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꿈을 꾸다(2)
105화 꿈을 꾸다(2)
몸을 잔뜩 낮춘 고식의 얼굴의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은 심리 상태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궐의 아파가한께서 본국과 따로 소통하길 원한다는 것이오?”
고식과 눈높이를 맞추고자 자연스레 몸을 낮춘 아파가한 대라편의 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정확한 핵심을 언급하셨소.”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응당 그러할 것이외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잘 진행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한데, 본국은 이미 대카간과 혈맹을 체결했소. 한데, 아파가한께서 남몰래 이리 나오시는 건 참으로 의아하오.”
“신의를 중시하는 고구려라면 응당 그런 고민을 하실 줄 알았소.”
그의 미사여구에 고식은 흡족하게 웃었다.
‘급하긴 급하구나. 신의라는 말을 꺼내다니.’
고구려와 돌궐은 신의라는 말을 꺼낼 관계가 아니었다. 동방과 북방의 경계서 서로를 노려보던 적대국이었다. 그저 수나라라는 대적을 상대하고자 ‘잠시’ 손을 잡은 관계에 불과했다. 양국의 수뇌부 중 누구도 상대를 진실로 믿고 나아가는 이는 없었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가 우매한 것이다.
애초에 이를 알고 있으니 대라편이 밀사를 보낸 것이기도 했다. 조건만 맞으면 말을 바꿔 탈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대카간께서 이미 수나라와 내통하기 시작했소.”
“뭐요······?”
정확한 시기까지 가늠한 건 아니었으나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전해 들으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 대화에 아주 관심이 많소. 그래. 세세하게 일러주시겠소?”
“수나라에서 세폐를 언급했소이다.”
“허. 그자들이 알아서 제 입으로 세폐를 바치겠다고 한 것이오?”
“그렇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외다.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소. 아니, 이렇게 금방 고개를 숙일 생각이었다면 대체 왜 그런 것이오?”
“그게 말이외다.”
밀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국의 부마께서 대승을 거두신 일의 여파가 큰 것 같소.”
“이런. 본국의 대승이 수나라 황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구려.”
밀사의 말에 적당하게 대꾸하면서 고식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늘이 고구려를 돕는 것이다. 천하의 모든 기운이 동방으로 향하는 것이야.’
그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곤란하군요. 수나라가 세폐를 꺼낸 건 결국, 그들의 이이제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렇지요. 기어이 우리 돌궐의 창끝이 고구려로 향하게 만들려는 수나라의 계책이외다. 양국의 동맹을 끊어내야 수나라가 좋을 것이니 말이외다.”
“허.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어떻소? 이만하면 우리 아파가한께서 나를 보낸 이유가 설명되는 게 아니겠소?”
대화가 무르익자 밀사의 목소리는 더 은근해졌다.
“우리와 고구려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만.”
고식도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고로 밀월 관계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요.”
“과연 합당하오.”
-----
대라편의 밀사가 전해준 내용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폐하. 아파가한은 야심이 크옵니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여 필시 대카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고식은 결론부터 말했다.
고양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옳소. 수나라 중심의 외교 노선으로 선회하려는 대카간을 무너뜨리자면 본국과 손을 잡는 게 가장 합당한 판단이오. 문제는 이를 우리가 어찌 움직일지 명쾌하게 정리해야 하오.”
고양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뜨거웠다. 이는 이번 사안이 엄중함을 넘어서 흥분도를 최고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나도 흥미로움을 넘어서 몸이 달아오를 정도였으니 고양성의 상황을 무조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언제 무엇을 어찌 얻을 수 있는지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렇다.
자고로 외교의 백미는 실무협상이었다.
“아파가한이 대카간이 되었을 때 고구려의 국익은 어찌 될지를 정리해야 하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돌궐의 정권 교체가 아니라 돌궐을 우리의 번국으로 삼는 것이었다.
“만일, 아사나 섭도가 대카간으로 있는 것이 본국의 북방 진출에 이롭다면 이번 밀사의 일을 공식화하여 대라편을 제거하는 게 합당하옵니다.”
아사나 섭도가 수나라의 이이제이에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도 그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이로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대라편을 던지는 게 옳았다.
“폐하. 지금부터 이를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복잡하게 돌아가는 돌궐의 내부 판도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사옵니다.”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는 대라편만 좋은 일을 하게 된다. 잘못 손을 대면 돌궐과 전면전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정말 판단을 잘해야 했다.
지금부터는 완벽한 실전이었으니 말이다.
“막리지.”
고양성은 피식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니 묘한 안도감이 샘솟았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때로는 외교를 간단하게 바라볼 필요도 있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본국과 혈맹을 맺었던 아사나 섭도는 수나라와 손을 잡고자 하오. 한데, 그가 특별한 사안이 없으면 말발굽을 요동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렇긴 하옵니다.”
“게다가 대카간의 자리를 탐내는 대라편은 밀사를 보내어 아사나 섭도를 고립시키고자 하오. 한데, 만일 그가 대카간이 되었을 때 수나라의 세폐를 뿌리칠 수 있겠소? 나는 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소.”
“그 또한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양측과 다 잘 지내면 되오.”
“······.”
