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변화하는 고구려(2)
101화 변화하는 고구려(2)
이문진의 말에 가서일은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진. 경사가 심한 곳은 유독 메말라 농사가 어렵다고 알고 있네.”
“자네의 말이 옳아. 비와 바람에 의해서 흙이 온전할 수가 없으니 그냥 두어도 지력이 손상되는 곳일세. 음. 내가 따로 알아보니 남과 동을 바라보는 지역이 서북보다 흙의 유실이 많더군.”
“기다리게. 문진. 자네가 이토록 세밀하게 파악했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이문진은 대범하지만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토록 중차대한 시기에 괜한 행동으로 국력을 소모할 사람이 아니었다.
고구려에 경사진 토양이 그토록 많은데도 지금껏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이런 곳은 밭농사 아니 농사 자체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해봐야지.”
“허. 문진.”
“이보게. 어차피 의미 없이 존재하는 땅일세. 어찌 시도조차 하지 않겠나? 만일 크게 일으킬 수 있다면 고구려의 콩 수확량이 얼마나 늘어나겠는가.”
맞는 말이다.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인력을 동원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비탈진 곳을 밭으로 개간하려면 실로 막대한 인력이 필요한 것일세.”
가서일의 말대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인력이었다. 게다가 현재는 추가적인 인력 충원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진. 귀족의 사병과 하호는 그들의 경작지를 경작하느라 바쁠 것이네. 백성은 이미 장안성 역사에 동원되었거나 친위대에 지원하거나 경작지를 확보하느라 여력이 없네.”
현재 고구려는 말 그대로 포화상태였다. 농업 개혁이 시작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일사불란한 건 희한하게도 중앙집권이 아닌 귀족 중심을 정치가 발전한 덕이었다. 그만큼 지역 사회에서 귀족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서일.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서토에서 끌고 온 이들의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지 않은가. 여기에 전쟁의 승리로 신라인을 대거 확보할 수 있게 되었네. 이만하면 인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도 6만 명일세. 그 정도로 되겠는가?”
6만 명이라는 인원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데도 가서일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산비탈을 경작하는 일이 실로 엄청난 역사라는 걸 의미했다. 괜히 산비탈을 하늘이 버린 땅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쉽지는 않겠지.”
“차라리 관개 시설을 더 확장하는 게 옳지 않겠나?”
“나 역시 이앙법이 참으로 매력적이라고 여겼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구려에 보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네.”
이앙법은 단지 관개 수로만 확보하였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무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문제는 바로 심리였다.
“시비법과 이앙법은 다르네. 전자는 원래 짓던 농사에 더하는 것일세. 그러나 이앙법은 모든 방법을 뜯어내는 새로운 것이네.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 그대로 시비법은 효과가 없을 수는 있지만, 농사를 망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앙법은 아니었다. 누구도 해보지 않은 아예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기에 거부감과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려면 결국, 실질적인 성과가 있어야 하네. 이미 특정 지역에 도입하기로 했네. 성과를 내고 눈으로 직접 보게 하지 않는 이상 단기간의 도입은 불가능하네. 잊지 말게. 백성 중에서 가장 변화를 기피하고 늦은 이들은 바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일세.”
일목요연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가서일이라고 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까지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문진은 벗의 심리를 읽었는지 보태듯 말을 꺼냈다.
“크게 우려하지 말게. 도성의 지척에 있는 함박산부터 시작할 것이네.”
6만 명으로 60만 명이 투입된 결과를 도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10만 명을 동원한 성과를 낼 수는 있었다. 이는 어렵지 않았다.
“옥토를 개간하고, 평지의 황무지를 확보하는 건 자작농을 늘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네.”
“그들에게 비탈밭을 취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인가?”
“고된 일을 맡길 것이네. 쉬지 않고 일해야 할 것이네. 그러나 끝에는 결국 경작할 수 있는 땅을 가지게 된다면 어찌 더 부지런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니 말일세.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할 것이네. 나는 이를 바라본 것일세.”
가혹한 처우로서 일을 더 강도 높게 처리하도록 한다는 말이었다. 고구려 백성이 반나절을 일할 때 그들은 한나절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리하면 6만의 인원이 10만의 성과를 낼 수 있다. 가서일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이 듣던 이야기로군. 일전에 왕 대인께서 발의하시려다가 황급히 철회했던 방침이 아닌가.”
“그렇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네. 고구려의 영토를 덜어내는데 어찌 우리 백성의 힘만으로 가능하겠나. 또한, 그들에게 당장 같은 대우를 해준다는 건 어려운 일일세.”
“어떻게든 개간 이후 전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 부지런히 일하겠지.”
“그렇다네.”
최종적으로는 생산력의 증대와 내실을 다지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자네 돼지는 어찌 됐나?”
“도성 외곽까지 잘 확대하여 4만 마리가 되었네.”
돼지는 1년에 최소 11마리, 많게는 20마리의 새끼를 친다. 애초 시작은 1천 마리였으나, 왕고덕의 발의로 더 많은 돼지를 가져왔다. 결과, 현재는 무려 4만 마리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돼지를 헛되이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고작 미물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네. 나는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네.”
