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변화하는 고구려(3)
102화 변화하는 고구려(3)
고대원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기분이 좋았고 가슴이 벅차오른 덕이었다.
“끙. 너무 부럽지만 어쩌겠습니까. 결국, 다 소인의 판단이니 말입니다.”
지게꾼의 앓는 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도 고대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과 달리 윤기가 흐르는 지게꾼의 얼굴이었다.
똥지게를 운송하며 생계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안정적인 수확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는가.
“경작도 해보는 게 어떻겠나? 똥지게는 자네가 하더라도 식솔들은 경작하러 가도 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전에는 농기구가 영 부실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서토에서 약탈해온 농기구를 나누지 않습니까. 만일, 농기구만 멀쩡한 걸 받으면 경작도 해야지요. 하루도 그냥 보내면 안 됩니다. 다들 더 잘살고 있는데 소인이 뒤처질 수는 없지요.”
더 나은 삶을 향한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고대원은 이런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전에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삶의 유지를 꿈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백성은 이제 더 좋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흡족하지 않겠는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아. 일단 땅을 확보하고 돌을 구해서라도 경작해야지. 농기구는 어떻게든 생기지만, 좋은 땅은 남들이 다 가져가지 않겠나?”
“이런. 소인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군요!”
“서두르게. 작금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속도일세.”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똥지게는 왜 두고 가나?”
“부탁드립니다. 전하.”
“허.”
그는 무려 태자에게 똥지게를 맡기고 굉장한 속도로 달려갔다. 고대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주변의 백성들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니, 자네들 봤나? 어찌 이렇게 무엄할 수가 있나?”
“하하하! 소인들은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허. 인제 보니 다 한통속이군.”
“하하하!”
가벼운 농을 주고받던 고대원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똥지게를 들었다.
그러나
“······.”
한 걸음을 움직이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니, 경직됐다. 동시에 농을 주고받던 백성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바로 평강공주였다.
그리고
“모두 물러나라.”
위엄이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일제히 백성들은 사라졌다. 평강공주와 고대원만 남아 있었다.
“전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 중입니까.”
“보다시피 똥지게를 옮기고 있습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물음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세요.”
“정확하게 인지하여 대답한 겁니다. 나는 지금 똥지게를 옮기고 있습니다.”
“허.”
평강공주의 표정은 점차 싸늘해졌다. 반면, 고대원은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일국의 태자이십니다. 한데, 백주에 똥지게나 옮기는 게 말이 됩니까.”
“일국의 태자로서 백성과 땀을 함께 흘리는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말 그대로 일국의 태자가 하는 일입니다.”
고대원은 평강공주의 말을 잘랐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타부타 말을 보태는 건 참으로 불쾌하군요.”
“······.”
“잊으셨습니까? 이 나라 고구려에서 나의 행동을 제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태왕 폐하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내 눈앞에 계신 누이 아니 공주께서는 권한이 없습니다.”
“······.”
고대원은 한걸음 옮기면서 말했다.
“비켜주겠습니까? 나는 백성과 한 약조를 지켜야 합니다.”
평강공주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똥지게를 든 고대원이 지나갈 때
“전하의 길은 틀렸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나의 길이 곧 고구려의 길입니다.”
고대원은 피하지 않고 화답했다.
그렇게 그는 걸었고, 그녀는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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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좋군.”
말 그대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요동을 중심으로 한 대개간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진행됐다. 많은 백성이 결합했고, 귀족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이만하면 이번 농사의 결과를 크게 기대할 만하였다.
그리고
“300명이라.”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학자를 선발할 과거시험에 응시한 인원이 300명이었다.
이들은 왕고덕이 사재를 털어 확보한 이들과는 달리 완벽한 고구려의 관리로서 복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전처럼 단지 농법의 보급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직접적으로 관장하며 통치를 수행하는 태왕의 대리인이 될 사람들이었다.
특정 인원을 고를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의 학식만 있다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금은 소수의 천재가 아니라 다수의 범인이 통치를 익히는 게 중요한 시대였다. 물론,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으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요동에 300명을 모두 보내는 건 과할지도 모르지만, 개간을 더 확장하려면 다소 무리해야 하겠지.”
홀로 흥얼거리며 문서를 만지던 때였다.
“대인.”
연자유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혜자가 보였다.
“소승을 불러놓고 어찌하여 홀로 읊조리고 있습니까.”
“허. 언제 오셨소?”
“조금 전에 인사까지 나눴거늘 어찌 이러십니까.”
“내가 그랬소······?”
“부처님께서 입증하실 수 있습니다.”
“······.”
연자유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부처님과 혜자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요. 한데, 소승은 어찌하여 부르셨습니까.”
“요즘 불교의 교리를 정립하느라 바쁘다고 들었소.”
“어디 교리만 새로 하겠습니까. 가르칠 승려들도 잘 선출해야 합니다. 이뿐입니까? 백성에게 전할 방법도 고려해야 합니다. 하여,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합니다.”
