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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6화 (106/199)

106화 꿈을 꾸다(3)

106화 꿈을 꾸다(3)

아예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태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린 모든 중대 판단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단지, 실패한 게 아니라 백제의 국세를 처참하게 무너뜨린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찌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황에 막혔을 뿐이다.

내실을 잘 닦고 다시 국력을 키워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여창의 행동은 진창에 빠지고 있었다. 최소한 일국을 통치하는 군왕이라면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목리문차는 너무 허망했다.

그간 어떻게든 근왕파의 명맥을 지키고자 한 그간의 삶이 너무나도 후회가 됐다.

‘대체 어쩌다가······.’

더는 왕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백제의 앞날 자체가 우려됐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한다면 차라리 정국의 주도권을 대성팔족이 모두 가지는 게 낫지 않은가.

‘그저 정치적 욕심 없이 군왕으로서 부귀영화는 누리는 게 낫지 않은가.’

군왕에 대한 경멸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소?”

“폐하.”

“그래요. 어서 말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옵소서.”

“······.”

“그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시옵소서.”

“······.”

사실상 정치적 결별을 의미하는 목리문차의 말에 부여창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것도 방법이외다. 그래요.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는 것이외다.”

“예. 하면, 그리하시옵소서.”

“물론이외다.”

부여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놈도 귀족이로구나.’

군왕의 비루함을 보며 불경한 언사나 내뱉는 이를 어찌 제대로 된 신하라고 하겠는가.

‘내가 어디 나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판단하고 여기까지 왔던가.’

아니었다.

모든 건 백제의 비상을 위한 것이었다.

판단에 미숙함은 없었다.

과정이 어지러웠고, 결과가 최악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하늘이 백제를 비웃고자 한 것에 불과했다.

부여창은 치솟는 살심을 겨우 삼키며 웃었다. 오늘은 그저 멀리 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날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그때

“폐하!”

백가가 황급히 달렸다.

언행에는 위중함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목리문차가 나섰다.

그 불경함에 백가는 당황하였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폐하. 고구려가 신라 왕을 사로잡았다고 하옵니다.”

“뭐······?”

충격적인 소식에 부여창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양국이 한수를 두고 격돌했다는 소식은 접했으나 이런 결과가 도출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나? 신라 왕이 죽었는가?”

“아니옵니다.”

“하면, 포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목숨을 담보로 모종의 협상이 진행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사옵니다.”

“허.”

“또한, 고구려군이 이미 당항성을 점령한 상황이옵니다. 폐하. 한수의 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사옵니다.”

백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 고구려와 신라가 동방의 질서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여창의 머릿속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만일, 고구려가 왕을 죽이면 왕도에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여 신라를 단결시킬 것이다. 이는 불행한 일이니, 신라를 크게 위축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없겠는가.”

누구보다도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가 바로 부여창이다. 심지어 관산성 전투는 자신이 직접 주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이지 않으면 김백정은 신라의 선대왕과 끝없이 비교되며 추락할 것이다.”

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 왕의 권위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부여창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늘이 백제를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폐하. 어찌하실 요량이시옵니까.”

“폐하. 판단하시고자 하옵니까?”

백가와 목리문차가 동시에 물었다. 비슷한 의미의 말이었으나 담긴 뜻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여창은 고개를 뒤틀며 목리문차를 바라봤다.

“공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폐하······.”

“내가 알아서 할 것이외다.”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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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등 김세종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전쟁에서 언제라도 패배할 수는 있다. 백보 양보해서 왕이 포로로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조건이 너무나도 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라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여기서 토를 달면 왕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늘이 신라를 외면하는 것인가.’

어깨에 짓눌린 무게가 그야말로 천근만근이었다.

찰나, 여기까지 달려온 역경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신라의 왕들은 신라 내부에 아무런 기반도 없으나 역량이 뛰어난 가야의 왕족을 크게 우대했다. 김세종 역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서 왕권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마침내 상대등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이런 대참사가 발생했다.

‘하. 친정을 만류했어야 했다.’

혈기가 넘치는 군왕을 막지 못한 결과가 이토록 참담할 줄 누가 감히 알았겠는가.

김세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누가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누구도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귀족들은 온몸으로 속내를 표출했다.

‘화백회의에서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다. 이는 바꿔 말해서 고구려의 조건을 수용할 수 없다는 걸 표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뿐, 폐위를 고려하는 것이다.’

귀족은 폐위에 주저함이 없었다.

언제라도 상황에 발맞춰서 감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부분이었다.