고양성의 목소리는 참으로 여유로웠다. 엄중한 정세였는데도 걱정 따위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본국은 그럴 힘과 능력이 있소.”
그러면서 고식을 바라봤다.
“아파가한의 밀사가 요구하는 게 무엇이었소?”
“아직 특별한 건 없었사옵니다. 일단 신의를 확인하고 싶다는 두루뭉술한 말에 불과했사옵니다.”
“하면, 신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되오.”
고양성의 눈동자가 다시 이동하더니 이번에는 연자유에게로 향했다.
“도성 인근의 돼지를 아파가한에게 보내시오.”
“어느 정도를 고려하시옵니까.”
“1만 마리면 적당할 것이오.”
“······1만 마리라고 하셨사옵니까?”
“우리도 세폐라는 걸 바쳐보자는 것이오. 아파가한에게 말이외다.”
고양성은 고약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이제이? 이건 수나라만 하는 게 아니오. 우리 고구려가 더 차갑고 지독한 이이제이를 보여주는 것이외다.”
만일, 고구려의 돼지 1만 마리가 아파가한 대라편에게 향한다면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눈동자는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고구려와 대라편이 밀약을 체결했다고 여길 것이니 의심의 씨앗은 커질 것이다.
“폐하. 대라편이 받겠사옵니까.”
“그걸 왜 고려하오? 우리는 돼지를 대라편의 세력권을 옮기면 되오. 그 뒤는 그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오.”
“아.”
물어본 내가 민망해질 정도의 우문현답이었다.
-----
백제 왕 부여창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노발대발하고 싶었으나 대성팔족을 위시한 귀족의 위세를 고려하여 겨우 참았다.
지난 관산성 전투를 함께 치른 목리문차와 둘만 남게 되자 격분하게 됐다.
“고구려가 기어이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소.”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지금 그럴 수가 없소. 내가 정말 그럴 수가 없소.”
흥분과 노여움이 최고치로 올랐기 때문일까?
부여창은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다가도 대뜸 하소연을 시작했다.
“오랜 세월 우호를 다졌던 진국이 우리와 단교를 선언했소. 관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본국의 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데 외교까지 이리되었소. 그러하니 내가 어찌 고구려를 탓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이리 역정만 내실 일이 아니옵니다.”
“그래요. 그래서는 아니 될 일이지요. 모든 건 고구려가 망쳤으니 말이오.”
“······.”
목리문차는 부여창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토록 명석하고 과단하셨거늘.’
태자 시절 부여창은 만인이 인정할 정도로 호쾌했다. 능력 또한 출중했기에 백제의 비상을 확실하게 일궈낼 군왕의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관산성의 패배로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수 유역을 상실했을 때 부여창이 가장 앞장서서 전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왕이 전사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어 꾸준하게 신라를 압박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패하면서 백제는 완벽하게 주도권을 상실했다.
결과, 왕권은 형편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자연스레 태자 시절의 뛰어난 모습은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부여창은 무너졌다.
지금도 그랬다.
대 진국 외교의 참사를 오롯이 고구려의 탓으로만 귀결시키는 건 일국을 책임지는 군왕의 자세라고 할 수는 없었다.
“폐하. 설령 고구려의 협잡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노여워만 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대책을 수립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아니겠소? 이 모든 건 고구려의 탓이외다.”
“······해서, 고구려와 일전이라도 치르시겠다는 것이옵니까? 가당키나 하옵니까?”
“······.”
목리문차의 목소리에는 은은하게 짜증이 묻어나왔다. 그가 대성팔족이지만 그나마 근왕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라는 걸 고려할 때 작금의 백제 왕권이 얼마나 부실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부여창 역시 목리문차의 무례한 행동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뿐이었다.
“진나라의 요구가 수나라와 단절하라는 것이었사옵니다. 하면, 우리는 이를 판단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어차피 현재 본국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강력하게 요구할 수가 없지 않사옵니까. 폐하. 부디 현실을 직시하시옵소서.”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단적으로 사비도성의 귀족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백제의 왕이 진나라와 신경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어찌하길 바라오?”
부여창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하며 목미문차를 바라봤다.
“지금껏 내가 내린 판단은 모두 틀렸소. 부왕을 전사하게 했으며, 수많은 병사를 잃었소. 싸울 때마다 패배했고, 내치는 혼란이 가득하오.”
“폐하.”
“판단하는 게 두렵소. 그만하고 싶소.”
“······.”
“그런데 나는 죽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 있소. 그래서 아직도 나는 판단해야 하오. 그러니 묻소. 내가 대체 어찌해야 하오? 결정해준다면 내가 그대로 따르겠소.”
목리문차는 속에서 무언가 치솟는 것만 같았다. 부여창이 안쓰러운 게 아니라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화가 난 것이다.
“만일 그러하시다면 대성팔족의 결정을 따르시면 되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옵니다. 왜 그렇사옵니까? 어떻게든 그들을 견제하여 다시 백제를 반석 위에 올리고자 하는 게 아니옵니까?”
“······.”
“한데, 판단은 피하고자 하옵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이옵니다. 대체 신은 어찌해야 하옵니까?”
목리문차의 날카로운 말이 부여창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그러니 묻는 것이오. 내가 어찌하면 되오?”
돌아오는 답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한 미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