한 마디로 바빠 죽겠으니 괜한 말을 절대로 하지 말라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연자유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문서나 살폈다.
그러자 혜자가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됐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아니, 대사께서 바쁘다고 하시니 내가 어찌 말할 수 있겠소.”
“듣던 대로 옹졸하군요.”
“이보시오······.”
“부처님께서 다 이르셨습니다. 대인께서는 소승을 일부러 보지 못한 척하지 않았습니까. 최대한 바쁘다는 걸 온몸으로 표출하여 소승이 손을 보태길 바라였기 때문이지요. 어떻습니까? 아닙니까?”
“티가 났소?”
“부처님께서 보셨다고 몇 번이나 말합니까.”
연자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대사. 그거 아시오?”
“모릅니다.”
“우리가 한수 이북의 지역에 대규모 성을 축조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것이오.”
“요동은 큰 철광이 많으니 철을 쉽사리 공급할 수 있기에 확실하게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수 이북은 뚜렷한 철광이 없기에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지요. 하여, 작은 보루나 몇 개 축조하였지요. 허. 설마 소승에게 이를 묻고자 부르셨습니까?”
역시 혜자의 분석은 정확했다. 연자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의 영역에 한수에 이르게 되었소.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겠지요.”
“사실 그 문제가 복잡하지요. 번국을 한수로 보내더라도 철기가 꾸준하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한데, 당장 그곳으로 보낼 여력은 없으니 답답하지요.”
“그래서 내가 대사를 부른 게 아니겠소?”
혜자는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빼곡한 하루 일정이 스쳤으나 이미 얼굴이 반쪽인 연자유를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처님께서 번국의 백성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소승은 밤마다 마음이 아픈데 대인께서는 어찌 생각합니까.”
“······그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고, 사찰도 짓도록 하겠소. 그러면 이제 대화를 시작해도 되겠소?”
“소승은 늘 연 대인을 지지합니다. 그래요. 무엇입니까.”
연자유는 익살스레 웃는 혜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진나라에서 장인을 몇 명 보내왔소.”
“들었습니다. 아주 탁월한 능력이 있다지요?”
“그렇소. 당장 철기 주조 기술이 우리와는 다르오.”
“그렇습니까······?”
혜자는 놀랍다는 듯 강한 흥미를 보였다.
“본국의 주조 기술도 부족하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강도에서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철기의 강도가 약하다는 건 전쟁에서 불리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병기가 어찌 허약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오. 한데, 들어보니 열처리에서 큰 차이가 있었소. 그러니까 불순물이 거의 없이 철기를 제조한다고 하오.”
“음.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소.”
“그건 좋은 일이군요. 그러나 분명 단점도 있을 겁니다.”
“드는 비용이 많소.”
“같은 말이군요.”
“그렇지요.”
얼핏 말장난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담긴 뜻은 아예 달랐다.
“비용이라는 건 결국 철기 주조를 위한 용범의 제작과 관련 물자를 의미할 겁니다. 여기에 철은 제외겠지요.”
“과연 대사시오.”
“소승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연자유는 빙그레 웃으면서 문서를 내밀었다. 혜자는 살짝 경계하며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허······.”
그의 입에서 놀라움이 담긴 한 음절이 새어 나왔다.
“종래 도성 근처 큰 철광은 2곳이었소. 한데, 3곳을 더 확보했소.”
“허. 이를 어찌 몰랐다는 말입니까.”
“몰랐겠소? 부족함이 없으니 찾지 않은 것이었던 것이오.”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동시에 지도를 펼친 연자유의 손가락이 국내 도성의 동쪽을 지목했다.
“이곳은 어찌 이르십니까.”
“파악하니 땅을 조금만 걷어내도 철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소.”
“설마 노천과도 같다는 겁니까.”
“바로 그러하오.”
“허. 이를 또 어찌 아셨습니까.”
“끌. 우리 왕 고덕 막리지께서 비가 언제 내리며, 첫서리는 언제며······하. 이를 알아 오라고 채근하기에 국내 도성에 강력하게 협조를 구했소. 그러다가 우연히 파악했다고 하오.”
“이런.”
혜자는 크게 우려하며 말했다.
“연 대인. 과정은 절대로 왕 대인께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이오. 필시 자신이 날씨를 파악하라고 하였기에 철광을 발견했다고 말할 게 뻔하오.”
“바로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도원결의하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소승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군요.”
“그렇소.”
연자유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일이 잘 성사된다면 우리는 한수까지 철을 공급할 수 있고, 백성에게 농기구와 병장기를 내어줄 수 있소. 우리 고구려의 철기로 말이외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기에는 조정의 관리로는 부족함이 있지요. 이미 농업 개혁이 모두 투입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승려의 힘이 필요하오.”
“부처님께서는 무조건 동의하실 겁니다.”
“참으로 합당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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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를 살피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어떻습니까.”
연자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내민 문서에는 고구려의 기후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아직은 한반도 북부 지역의 국한되었으나 이만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훌륭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