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합종연횡(2)
108화 합종연횡(2)
당당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고정의의 말은 시원하게 이어졌다.
“나 역시 평양계의 의견을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외다. 그러니 두 세력을 모두 세우는 건 절대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오.”
이런 융통성이라니.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돌라가 돌궐의 아파가한과 긴밀히 통한다고 하였소. 활용할 방법이 있다면 쐐기를 박을 수 있을 것 같소만.”
“돌궐의 아파가한이 대카간에게 패배했을 때를 대비할 수 있소.”
“그 말은······.”
“그의 세력은 수만 명에 이르오. 만일, 그가 패한다면 죽느니 우리에게 달려오지 않겠소?”
“허. 이런. 묘안이 있나. 참으로 대단하오.”
진심을 가득 담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고정의는 옅게 웃으며 유려하게 손을 내저었다.
“왕 막리지. 나는 말이외다. 우리 고구려가 북방의 패권을 무조건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서토와 북방 그리고 동방으로 분할된 작금의 천하가 유지되더라도 무관하오.”
“그렇소? 고 막리지의 생각이 궁금하구려.”
“이미 동방은 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졌기 때문이오. 북방의 일부였던 거란과 고막해가 우리의 번국이 되었소. 여기에 늘 눈치를 살피던 말갈까지 확실하게 결합하지 않았소이까.”
옳은 말이었다.
고구려의 영토가 확장된 건 아니었으나 동방의 구성은 전과 달라졌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확실한 팽창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훗날 일이 묘하게 풀려서 아파가한까지 흡수한다면 동방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 것이외다.”
정말 이리된다면 단일 국력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었다. 역사의 중심이 동방으로 확실하게 넘어올지도 몰랐다.
“남쪽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고구려는 서토와 북방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국세를 가지는 것이외다.”
이는 이대로 정말 매력적인 고구려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더 큰 이점은 따로 있었다. 이대로만 추진하려면 북방을 송두리째 도모하고자 현재의 목표보다 백 배는 더 수월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하니 아파가한을 데려올 수 있고, 신라를 맹렬하게 공격할 수 있는 돌라를 우대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외다. 어떻소? 이만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게 되었소?”
“좋소. 하면, 분산하도록 하지요.”
“좋소.”
남은 건 한 가지였다.
김백정에 대한 처우였다.
“신라의 행보가 중요하겠구려.”
고정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왜 이러시오?”
“무슨 말이오?”
“애초 신라가 감당할 수 없는 물자를 요구했다는 건 그들이 비상한 결단을 할 명분을 준 게 아니오?”
아니다.
난 정말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고정의가 볼 때는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신라의 화백회의에서 용단을 내리길 바랄 뿐이오.”
“하하하! 과연 왕 막리지외다. 내가 진심으로 감탄했소. 신라가 왕을 폐위할 명분을 내밀어버리다니 말이오.”
어쨌거나 나 훌륭하다는 말이라서 그냥 즐겼다.
“한데, 언제부터 입안한 계책이오?”
“하하하! 그건 비밀이외다.”
“허.”
원래 즐기는 사람이 일류인 법이다.
그리고
“신라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때 김백정을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소이다. 분노의 숙청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외다.”
고정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구려 내전의 계승자답게 상대가 가장 뼈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도출하기도 했다.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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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예사롭지 않은 성격을 가진 의연이었다. 그는 분명 불자였으나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고, 공명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한데 오늘은 유독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의기양양한 그의 눈동자에는 간절함을 풍기는 아회씨가 담겼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본국의 뛰어난 유학을 고막해국의 국시로 삼고 싶다는 겁니까?”
“바로 그것이외다. 선생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소승은 불자입니다. 선생이라니요? 참으로 불편하군요.”
“내가 크게 실수했소. 대사께서 도와주시오.”
“대사······?”
“대사가 아니시오?”
“험험. 소승은 늘 겸손할 뿐입니다. 하지만, 세간의 평을 어찌 계속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말과는 달리 좋아 죽겠다는 기색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대사’라는 두 글자가 그의 심장을 강렬하게 뜀박질하게 한 것이었다.
“허엄. 한데, 소승이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아회씨는 의연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속이 투명한 사람이었다. 물론, 가볍게 여길 수는 없으나 대응책은 확실하게 존재했다.
“고구려 유학은 대사로부터 시작해서, 대사에게서 끝난다고 들었소.”
“오.”
“우리 백성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일러준다면 참으로 영광스러울 것이오.”
“이런. 결국, 기초부터 닦아야 하는 것이군요.”
“그렇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소이까. 그러나 대사라면 기어이 할 수 있다고 들었소.”
“들었다니요? 누가 그리 일렀습니까.”
“실은 부마께 청했는데 응당 대사를 찾으라고 하셨소. 대사야말로 고구려 유학의 시작이자······.”
