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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3화 (103/199)
  • 103화 변화하는 고구려(4)

    103화 변화하는 고구려(4)

    보면 볼수록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나는 진심을 담아 흡족하게 웃었다.

    “이 내용을 잘 추려주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게나.”

    “음. 의외군요. 어떤 농법을 이르실 줄 알았습니다.”

    “그저 날씨일세. 당장 무언가를 꺼내기보다는 정리가 우선일세.”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우리도 이제 농서를 하나 만들 때가 됐다고 생각하네.”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그랬다.

    고구려도 이제 체계적인 농서를 만들어낼 시기가 됐다.

    “한데, 어찌하여 기후에 이토록 집중하신 겁니까. 의아하군요.”

    “내가 시작한 농업 개혁일세. 고구려의 모든 지역에서 내 말에 따라서 농사를 시행하고 있지. 하지만, 어찌 나의 방책이 지역마다 정확할 수가 있을 것이며,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내가 꺼냈으나 무조건 맞는 말이었다.

    나라고 하여 지역마다 정확한 농법을 도입시킬 수는 없다. 보편적으로 효과가 있는 방책을 알고 있을 뿐이다.

    가령, 조선에는 농사직설이 있다. 한라부터 백두까지 적용되는 농서였다.

    반면, 중국에는 농서가 지역마다 있었다. 광범위한 영토였기에 기후나 토양의 조건이 모두 다르므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어떠한가.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만큼 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양과 국내성의 농법이 무조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철저하게 지역 맞춤형 농법을 도출하려면 기후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는 누가 하겠는가.

    당연히 지역에서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관리가 해낼 수도 있고, 농민이 할 수도 있다.

    바로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저 밀알을 뿌리는 것에 불과했다.

    나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었다.

    “농서의 발간은 가장 적합한 농법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네. 농사짓는 이들이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고. 그러하니 날씨를 파악한 건 백년대계일세.”

    “음.”

    “즉, 고구려의 영토를 세분화하여 가장 적합한 농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걸세.”

    “음. 차후 여력이 된다면 농민이 농사짓는 방식을 파악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실제 수확량까지 말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일세. 그리한다면 더 효과가 좋을 것이네.”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자유는 이미 황금물결에서 헤엄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긍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내가 걷어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또 좋은 소식을 들었기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철광을 추가로 확보했다고 들었네.”

    “그리되었습니다.”

    “듣자니 노천에 가까운 곳도 있다지?”

    위치는 두만강 일대였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음. 그렇습니다.”

    작게라도 공치사를 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영 이상했다. 다소 의아했으나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서 물음이나 이어갔다.

    “아니, 어쩌다가 그런 곳을 발견했나?”

    그런데 연자유가 말을 얼버무렸다.

    급기야 시선까지 돌리는 게 아닌가.

    이는 참으로 이색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응?”

    “아. 그저 부지런히 파악한 결과지요. 이번 철광 파악에 상당한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아니, 이를 모르십니까? 참으로 당황스럽군요.”

    “아니······.”

    “바쁘신 건 알겠지만, 중요한 사안인데 어찌 이토록 무관심합니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니, 알겠네. 한데, 갑자기 왜 화를 내나?”

    “누가 화를 냈다는 겁니까. 그저 답답하여 한 말입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알겠네······.”

    대체 내가 무엇을 어찌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답지 않게 이리 화를 내는데 어쩌겠는가.

    가만히 있어야지.

    나는 괜히 헛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앙법은 아쉽게 됐군.”

    “문진의 판단이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특정 지역에서 성과를 내어야만 광범위하게 도입할 수 있을 겁니다.”

    타당한 의견이었기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장 도입하지 않을 뿐, 꾸준하게 시도할 것이니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거란족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내 생각이 중요한가? 그들이 분열되어 있는데 어쩌겠는가.”

    남진이 크게 성공하였기에 본격적으로 번국을 한수로 내려보내야 할 때가 됐다. 그런데 거란족이 아직도 교통정리를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실무적인 어려움이 발생했다.

    “사실 계속 그렇게 사분오열되어 있는 게 꼭 나쁜 건 아니긴 하지. 강성하지 않을수록 다스리긴 편하니 말일세. 하지만, 우리의 품에 딱 넣으려면 한 우물에 모여 있는 게 좋긴 하지.”

    “그렇지요. 거란족은 언제 어찌 행동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부족 별로 분열되어 있다가 따로 외부 세력과 접선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로서는 낭패입니다. 특히, 신라나 백제로 몸을 던지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거란족은 흉하게 찢어진 파전처럼 젓가락을 들이미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그들은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나로 잘 묶어두면 쉽사리 배신할 수는 없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통합되면 강성해질 것이니 더 위험하다고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아예 틀린 의견이다. 자고로 일국의 움직임은 태산처럼 무거운 법이다. 내부의 작은 불만이 있을지라도 국가 단위로 묶여 있기에 부족 체제처럼 단독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일국답게 ‘역모’라는 법도를 꺼내어 조직적인 차원으로 응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묶어야 하는데 자네는 판이 보이던가? 나는 도통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더군.”