가서일의 실없는 농에 이문진은 피식 웃었다. 늘 그렇듯 서두는 이렇게 가벼운 말이었다. 그러나 담긴 뜻까지 어찌 가볍기만 하겠는가.
“시비법을 위해서 사육했으나 먹었고, 신라의 농지를 타격하기 위해서 우람하게 키웠는데 먹었네. 한데, 이제는 돌궐로 가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어찌 기구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네. 단지 돼지를 사육하는 것으로도 고구려의 방침이 이렇게 바뀌니 참으로 천하의 정세가 어지러운 것일세.”
그랬다.
농업의 증진을 꾀하고자 돼지를 사육했다. 그러나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방책으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은 훗날 고구려로 귀의할 돌궐의 유력가를 위한 가축이 되었다.
“세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최소한 500마리는 내줘야만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상황에 따라서 유력가마다 1천~2천 마리를 내어줘야 할 수도 있네. 하면, 몇만 마리의 돼지라고 해도 부족하지.”
“그렇지. 그래야만 그들도 어떻게든 뿌리를 내릴 수 있겠지.”
“마음이 아프다네. 자식처럼 키운 우리 돼지를 머나먼 북방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말일세.”
“큭. 됐네. 그렇지 않아도, 돼지 사료가 점차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이문진은 여전히 웃으며 지도를 살폈다.
“서일. 10만 마리의 돼지가 확보된다면 우리는 돌궐의 외곽을 흔들 수 있을 것이네.”
“한 명에게 다 주는 것도 방법이지.”
“우리는 그게 편하긴 하지.”
두 사람의 눈동자는 광활한 돌궐의 세력권으로 향해 있었다. 그중 서남에서 동북으로 향한 산맥에 이르러 이문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흑산(흥안령산맥). 남쪽이라 하면 흑산의 동쪽이며, 북쪽이라 하면 흑산의 서쪽일세. 바로 서쪽에 실로 광활한 초지가 존재하지. 서일. 우리는 이곳을 바라봐야 하네.”
“북방을 패권을 가지려는 자. 기어이 차지해야 하는 곳일세.”
“돼지가 가져다줄 것이네.”
“끙. 부담 주지 말게.”
“부담가지라는 말일세.”
“이런.”
가벼운 농이 오가는 와중이었으나 고구려 대 북방 정책의 내실이 완성되어가는 대화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는 밀도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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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원은 최근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억지로 참으려고 했으나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기에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니, 전하. 소인들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정말 배 아파서 그러는 겁니다. 도끼가 너무 멋있습니다. 갖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소인도 유생 노릇 잘 할 수 있습니다.”
“괜한 욕심 내지 말고 친위대는 어떤가? 요즘 모병하고 있다고 들었네.”
“휴. 답답합니다.”
유생도 유생이지만 최근 농업부에서 추진한 정전제는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했다. 식솔 중 한 명이 친위대에 속하면 일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땅을 나눠준다.
고구려가 대 개간의 시대로 돌입하였기에 경작지를 확보하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조정에서 엄선한 옥토를 나눠주는 정전제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가족은 농업부 산하의 시비법 제조에 결합하게 되는 것이니 잉여 생산물까지 확보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만큼 친위대라는 건 매력적인 정책으로 백성들에게 다가갔다. 한마디로 능력만 있으면 일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부의 축적이 가능한 기회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하하하. 뭐가 또 답답한가.”
“전하. 그게 말이 모병입니다. 아무나 뽑아주지 않아서 답답해 죽겠습니다. 아니, 너무 억울해서 그럽니다. 고구려에서 태어나서 창칼을 들 수 없는 자격이라니요.”
친위대는 실로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했다. 타고난 용력은 물론이거니와 격투 수준까지 고려하니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유생들보다는 소인이 더 잘 싸웁니다. 무조건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글자 배우러 간다고 할 걸 그랬습니다.”
“이런. 그때 왜 지원하지 않았나.”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푸념이었으나 듣기 싫은 푸념이 아니었기에 고대원은 포근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끙. 사실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알고 지내던 동생 놈들이 어느 날 도끼를 들고 다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습니다.”
“소인도 도끼 잘 휘두를 수 있는데 너무 답답합니다.”
“부러워죽겠습니다.”
속앓이가 잔뜩 쏟아졌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저변에서 시작되는 생기였기에 고대원은 즐거울 뿐이었다.
눈치껏 지켜보던 이가 냉큼 끼어들었다.
“전하. 혹시 유생은 더 선출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그러니까 부월수를 말하는 거 아닌가?”
“물론입니다. 사내라면 당연히 부월수지요.”
“애석하게도 당장은 계획이 없다고 들었네.”
“이런. 아니, 그런데 소인이 더 똑똑하고 힘도 셉니다.”
“그러면 친위대에 지원해보지 그러나.”
“떨어졌습니다.”
“이런.”
여기저기서 낙담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대원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뭐 하겠나.”
“똥지게나 나르고 있으나 세상이 참 야속해서 그럽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전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 생각이 어디 그렇습니까. 계속 눈앞에서 도끼가 아른거리니 참으로 속상합니다.”
“이런.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