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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7화 (107/199)

107화 합종연횡(1)

107화 합종연횡(1)

온달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여러 번 반복했다.

끝내 그의 입에서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덕. 지금 이게 맞나?”

“음. 대형. 소제도 방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그렇습니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신라 왕의 항복 이후 온달은 친위대를 이끌고 아차산성까지 남하했다. 이로써 사실상 신라의 대 북방 체계는 완벽하게 붕괴하며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되었다.

순탄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아차산성 이남 지역에서 탈이 생겼다.

“분명 왕명이라고 했는데도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는 건 내가 대체 어찌 바라봐야 하나? 이게 대체 뭔가?”

“소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겁니다. 제 나라 왕의 명령이라고 했는데도 눈을 부라릴 줄은 몰랐습니다.”

왕이 포로가 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고구려는 전쟁의 과실로 한수 지역을 취하는 게 합당했기에 한수 유역으로 남하했다. 한데, 신라군이 이를 악물고 저항 의지를 표출했다. 이러면 상황은 아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왕명이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이런 상태로 남진하면 전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피를 보면서까지 감행할 수는 없었다.

특히, 고작 수천의 병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큰 활약을 했던 번국의 병력은 철수한 지 오래였다. 그들 모두 개국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휴.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굳이 그리할 상황은 아니지요. 우선 퇴각하고 막리지께 이 사실을 전하는 게 옳습니다.”

“그러지.”

한수로 남하하던 친위대는 일사불란하게 퇴각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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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적의 표정은 참으로 심각했다. 벌써 여러 번 끄덕이는 고개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정말 인분으로 그토록 큰 효과를 볼 수 있소?”

“물론입니다. 괄목상대한 고구려의 농사가 증거이지요.”

“음. 내가 공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문진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왕고덕이 인분 시비법을 입안했을 때 다수의 고구려인도 같은 오적과 같은 반응을 보였던 걸 상기한 것이다.

“미안하오. 내가 괜한 말을 했소.”

“괜찮습니다. 우리도 다 황당했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확실한 성과가 있는 건 맞습니다.”

“좋소. 이토록 확신하고, 대국에서도 효과를 보였는데 어찌 계속 머뭇거리겠소. 차라리 잘된 일이외다. 구하기도 쉬운데 효과가 천하제일이라는 게 아니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소.”

“그렇지요.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문진은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번국이 개국 될지라도 농업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애초 약탈을 기본적으로 세력을 운영했으니 당연한 예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강성한 거란족의 왕이 될 오적이 이토록 농업에 관심을 보이니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으로 공께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소. 종종 이렇게 찾아오리다.”

“하하하! 소인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라도 이르시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외다. 내가 어쩌다 보니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게 되었소.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아서 걱정이 많소.”

오적이 거란족의 왕으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은 기밀이었다. 하지만, 이문진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저 감축드립니다.”

“되었소. 한데, 몇 가지 더 물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대국은 약탈과 농업을 모두 취하였소. 이를 해내려면 어찌해야 하오”

“음.”

이문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단기간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요. 한데,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는 있습니다. 오랜 세월 약탈이 전통으로만 규정되었던 건 역사의 고고한 흐름이라는 겁니다. 즉, 약탈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농업은 절대로 전통이라는 단어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늘 현실에 존재해야 할 가치라는 걸 의미하지요.”

이문진은 분명하게 농업의 중시를 언급했다. 만일, 택일해야 한다면 무조건 농업이라는 말이었다.

“작금의 고구려가 전통을 부활한 건 농업을 더 크게 육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약탈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 아니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소. 하지만, 농업은 1년을 바라봐야 하기에 큰 인내가 필요하오. 그러나 약탈은 순간의 노력만 있으면 가능하기에 늘 취하게 되오. 대국은 이를 적절하게 조율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소이까.”

오적의 말에는 단지 부러움만이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으로 취해야 할지 목표 의식이 분명한 말이었다.

“실은 나는 약탈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소. 이참에 잘 정착하여 농업을 크게 일으키는 나라로 꾸려볼까 하오.”

“그렇습니까?”

이문진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치밀었다.

‘번국이 기반을 잘 잡는 건 좋은 일이다. 한데, 고구려가 거란국에 요구하는 것이 내실을 잘 잡은 나라였던가.’

물론, 번국이 내실을 잘 잡아서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지향점이 이러한지는 다시 논의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문진은 생각을 더 이어가지 않았다.