의연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부처님도 깜짝 놀랄 정도로 하늘까지 치솟았다. 진심으로 기쁘지 않은 이상 이럴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소승이 고막해국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지부상소의 경지까지 익히고 싶은 것 같습니다. 소승의 판단이 맞습니까?”
“정확하시오. 나는 우리 유학자들이 대사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부상소까지 익히길 바라고 있소.”
의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지부상소라면 참으로 어려운 경지입니다. 이를 수행하려면 고막해국의 유생들이 뼈를 갈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모든 걸 감내하고 있소.”
아회씨의 눈동자는 강렬함, 그 자체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유학자들이 큰 깨달음을 얻어 지부상소까지 단행할 수 있을 때 대국의 태왕 폐하께서 도끼 한 자루 내려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외다.”
“이럴 수가.”
의연은 크게 감탄하며 합장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열의가 가득했다.
“좋습니다. 소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막해국을 유학의 나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오.”
“하하하. 아닙니다.”
“아니외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대사께서 나서주시니 이는 진실로 영광일 것이며······.”
이어지는 아회씨의 찬사에 의연은 기꺼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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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군왕이란 하루를 살아도 왕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왕의 권능을 보이며 만인의 위에서 군림하는 삶이야말로 군왕의 역사였다.
만일, 권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비루함을 경험한다면 숨을 쉬어도 삶을 꾸려가는 게 아니었다.
군왕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신라 왕 김백정이 바로 그러했다.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으나 아직도 고구려의 태왕은 만나지도 못했다. 물론, 만난다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등의 통탄의 역사가 기록되겠으나 와신상담의 자세로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박대도 이런 박대는 없었다.
비루한 처지는 수치심과 함께 김백정의 하루를 지옥으로 만드는 위력을 발휘했다. 아주 지독하고 맹렬하게 말이다.
그런데 가장 속을 타들어 가게 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아직도 신라의 왕도에서 사신이 당도하지 않았다는 괴로운 사실이었다.
걱정 아니 두려움은 하루가 갈수록 커졌다. 퀭한 눈으로 병부령 김후직을 바라보며 말했다.
“병부령. 대체 이게 어찌 되어 가는 일이란 말이오. 어찌 왕도에서 아직도 소식이 없소이까.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건 아니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고구려에서 요구한 물자가 너무나도 막대하지 않사옵니까.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일이 필요하옵니다. 정확하게 할 뿐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정말 그렇겠지요?”
“폐하. 괜한 생각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후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물자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사신을 보내서 상황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움직임이 없다는 건 왕도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이를 절대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토록 중대한 시국에 김백정이 이성을 잃으면 최악의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황을 극단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왕도의 사정은 절대로 폐위로 귀결되기 어렵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귀족들이 눈치 싸움을 하는 것에 불과해.’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폐하.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설령 무도한 소수가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지라도 주도하고자 나서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
“되돌아보시옵소서. 화백회의는 폐위를 단행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한데, 친정한 폐하를 어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더욱이 화백회의는 만장일치이옵니다.”
“······.”
“잊으셨사옵니까? 상대등이 누구옵니까. 완벽한 근왕파이옵니다. 심지어 그는 가야계가 아니옵니까. 폐하가 아니라면 누가 가야계를 오롯이 품겠사옵니까. 그러하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간곡하고 논리정연한 김후직의 말에 김백정의 경직된 표정이 다소 진정됐다. 불안한 듯 움직이던 눈동자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평온함은 길지 않았다.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왕고덕이었다.
가장 껄끄러운 막리지의 등장에 김후직은 당황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음.”
그런데 그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틀어 김백정을 바라봤다. 과거 을지문덕의 오만함과 더불어 경험해본 왕고덕의 성정을 떠올린 김후직은 불안함이 물씬 치솟았다.
그런데
“폐하.”
경칭이 법도대로였다.
아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차산성 이남의 신라군이 저항을 시작했사옵니다.”
언행이 모두 공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를 눈 뜨고 보던 김후직은 무언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본국은 폐하께서 신라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사옵니다.”
물론, 내용까지 그랬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이런 걸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가볍게 여길 수 없다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용단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용단이라니. 대관절 무슨 말이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신라군이 어찌 저항하겠사옵니까.”
“그, 그건 과한 처사입니다.”
김후직이 황급히 나섰다.
‘아군이 왕명을 거역했다. 이는 필시 화백회의에서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는 의미와 직결한다. 폐위까지는 아닐지라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이럴 때 폐하께서 나서시는 건 최악의 경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가령 고구려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걸 의미했다. 그러면 싸늘한 주검으로 왕도로 돌아갈 수도 있다.
“대인. 이 문제는 실무의 일입니다. 나와 논의하지요.”
그러자 왕고덕이 슬쩍 쳐다봤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폐하. 속이지 않겠사옵니다. 본국은 의심하고 있사옵니다.”
“무엇을 의심한다는 것이오?”
“신라의 화백회의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말이옵니다.”
“그럴 리가 없소.”
“어찌 그렇게 장담하시옵니까.”
왕고덕은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