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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9화 (109/199)

109화 합종연횡(3)

109화 합종연횡(3)

예의를 다하며 강력하게 압박을 가했다.

고정의와 정세를 논의한 직후 확인한 온달의 보고는 정세를 민감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했다.

유력한 가능성 중 하나였던 신왕의 옹립이 점차 현실로 구현되고 있으니 발 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우리의 대처는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김백정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가 명백하게 신라의 왕일 때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신라의 군왕으로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죽인다고 한들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즉, 이건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방법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그냥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는 이미 낮은 수위로 논의한 바가 있었다. 신라의 혼란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백회의의 만장일치로 결의를 모아 폐위를 하였다면 고대 사회에서 김백정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까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귀족의 압도적인 여론으로 신왕을 옹립한 것이다. 김백정의 정통성을 옹호할 세력은 애초에 거세가 되었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 언급한다면 그저 신왕을 옹립한 게 아니라 김백정을 ‘폐위’하는 정치적 결정을 거친 것이다. 선대왕도 시원하게 폐위한 나라이거늘 김백정이 복귀하면 어찌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폐위되어 권력이 없는 왕은 개인보다 못한 존재에 불과한 법이다.

나머지 방법은 아주 이색적인 것이었다.

오늘 내가 취할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김백정에게 예를 다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적당한 미사여구까지 보태주면 금상첨화였다.

“폐하. 그간 양국이 대립하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소인은 신라의 역사를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않사옵니다. 오히려 극찬해야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사옵니다.”

“······.”

“기어이 쟁투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나라가 신라이옵니다. 홀로 날뛰다가 몰락과 몰락을 거듭한 백제와는 비교할 수 없사옵니다.”

이는 미사여구였으나 분명한 사실이긴 했다. 신라는 어떻게든 전진했다. 하지만, 백제는 널뛰기하듯 기복이 심했다.

그래도 칭찬이 과하면 곤란한 법이다.

이제 현실을 다시 언급할 때였다.

“냉정하게 따질 때 본국은 이대로 물러나도 되옵니다. 이미 신라의 대 북방 체계를 무력화시켰으니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옵니다.”

그리고 말을 또 틀었다.

“혹은 수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한수를 강제로 도모해도 되옵니다. 폐하를 억지로라도 앞세우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니 어찌 피하겠사옵니까.”

물론, 효과가 없을 수도 있으나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오나 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아군이 남진할지라도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출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옵니다. 이는 진심이옵니다.”

파격은 아니지만 파격적인 제안이긴 했다. 최소한의 의사를 존중해준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김백정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없사옵니다. 그저 상황을 알려드린 것에 불과하옵니다.”

요구 사안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국처럼 이말 저말을 섞어 복잡하게 전달했기에 김백정과 김후직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뿐이었다.

또한, 지금 중요한 건 나의 요구가 아니었다.

우리가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현실의 단면이었다.

“폐하. 지금 신라는 불순한 의도가 짙게 보이고 있사옵니다.”

만일, 신라가 올곧게 김백정을 재신임하더라도 상관없다. 이미 나는 한반도의 역사를 혼란으로 몰아낼 것이니 말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왕 대인. 과합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김후직이 대화의 흐름을 끊고자 나섰으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만일 그렇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게. 어찌 병부령이라는 자가 이토록 안일할 수 있나? 이래서야 대왕 폐하를 제대로 보필할 수 있겠는가?”

내 입에서 나오는 놀라운 말에 김후직은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답답하군. 하면, 묻겠나. 내가 과하다면 어찌하여 아직 신라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나? 또한, 왕명이 내려졌거늘 신라군은 저항하는 것인가? 대체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말하는 건 무엇이라고 여기나?”

“······.”

“허. 왜 대답하지 않나? 한수의 신라군이 보이는 결사의 자세에 화백회의의 의지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

“아직 그들이 참담한 일을 결행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일을 보류하고 있다고는 판단할 수 있는 것일세. 한데, 자네는 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네. 대체 폐하를 어찌 보필할 것인가.”

“무, 무슨······.”

“됐네. 되돌아보면 이 사달이 난 것도 자네가 제대로 신하 된 도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김후직의 개인사는 내가 알 필요가 없다. 그냥 거침없이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제대로 하게. 제발.”

답변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려 김백정을 바라봤다.

“폐하. 고구려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듣기에 따라서 나를 지원해줄 수 있다는 걸로 들리오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럴 여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끌었던 신라군을 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오?”

“최소한의 신의는 있어야 하는 법이옵니다.”

“신의?”

“전쟁에 패한 군주라고 하여 버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옵니다. 비록 적이었으나 친정에 나선다는 건 용맹한 일이니 말이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취했다.

