
“고구려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이앙법을 내가 어찌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랬다.
도랍현은 왕고덕이 직접 선정한 곳으로 역사상 최초로 이앙법을 시행했다. 이토록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사안이었으니 가서일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처럼 지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굳이 옷을 걷어 올리고 농사를 짓겠다고 덤비시니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세세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실전이 중요한 법일세.”
“상당히 방해되니까 하는 말이지요.”
“이런. 자네 왜 이렇게 뻑뻑하나? 그래. 알겠네. 하면, 내가 뒤로 물러나지. 하면, 되겠는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하하하! 나는 늘 현명한 판단을 한다네.”
가서일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가느다란 눈은 모든 상황을 빠지지 않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리하다 보면 아슬아슬한 장면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다들 조심하게.”
“······.”
“허. 조심하래도.”
“······.”
“조심하게! 모종이 얼마나 귀한데!”
흥분한 가서일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결국은
“거! 선생. 좀 조용히 하십시다!”
농부 한 명이 눈까지 부라리며 버럭버럭했다.
가서일이 보통 인사는 아니었다. 일찍이 험한 고구려 인부들을 눈빛만으로 제압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선생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여기서는 어림도 없었다.
농부들은 가서일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니 개겨도 무방했다.
“고구려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남 일에 쓸데없이 입을 대는 건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일이지요. 어떻습니까. 소인의 말이 틀렸습니까.”
고구려는 이러했다.
가서일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 좋아. 자네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함께 일하지.”
“이미 방해가 된다는 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아닐세. 고구려는 말보다 실천이 아니겠나? 내가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주면 자네들이 어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대체 귀족이 왜 농사를 방해하겠다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길 수 있네.”
물론,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상당히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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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을 긁었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자네들이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인가?”
“대인. 소인들도 제법 재주가 있습니다. 이를 사용할 기회를 주십시오.”
지금 나를 찾아와서 일종의 청탁을 하는 이들은 무려 중국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외국인 포로가 막리지인 나를 찾아와서 이러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도 방침상 잡아 온 외국인 중 재주가 있는 이들은 우대하게 했다. 이미 여러 번 논의되었듯 수나라 포로 중에서는 상당한 능력자가 많았다. 그들을 그냥 경작에만 동원하는 건 참으로 우매한 짓이었다.
그랬기에 능력이 있는 자는 언제라도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길 가던 나를 붙잡고 이럴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그래도 좋은 일이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너희들은 어떤 재주가 있느냐?”
“제지술을 제법 알고 있습니다.”
“허. 제지술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만지라고 불리는 고구려의 종이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질적으로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늘 그렇듯 대량 생산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특상품을 잔뜩 생산하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리했어도 지금껏 탈은 없었다. 애초 고구려에서 종이를 사용할 정도로 부유한 무리가 귀족과 불자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수요는 충분히 충족시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개혁이 진행되면서 상황은 아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점차 종이의 부족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낮은 수위의 중앙 집권까지 시작되며 수시로 장계가 올라오고, 답변을 내려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변화나 특이지점 아니 관리가 수행하는 일은 모두 문서화시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간 고구려가 축적한 종이로 어떻게든 버텼으나 더는 무리였다.
또한, 농학자 혹은 유학자라고 부르는 식자층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규모로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는 소수의 귀족을 제외하고는 자체적으로 종이를 구하고 소비할 능력이 없었다. 가령 이문진과 가서일 조차도 과거 제대로 종이 문화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걸 시사하고 있었다.
이러한데 국가 주도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지식인이 된 이들에게 알아서 종이를 구하여 필기하고, 경전을 구하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어떻게든 종이와 경전을 구해서 기어이 학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건 조선처럼 학문에 미친 나라나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처럼 조정에서 멱살 끌고 가야 할 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자신 있게 대량 생산의 가능성을 제시한 중국 기술자의 등장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었다.
“많은 걸 요구하지 않겠다. 하지만, 만일 종이 생산을 잘 이뤄내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것이다. 아니, 남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소인들이 꼭 성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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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너무 황당해서 쳐다만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가 봐도 노비의 형색이었다.
게다가
“대인. 어서 가시지요.”
이 절륜한 연기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 사람은 노비가 아니라 고구려의 태왕, 고양성이었다.
