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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4화 (104/199)

104화 꿈을 꾸다(1)

104화 꿈을 꾸다(1)

내가 고구려 여인들에게 물러서긴 했으나 고구려의 막리지다. 백성을 두려워하기에 그리하였을 뿐, 대외적으로는 늘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당당했다.

“이리 독대하는 건 처음이오.”

“그렇지요.”

오적은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짧고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잘 살피며 말을 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소. 우리는 귀공이 거란국의 왕이 되었으면 하오.”

“독대를 청하셨을 때 그리 이르실 줄 알았습니다.”

“하면, 결론이 무엇이오?”

“거절할 이유는 없지요.”

“시원시원해서 좋소. 한데, 이유도 묻지 않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국 중 거란이 가장 강성합니다. 그러니 더 잘할 사람은 찾은 것이지요.”

“우문현답이오.”

대화는 너무 순탄했다.

“거란에 대한 고민, 고구려의 의도. 뭐. 여러 가지가 문제가 있기에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이는 건국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아무리 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왕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맞는 말이외다. 지금 결정지어질 위계는 아주 오랜 세월 이어질 것인데 거절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하면, 우려하는 바를 이르시지요.”

“특별하게 우려하는 게 있겠소? 그저 남쪽을 잘 부탁하오.”

“그래야지요. 한데, 한수가 옥토라고 할지라도 일국을 운영하기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소?”

의견을 듣고자 되물었다.

그러니 오적이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미 거란의 병력만 4만이 넘습니다. 한데, 한수가 이를 지탱할 여건이 된다고 여기십니까?”

“실은 아니외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모두 지원해줄 수는 없겠지요.”

“참으로 말이 잘 통하오. 바로 그렇소.”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최대한 자력으로 나라를 잘 꾸려나가겠으나 어찌 모든 걸 그리할 수 있겠소이까. 당장 철을 구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외다. 어디 이뿐이오? 농사도 배워야 할 것이며······.”

나는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적은 끊지 않고 차분하게 듣기만 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고개까지 끄덕이는 걸 보니 내 말에서 필요한 내용을 잘 수렴하는 것 같았다.

볼수록 일국을 이끌어갈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결론은 간단하군요.”

“그렇소. 아주 간단하오.”

“고구려와 무역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아주 정확하오.”

철을 비롯한 우리의 생산 물자와 약탈로 확보한 삼국의 물자로 대대적인 교역을 진행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무역의 루트가 될 것이니 고구려의 번영과 직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무역 규모가 거대하지는 않겠으나 확대될수록 삼국의 한반도 중남부 장악력이 강해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니 나쁠 건 아예 없었다.

물론, 삼국이 팽창하면 상황이 다소 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우려하여 팽창을 억제하는 건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삼국이 발전하는 만큼 고구려가 더 강성해져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사실 한반도 중부 지역에 국한될 삼국의 성세가 상황을 아주 고약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북방의 패권을 바라보고 있으니 삼국과 비교할 때 그야말로 대국의 위엄이 될 것이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해주시지요.”

“무엇이오?”

“현재 한수 일대에 거주 중인 신라인은 삼국이 취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허. 그건 참으로 어렵소. 그들의 수가 최소한 수만 명인데 이를 탐하다니요?”

우리도 노동력이 부족해서 양보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만일, 삼국이 제대로 된 여건을 갖췄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 단호하게 말했다.

“삼국은 건국의 역사가 없소. 그러한데 시작부터 체계를 복잡하게 가져가는 건 위험하오. 거란국은 거란족, 고막해국은 고막해족, 말갈국은 말갈족을 통치하며 하나씩 시작해야 하오. 이조차 혼란이 발생할 것인데, 수만 명의 신라인을 아래에 두어 다스린다면 무조건 탈이 날 것이외다.”

이건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었다. 고정의와 연자유 등 고구려의 정치인들과 장기간 논의한 결과였다.

자고로 다민족 국가라는 건 고도의 통치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더욱이 한강 유역은 첨예한 대립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강렬한 차별주의 통치를 펼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삼국이 신라인에게 제 민족과 같은 대우를 하는 유려한 통치술을 펼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비록 이번에 신라가 크게 패했고, 우리가 골수까지 뽑아낼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비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원인이 한강 유역의 비합리적 통치가 되는 건 미리 차단할 필요가 있다.

물론, 소수의 타국인을 잡아 와서 노비로 삼는 것은 통치가 아니라 행위에 불과하기에 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은 이번 사안처럼 수만의 백성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겸사겸사 우리도 노동력이 부족하니 데려가려는 것이기도 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적 역시 이를 충분히 상기하며 삐딱한 눈으로 고구려를 바라볼 것이기에 나는 단호하게 언급했다.

“고구려가 한다고 하여 삼국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시오. 우리는 그들을 노비로 삼을 것이지만 불만을 해소할 여러 정책도 입안하여 집행할 것이니 말이외다. 그러나 삼국은 자리잡기도 버겁지 않소이까. 그러한데 수만 명의 신라인이라니. 어불성설이오.”

작은 타협의 여지도 주지 않는 나의 말에 오적의 눈동자에는 진한 아쉬움이 번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흉한 인사답게 포기도 빨랐다. 물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대인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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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개혁과 전후 문제를 동시에 처리하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삼국의 개편을 마무리하고자 고양성을 찾았는데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화기애애했기 때문이었다.

고양성은 정말 천진난만할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흐흐흐······.”

