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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00화 (100/199)

100화 변화하는 고구려(1)

100화 변화하는 고구려(1)

아무리 역사가 바뀌었다고 한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의 본성은 섣불리 변화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원 역사에서 수나라의 우중문을 조롱한 이가 바로 을지문덕이다. 바로 그가 직접 신라를 도발했으니 효과가 얼마나 크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신라군은 며칠 지나지 않아 성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창칼을 휘두르며 악을 쓰고 달려드는 그들은 실로 충성스러운 맹견이었다.

만일, 모르고 싸웠다면 놓쳤을 정도로 신라군은 짜임새 있게 왕의 퇴각로를 확보했다. 1만의 병력을 덫으로 던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처절함 그 자체였기에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상황을 파악하였기에 김백정을 생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흘은 이 모든 걸 손바닥에 보듯이 해냈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이보게.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던가. 처음부터 항복했으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아니, 애초 될 일도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용을 썼나? 자네 하필이면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 있나?”

“······.”

“답답하군. 정말. 아니, 그래. 뭐 해보려고 했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았는가. 서로 피곤하기만 하고 이게 대체 뭔가?”

“······.”

김후직의 안색은 창백함을 넘어 아예 시체 같았다. 사람이 넋이 나가면 이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제 다 끝났으니 괜히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게다가 내가 원래는 호인이었기에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휴. 밥은 먹고 다니나?”

“······.”

“이런. 굶었나? 이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데 뭐 하러 굶어가면서 애를 쓰나? 앞으로는 세끼 다 챙겨 먹으면서 하게.”

“······.”

“뭐. 그런데 남쪽에서 왔으니 우리 음식이 입에 안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일이 다 끝나고 집에 가서 포식하게. 괜히 북쪽 음식 먹었다가 탈 나면 서로 곤란하니 말일세.”

“······.”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너무 안타까워서 말해줬다.

“병부령인데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고 하여 바뀌는 게 있······겠습니까.”

전과 달리 내게 확실한 존대를 했다.

신라인의 처세란 이러했다.

중간에 잠시 버벅거린 건 사실이지만 분명 그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군. 혹시라도 협상하자고 말할까 내심 걱정했었네. 그러한데 이렇게 상황을 제대로 하고 있으니 내가 크게 안도하게 되었네.”

“무엇을 내주면 됩니까.”

“알다시피 애석하게도 당항성은 우리가 취했네.”

“······응당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미련 가지지 않겠습니다.”

“허. 자네 왜 그러나? 내 말을 똑바로 들어야지. 당항성은 이미 우리 영토일세. 이를 신라에게 승인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내 말이 틀렸나?”

“실언했습니다. 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서로 믿지도 않을 미사여구는 치우게. 낯간지러우니까.”

나는 싱글거리면서 김후직의 심장을 후벼팠다. 여기까지 와서 전처럼 잘 대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차산성부터 칠중성까지 눈엣가시 같은 관방체계도 모두 거둬야겠지?”

“성을 허물 수는 없습니다. 어찌 거둘 수 있습니까.”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나? 그걸 왜 허무나? 고구려의 영토가 될 것이라는 말일세.”

“······.”

대꾸하지 않았으나 격하게 흔들리는 김후직의 눈동자는 심리적 동요가 얼마나 큰지 말해주고 있었다.

항복은 항복인데 영토를 내어놓으라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도 크게 투자했으니 수익도 제대로 창출해야 하지 않겠나?

“한수도 넘기게.”

“······.”

아차산성을 거둔다는 말에서 이미 예상했던 것일까? 김후직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체념하듯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참으로 고단한 미소였다.

“을지문덕이 말했나?”

“······.”

“우리 사신을 백제에 파견했다고 말일세.”

“의도가 무엇입니까.”

“뭐기는. 과거는 덮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을 한 것일세. 비록 그들의 왕도가 있던 한수는 고구려의 질서에 포함되겠지만, 신라의 남쪽 영토도 제법 비옥하니 잘 취해보라고도 전하였네.”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늘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질서에 포함되었습니다. 한데, 백제의 공세를 꾀하다니요. 이는 옳지 않습니다.”