“대인? 서둘러 가셔야지요.”
역시나 놀라운 연기력을 보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천연덕스러움을 넘어선 그의 행동을 보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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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헛웃음이라고 한다.
아니, 백성들과 손잡고 뛰어다니는 건 고대원, 한 명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태자도 부족해서 태왕까지 왜 이러는 걸까?
솔직히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으나 계급이 깡패이니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폐하. 직접 백성의 삶을 살피시겠다고 하셨사옵니까?”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태자가 백성을 잘 살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군왕으로서 직접 봐야 할 필요가 있소만.”
알겠는데 이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아니었다.
흔히 보듯 조선 시대의 왕처럼 쉽사리 잠행할 상황이 아니라는 게 핵심이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당장 평강공주와 고대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두 사람만 해도 걸어 다니면 모든 백성이 알아볼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이런 게 고구려 왕실의 특징인지까지는 내가 잘 모르겠으나 분명 현상은 그랬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고양성이 안학궁에서 쓱 나가면 10명 중 5명은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다.
조선의 왕처럼 갓 쓰고 가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필하는 신하가 ‘대감’이라면서 발 연기 할 일도 없다.
구름떼처럼 백성이 따라다닐 것인데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 방법이 있소.”
고양성이 호언장담했다.
******
그러니까 그가 말한 방법이라는 게 바로 이것이었다.
“대인.”
나는 상념을 거두면서 완벽하게 노비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고양성을 쳐다만 봤다.
볼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인. 어서 가시지요.”
“······.”
아니, 왜 쓸데없이 연기를 잘하는지 모르겠다. 분장은 누가 했길래 이렇게 완벽한지도 모르겠고.
“안 가십니까? 대인?”
“아······.”
차마 반말할 수는 없어서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의 난처함을 느꼈는지 고양성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한데, 대인.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
“허. 대인. 어찌하여 대꾸조차 해주지 않습니까. 참으로 서운합니다.”
“······.”
당신,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계속 먼 산을 쳐다보며 걸었다.
그러다가
-툭!
고양성이 지나가던 똥지게꾼과 부딪혔다.
이건 참으로 곤란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재빨리 개입하려고 했는데 눈을 부라리던 똥지게꾼이 대뜸 방긋 웃었다.
“부럽나?”
놀라운 세 음절이었다.
대경실색하여 나서려고 했는데,
“실은 그렇습니다.”
고양성이 절정의 연기력을 뽐내고 있었다.
이 엄청난 장면을 보고 듣고 있노라니 이성이 어찌 될 것만 같았다.
“이보게. 우리 고구려는 막연히 부러워한다고 하여 누가 이끌어주지 않는다네. 오직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일세.”
“그렇습니까?”
“아니, 아직도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아직 젊은데 세상사에 관심을 좀 가지게. 요즘에는 할 일이 넘쳐나고 있다는 말일세. 똥지게 하나 구해서 다니면 입에 풀칠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지.”
“똥지게는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허.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인가?”
“이런.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럽니다.”
“답답하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대인께서 이 불쌍한 청년에게 똥지게 하나 구해주시면 참으로 바람직할 거 같습니다.”
“······.”
“허. 설마 아까우십니까.”
“그게 아니라 노비일세.”
“허. 노비라고요? 이렇게 멀쩡하게 생겼는데 노비라고요?”
대체 어디가 멀쩡하다는 걸까.
“허. 대인께서 결단을 보이셔야겠군요.”
“가던 길이나 가게.”
“하하하. 그리하지요. 그런데 갈 때 가더라도 노비에게 똥지게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알겠으니까 썩 물러나게.”
“하하하. 인색해지셨군요.”
어쨌거나 참으로 위대한 우리 고구려의 백성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시선에서 멀어지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가시지요.”
“예. 대인.”
“······계속 이러실 겁니까.”
“대인이야말로 똑바로 해주길 바랍니다. 나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
“······.”
“뭐 하나? 따라오게.”
고양성의 볼이 미세하게 씰룩거렸으나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원하는 대로 해준 것이니까.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 했다.
“답답하군. 그래서 어디 똥지게나 제대로 들고 다니겠는가?”
“······.”
“뭘 보나? 그러면 노비 생활 끝나나? 참으로 답답하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