“언제든 부르신다면 달려오겠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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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의 판단대로였다.

김백정과 김후직도 최소한의 이상 징후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신라가 과감한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고구려에는 최고의 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원하는 김백정 신라와 경주 신라가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행복한 고민이었다. 방긋 웃으면서 사랑채 문을 열어보니 이미 고정의가 당도해서 밥 한 끼 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앉았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식사하시오?”

“허. 섭섭하게 왜 이러시오?”

“하하하. 농이외다.”

“진심이었다고 해도 계속 왔을 것이외다. 아니, 이 댁 밥은 왜 이리 맛있는지 모르겠소.”

고정의는 상추쌈을 푸짐하게 만들어 씹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일이 잘 풀렸나 보오?”

“문제지요. 번국과 우리 신라의 강역을 어찌 설정할지 이보다 머리 아픈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고정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까지 잔뜩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풀리면 한수에 똬리를 트는 나라는 거란국 2개, 말갈국, 고막해국 그리고 우리 신라까지 총 5개국이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소.”

“한수가 비옥하긴 하지만 수만을 운용하는 5개국이 운집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소.”

“왕 막리지의 말대로요. 밥맛이 확 떨어지는구려.”

“이미 다 드셨소만.”

“더 먹으려고 했소.”

“······.”

이런 뻔뻔한 당당함은 나도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신라는 어쩌는 게 좋겠소?”

“음. 왕 막리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오. 그러니 숨 좀 돌리지요. 방금 밥을 먹었더니 조금 버겁소.”

“확실하게 만들어야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측을 이간질해야 하오. 이보다 좋은 건 없소이다.”

“허. 참으로 바람직하오. 밥이나 탐한 내가 반성하오.”

고정의는 입가를 닦으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소. 우리 신라는 더 확실하게 남쪽으로 보내야 할 것 같소.”

“하하하!”

고정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나지만, 왕 막리지는 참으로 지독하시오.”

“이런. 내가 실언이라도 한 것이오?”

“한수가 아니라 더 남쪽이라. 도읍으로 삼을 만한 곳이 없지 않소이까. 그런데 우리 신라를 구축한다는 건 오직 금성 신라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하하하. 바로 그것이외다.”

정확했다.

어차피 김백정 신라의 목적은 경주 신라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어설프게 옥토에서 농사짓고, 소나 닭을 키울 이유는 없었다.

목숨을 걸고 진군하여 단기간에 승부를 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니 군사적 요충지를 내어주면 된다.

“어디 보자. 그러자면 본국에서 우리 신라에 제대로 지원해야겠구려.”

“물론이오. 고 막리지의 말대로요. 우리 신라는 곧장 바빠서 하나씩 직접 챙길 여력은 없을 것이외다. 그러니 우리가 알뜰하게 살펴야지요.”

“끌. 번국들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가 도출될 것이외다.”

김백정이 경주를 도모하는 순간 신라는 고구려에 완벽하게 예속될 것이다. 과거 광개토왕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니 돌라의 가치는 더 중요해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은 고 막리지의 판단이 정확하게 유효했소.”

“하하하! 됐소. 이는 그저 길 가다가 얻게 된 정보로 판단했을 뿐이외다.”

돌라가 고정의를 찾아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이런 판단을 하고, 전략을 수립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이는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래서 거란족의 일은 어찌 되었소?”

“돌라는 수긍했으나 오적은 수긍만 했소.”

“내키지 않음을 보였다는 것이구려.”

“그렇소. 하지만, 감각이 좋은 인물이라서 반발하지는 않았소. 속에서 불만이 자랄 것이외다.”

“그 또한 감내해야겠지요.”

어차피 진심으로 충성하길 바란 적은 없었다. 또, 진심을 믿는 사람도 없다. 그저 우리의 통제를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거란국은 이걸로 정리하면 되오. 탈은 없을 것이오. 나는 그저 올해 농사나 크게 잘 되길 바랄 뿐이외다.”

고정의가 나를 슬며시 바라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소.”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아주 확실하게 자신감을 표현해줬다.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보이게 될 것이외다.”

“오. 그렇소?”

“물론이오. 이미 경작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2배가 넘었소. 한데, 어찌 부족함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참으로 좋은 일이외다. 같은 땅에서도 최소 2배의 성과가 발생했는데, 토지 자체가 더 늘었다니. 나는 상상만으로도 설레오.”

“온몸으로 기대하셔도 좋소.”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양잠업을 고 막리지가 좀 맡아주시겠소?”

“하하하! 홀로 창을 휘두르며 수나라 장안성으로 돌격하리다.”

“끙.”

양잠업은 이토록 두려운 일이었다.

후회막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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