체통 따위는 전혀 챙기지 않는 경박한 웃음까지 보였다. 물론, 속내를 꺼내지 않았다. 자고로 수명을 단축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무병장수의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폐하. 그렇게 기쁘시옵니까.”

“하하하. 당연하지 않겠소? 나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소. 고구려의 지존이 된 이후 이토록 기분이 좋은 적이 없었소이다.”

고양성이 이리도 기뻐하는 이유는 아주 직관적이었다.

“하하하! 생각해보시오.”

그는 껄껄 웃었다.

차라리 이게 낫다.

조금 전처럼 경박하게 웃는 것보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할 때 고양성은 문서 한 장을 들어 펄럭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구도인 국내성과 요동까지 생산력을 폭증시킨다는 농업부의 계획서였소.”

“그러하옵니다. 두 지역을 연계하여 경작하면 돌궐의 움직임에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그러오. 내가 바로 그래서 그러오.”

고양성은 여전히 문서를 펄럭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식솔이 5명인 경우 1년 잡곡 수확량이 20석을 목표로 삼았소. 소와 돼지처럼 큰 짐승은 거둘 수는 없으나 양은 5마리, 닭은 10마리를 둘 수 있다는 예상이 나왔소이다.”

1, 5, 10, 20.

작은 단위의 수치가 언급되었으나 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고구려의 역사에 이런 부를 축적한 백성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문진의 농업 계획서에 의하면 요동과 국내성의 수전 농업을 잘 꾸렸을 때 해당 목표가 능히 달성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백성의 삶을 진흥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었사옵니다. 오직 패권을 도모하기 위한 나라 전체의 움직임이었사옵니다. 하온데, 과실이 흘러넘쳐 백성도 취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그러니 내가 기쁜 것이 아니겠소이까. 너무 기쁘오.”

난세를 살아가는 고구려 태왕의 역할은 오직 고구려 세계관의 지탱이었다. 하여, 백성의 삶을 세세하게 살필 여력은 없었다. 살피기보다는 지키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러기에 고양성은 고대원이 백성을 만나는 걸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걸지도 몰랐다. 태왕이 하지 못하는 일은 태자라도 하길 바라며, 고대원은 백성을 품는 태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줄곧 마음에 걸린 건 우리 백성의 삶을 세세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었소.”

고양성의 기쁨은 구체적인 언어로 나왔다.

“한데, 이리되었으니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폐하.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하옵니다.”

“끌. 언제 고구려가 이런 가능성이라고 본 적이 있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말이었다.

난세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쟁투의 역사를 가진 고구려였다. 백성의 삶을 챙길 여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여유와 풍요로움은 고구려사에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고구려까지 갈 것도 없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현실을 거론하며 의술의 확대를 차단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고양성은 싱그럽게 웃으며 아직도 문서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삼국과 무역까지 잘 연계된다면 한수와 요동 사이에 있는 우리 평양 도성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질 것이오.”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의 손가락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돌궐의 영역으로 서서히 옮겼다.

한 마디로 평양으로 중심으로 한 동방과 북방의 새로운 무역 판도를 구축하겠다는 포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삼국의 정비는 마무리가 되었소?”

“물론이옵니다. 신라 왕을 돌려보내기 전에 확실하게 정비될 것이옵니다.”

신라가 김백정의 몸값을 치를 때 삼국은 성대하게 개국을 선포할 것이다. 그때 신라의 관리들은 동방의 지각 변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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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물론, 북방의 정세가 궤를 달리하여 움직였기에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론적으로 나쁜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양견의 표정은 다소 가벼웠다.

“폐하. 이이제이로 북방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소위의 목소리는 참으로 뜨거웠다.

그럴 만했다.

이번 외교의 성과가 참으로 거대했으니 말이다.

“애초 돌궐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사옵니다. 하온데, 만일 고구려와 다투게 할 수만 있다면 세폐를 실제로 꺼내는 것도 나쁘지 않사옵니다.”

“음.”

“그렇긴 하오만.”

세폐의 수량이 너무나도 막대하였기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려웠다. 소위 역시 이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취할 수 있는 결과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재차 말을 꺼냈다.

“폐하. 양측이 험악한 관계만 이어가도 되옵니다. 영원히 서로를 불신하게 할 수만 있어도 거대한 성과이옵니다. 하온데, 어찌 머뭇거리겠사옵니까.”

“그렇긴 하오.”

양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수는 돌궐이 공격하여 요동에서 대패하는 것이외다.”

“그렇사옵니다. 그리한다면 요동의 피해도 커질 것이니 고구려도 경거망동할 수 없사옵니다. 물론, 만에 한 가지를 경계할 필요도 있사옵니다.”

“방책이 있소?”

“고구려는 과거 신라의 공세로 크게 봉변을 치른 적이 있사옵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사옵니까?”

“신라를 움직여서 고구려를 견제하자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적절한 의견이었다.

양견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소. 신라의 사신이 오면 이를 전하겠소. 또한, 돌궐은 전조 세폐 수량의 2~3할로 준비하시오. 나머지 수량도 준비한다고 하면 돌궐도 따지지만은 않을 것이오.”

“합당하옵니다. 그 정도면 당장 큰 부담도 없을 것이옵니다. 또한, 훗날 돌궐이 강력하게 항의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사옵니다.”

“그렇소. 이미 고구려와 틀어졌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소이까.”

“과연 그러하옵니다.”

모처럼 군신의 대화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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