    “세력으로만 따지면 돌라와 오적이 가장 강성합니다. 하지만, 돌라는 불평과 불만이 많고, 오적은 음흉합니다.”

    “막하불이 딱 좋긴 한데, 세력이 약하지. 그를 왕으로 세웠다가는 분란이 일어나기 십상이겠더군.”

    “그렇습니다. 결국, 그들이 알아서 옹립하는 게 가장 좋은데 쉽사리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속 미룰 수는 없는 것인데 참으로 답답하군.”

    자고로 이런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기세였다. 한수를 확보했을 때 말갈, 고막해, 거란이 일괄적으로 개국을 선언한 뒤 신라를 맹렬하게 약탈한다면 남부 전선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가져올 수 있다. 신라가 이를 악물고 헛짓할 생각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거란족이 저렇게 풍선처럼 흔들리면 기세가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하니 우리로서도 근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굳이 한 명을 정해야 한다면 오적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예. 음흉하지만, 그간의 일을 되돌아보면 역량이 가장 뛰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거란의 단결을 중시하니 일국을 통치하기에도 적합하지요. 한데, 형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군요.”

    “아. 꼭 그런 건 아닐세. 자네의 말에 동의하기에 우려가 되는 것이네.”

    “무슨 말씀입니까.”

    “세력 균형이 잘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거란국이 비대하게 커지면 고막해와 말갈이 쇠약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그래서 본국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

    “그렇긴 하지.”

    하긴.

    당장은 고구려가 삼국의 성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계획이었다. 개국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일러줘야 할 게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가 여기까지 흘렀다면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조만간 오적과 만나보지.”

    “형님께서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자네가 해도 무방하지.”

    “아닙니다. 형님이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개국을 이르는 건데 격은 맞춰야겠지요.”

    그래도 막리지가 직접 가서 말하는 게 모양새가 좋다는 의미였다. 당연하겠지만 나 역시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하면, 이 내용은 이리 정리하지.”

    마무리하며 여기저기 결리는 몸을 움직였다. 연자유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입니까?”

    “그렇지.”

    “음. 몸 사리십시오. 생각보다 위험할 겁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다 백성들 좋자고 시작한 일일세.”

    “음.”

    “허. 자네 의외로 잔걱정이 많군.”

    “그러면 좋겠지만······.”

    연자유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감을 잔뜩 보이면서 말했다.

    “결과만 보게. 결과만. 내가 다 해낼 것이니까.”

    호탕하게 웃으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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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나는 호언장담을 했다.

    연자유의 우려 따위는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정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

    “······.”

    이건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사나웠다.

    정말로 사납고 사나웠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

    “······.”

    나와 이문진의 앞에 있는 여인들은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눈빛으로 365가지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건 바로 살의였다.

    압도적 기세에 기가 질렸기에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이 이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바로 양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부녀자들이 양잠하다가 총파업을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귀찮고 힘들며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러한데 고구려였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늘 침착하게 나를 보필했던 이문진도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대인. 일단 물러나지요.”

    “실은 진작에 물러날 생각이었네.”

    서둘러서 뒤돌아섰다.

    한 걸음이라도 빨리 백성들의 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백만 대군이 노려보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었기에 필생의 체력을 걸고 움직였다.

    “······.”

    “······.”

    밖으로 나온 나와 이문진은 잠시 말을 아꼈다. 아직도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휴······.”

    “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이 마주쳤다. 그냥 멋쩍게 웃었다.

    “대인. 실로 위험했습니다.”

    “대업을 이루기 전에 황천길로 갈 뻔했네.”

    “소생이 다시 생각해봤는데 양잠은 미루는 것 역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그래도 해야겠지요?”

    “그래야겠지.”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고구려가 팽창 노선을 취하면서 목표치와 결과가 아예 달라졌다.

    애초 고구려 백성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자 시작한 뽕나무 재배였다. 하지만, 북방의 패권을 바라보면서 길은 길어졌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귀족이 백성에게 비단을 구하여 조세를 내면 조정은 이를 돌궐에게 내밀어야지.”

    바로 이것이었다.

    내수에서 대외 팽창까지 일궈낼 수 있으니 가장 완벽한 구조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시작은 미비하겠지만, 점차 확대될 것이니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때가 되면 돌궐에 넘길 비단에도 값을 치러야겠지.”

    “물론입니다.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세력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를 선별하는 것도 우리 아니 나의 몫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고식의 몫이었다.

    그가 대돌궐 전문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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