‘폐위가 감행되면 우리 가야계는 어찌 되는가.’

애석하게도 그 역시 김백정에 대한 어떠한 의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만 명의 백성과 막대한 물자를 요구하는 고구려의 요구는 김백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에 충분했다.

‘망국의 설움을 이겨내며 겨우 자리를 잡았다. 한데, 폐위가 논의되는 시국의 상대등이라니.’

일의 결과가 어찌 되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떠안아야 할 위치가 바로 상대등이었다.

더욱이 이번은 누가 왕이 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귀족이 나서서 폐위하고 옹립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버틴다고 하여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수일 내로 왕이 복귀하지 않는 이상 귀족들의 흐름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왕위에 올리는가.’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용수.’

폐위당한 선왕의 아들이었다.

아직은 어리다.

그런데 어려서 반발이 적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생 최대의 정치적 선택이 다가왔다.

실패하면 가문이 도륙당하겠지만, 성공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신라의 심장부에 금관가야를 새길 수 있다.

김세종은 북쪽을 바라봤다.

‘폐하. 잊지 마시옵소서. 왕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는 신라의 생존과 직결하는 것이옵니다. 하온데, 폐하를 살리자니 신라가 죽사옵니다. 신라의 대왕으로서 누구보다도 이를 잘 이해하시리라 믿사옵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차가웠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하기에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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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라는 수치스럽고 화가 치밀었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기에 여기까지 이주했다. 하지만, 거란국의 왕을 선출해야 한다면 응당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부족장들도 욕심을 내고 있기에 시간은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부족의 세력이 가장 강했기에 점차 중지가 모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부족의 연합으로만 세력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오적이 왕이라니.’

고구려가 개입했다.

앞으로 평생 오적을 왕으로 모셔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 오지도 않았다.’

차라리 영주에서 버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다른 선택의 기회라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기에 모든 걸 박탈당한 채 눈뜨고 바라만 봐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기에 뒤늦게 움직였다. 상대는 영주에서 함께 했던 막리지 고정의였다.

“허. 이건 참 곤란한 일이외다.”

“하지만, 대인께서 나서주신다면 반전을 꾀할 수 있을 겁니다.”

“음.”

평소 냉정하게 국사에 임했던 고정의가 쉽사리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돌라의 눈빛은 간절했다.

“애초 거란 내부의 논의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편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리된 겁니다.”

“음.”

“아직 폐하께서 책봉하신 것도 아닙니다. 내부에서 논의한 것에 불과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오만.”

“대인. 이대로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합니다.”

사실 돌라가 이럴 만도 했다.

그의 말대로 초안은 분명 거란의 합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개입하면서 오적을 추대하는 방향으로 확 쏠린 것이니 돌라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간을 계속 지체할 수는 없는데, 거란은 결론을 내지 못하니 발생한 일이지요.”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겠습니까.”

고정의는 난처했다. 그런데 이는 돌라의 절절함이 원인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심 돌라가 왕이 되길 바랐다만.’

물론 고구려가 거란국의 오랜 번영을 고려한다면 오적을 왕으로 선택하는 게 옳다. 그러나 고정의는 거란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왕고덕과는 달랐다.

‘남방 안정책에 불과하다. 우리가 북방을 도모할 동안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기만 되는 것인데.’

이러자면 음흉한 오적보다는 수가 훤히 보이는 돌라가 통제하기 쉬운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막 날개를 펼치려는 시기였기에 불필요한 불협화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인.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간곡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으나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핵심은 이 문제를 언급했을 때 발생한 변수였다.

애매한 고정의의 태도에 돌라의 속은 더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이를 어찌한다······.’

그러다가 결국, 오적은 가지지 못한 수를 꺼내기로 했다.

“오적보다는 내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리 장담하는 이유가 있소?”

“돌궐의 아파가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고정의의 눈동자가 괴이하게 뒤틀렸다.

‘돌궐과 가깝다고는 들었는데 상대가 대카간이 아니라 아파가한이었나?’

이러면 상황이 다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소. 나는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소.”

“아파가한과 밀지를 주고받습니다.”

“그의 생각이 무엇이오?”

“예······?”

“아파가한이 돌궐의 행보에 어떤 입장을 보이는지 물은 것이오.”

“음······.”

“서찰을 주고받는다고 했소만.”

“그, 그렇습니다.”

고정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가깝구나.’

그렇다면 돌라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없다. 그런데 아파가한과 따로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이건 활용하기에 따라서 큰 성과를 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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