‘왕 대인과 연 대인께서 이를 모르고 내정한 건 아니시지. 그래. 한수에 내실을 잘 닦은 나라가 등장하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남쪽 전선은 큰 고비를 넘었다. 이럴 때라면 강성한 번국이 이로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남진의 전략까지 고려할 위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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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을수록 기승전결이 탄탄했다. 더욱이 어려운 부분도 없었기에 곧장 이해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왕 막리지. 나는 이를 번국에 대한 본질적인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하오.”

고정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시원하게 언급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연자유도 번국을 탄탄하게 꾸려서 남쪽 전선을 안정화하는 방향을 고려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정의의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나는 언젠가는 번국까지 고구려가 확실하게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보다 호전적일 수는 없었다.

우습게도 이번 사안에서 국내계와 평양계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아예 달라진 것이었다.

그런데 근거도 뚜렷했다.

“과거 신라의 숨통을 지켜준 바가 있소. 그러나 기회를 틈타서 기어이 창칼을 겨누었소. 하면, 번국이라고 하여 다르겠소? 아니외다. 때가 되면 그들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오.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외다. 역사에 늘 존재하는 것이오.”

고정의는 반론의 여지를 두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우리가 강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안일한 것이외다. 물론, 우리가 북방의 패권을 확보하기 전까지만 남쪽을 잘 방비하면 된다고 생각하오. 이번 남진에서 번국은 그 역할을 너무나도 잘 수행했소. 결국은, 북방의 일이 마무리된 다음이 아니겠소?”

굳이, 우리가 번국을 수립한 건 남쪽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고정의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좋소. 다 알겠소.”

나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돌라를 거란국의 왕으로 삼자는 고정의의 의견에 동조하는 건 아니었다.

“이미 오적에게 의사를 전달했소. 이를 번복할 정도로 돌라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어떻소? 나는 고 막리지가 이를 상쇄할 정도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만.”

일국의 왕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를 손바닥 뒤집듯이 가볍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고구려의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기어이 번복할 계획이라면 압도적인 명분과 그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해야 한다.

“이건 의외로 간단하오. 난 여전히 남쪽 전선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이미 신라를 제압했소. 남은 백제는 내치가 어지러운데 어찌 위협이 되겠소이까.”

“우리가 신라를 제압한 건지, 신라 왕을 제압한 건지는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소?”

“무슨 말씀이시오······?”

“보시오. 신라의 왕도에서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소.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

이를 우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 신라는 분명 비상식적으로 답변이 느렸다. 그러니 고정의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하면, 공은 신라가 왕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일국의 대사와 관련한 일이오. 어찌 예단할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소?”

“음.”

“신라는 선왕을 화백회의에서 폐위시켰소. 어떤 이유를 가져오더라도 근래에 발생한 일이오. 물론, 짧은 기간에 폐위의 역사를 반복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도 있소. 하지만, 또 그러기에 가능한 일이외다. 보시오. 국세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인물을 살리고자 더 어려운 일을 가겠소?”

“결과적으로 폐위가 더 쉽다는 것이오?”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소.”

신라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시나리오는 고려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김백정의 신변을 무기로 신라는 강력하게 압력할 때 발생할 가정이었다. 우리의 요구가 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왕도에서는 한 번도 화답이 없었다. 이를 다시 상기하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 막리지. 이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오. 신라라고 하여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오.”

그리고

“고구려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소?”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맞는 말이기도 했다.

고구려라고 하여 특별하게 다르겠는가.

만일, 고양성이 신라에 사로잡혔을 때 부담스러운 조건이 내밀어진다면 고구려 조정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죽어도 근왕을 부르짖는 충의 나라가 아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왕을 지켜야 한다는 건 오직 충으로 무장한 유교적 법치국가인 조선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은 사상과 체계 자체가 지금과는 아예 결이 달랐다.

내가 고구려에서 사상 강화를 추진하는 게 절대 괜한 짓이 아니었다.

만일, 이런 정책이 반석에 오르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고구려였다면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얼마든지 왕을 버릴 수 있었다.

“왕 막리지. 신라는 말이외다. 생존에 한해서는 동방 제일이외다. 그들의 생존은 곧 국가의 연명이외다. 그 집요함은 우리도 흉내 낼 수 없소. 이를 알아야 하오.”

“알겠소. 그러면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겠소. 만일, 남쪽의 정세가 여전히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면 돌라가 더 낫다는 것이오?”

“그렇소. 내실을 다지며 천천히 국세를 다질 오적보다는 저돌적으로 신라를 약탈하는 돌라가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오적을 버릴 수도 없소.”

“버릴 필요가 있겠소?”

“두 개를 세우자는 말이오?”

“안될 건 또 뭐요?”

너무 당당해서 내가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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