김후직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크게 패하고 한수를 통째로 빼앗기게 되었다. 이럴 때 백제가 눈을 부라리고 공격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핵심은 김후직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일러줄 의무가 있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군.”

“예?”

“본국과 신라의 사이가 변하였다고 생각하나?”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항복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신라를 어찌 믿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었다.

“신라를 전처럼 번국으로 삼으면 백제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원군을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럴 수가 없지. 고구려의 질서에 편입되었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위신의 문제가 생길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이 짓을 또 해야 하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광개토태왕 시절에 한 번 한 것으로 충분해.”

“······.”

“또 그러한들 너희가 언제 또 배신할 줄 알고 힘을 낭비하나? 그러니 애초부터 아무런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네. 협상이 끝나고 너희가 왕도로 갈 때 새기게.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적국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김후직의 안색은 참담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물론, 남의 나라 일이었다.

“우리는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 전혀 개입할 생각이 없네. 알아서 살아남게. 아. 우리의 번국이 너희를 약탈하는 건 계속 이어질 것이네. 그러니 바쁘게 움직이게. 북과 서에서 신라를 쥐어짤 것이니까.”

나는 참으로 잔인했다.

그런데 더 잔인해질 생각이 충분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하여 국력을 키우게. 그래서 또 도전하게. 고구려의 질서에. 내가 이를 왜 말해주는지 아는가? 한수는 번국에게 내릴 것이네. 기어이 피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들을 먼저 제압해야 할 것일세.”

재앙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김후직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수 일대의 모든 성에서 병장기와 모든 걸 두고 몸만 빠져나가게. 병사는 어쩔 수 없으나 백성은 그대로 두게. 모두 우리가 잘 관리할 것이네.”

“더 내어드릴 게 있습니까.”

“있네.”

“······.”

“자네들의 왕을 보내줄 것인데 사람을 좀 보내게.”

“사람이라니요?”

“백성 5만 명을 보내게. 노비로 사용할 것이네.”

“대인!”

“국고에 있는 쌀도 모조리 보내게. 군량미로 사용할 것이니까.”

“차라리 숨통을 끊으십시오.”

“그건 백제가 한다고 했네. 구태여 자네들 따위를 치우는데 우리가 힘을 다할 필요가 있겠나?”

김후직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만일, 백제가 신라를 도모하면 고구려라고 하여 좋을 건 없을 겁니다.”

“자네가 뭔데 우리 고구려를 걱정하나? 자네 나라 걱정이나 하게. 나라가 오늘, 내일 하는데 참으로 주제넘군.”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교환할 물자와 백성을 확인한 뒤 왕을 내어주겠네. 그리고 오늘부터 번국의 대군이 한수로 남하할 것일세. 썩 비키라고 하게나. 가보게.”

김후직은 황천길을 걷듯 힘겹고 슬프게 걸어 나갔다.

조금 미안해졌다.

백제에 사신을 파견한 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김후직의 말대로 남방을 백제가 제압하는 건 절대 좋은 흐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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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진의 고민은 깊어졌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쉬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답답하군.”

“왜 그러나? 나는 아무리 살펴도 부족한 건 보이지 않네만.”

가서일이 의아하여 묻자 이문진은 고개까지 저었다.

“분명 순탄하게 이뤄지고 있기는 하네. 한데······.”

“한데?”

“농업 개혁을 입안하였지 않은가.”

“그렇지.”

“그런데 그간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가? 크게 달라진 건 없네.”

“자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군. 상세히 설명해주겠나?”

“들어보게.”

이문진은 속이 타는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하게 들이켠 뒤 말했다.

“시비법을 보급하고, 경작지를 확보하지 않았나?”

“그렇지. 전과 다른 변화라는 건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나?”

“아닐세. 고작 그 정도라는 걸세.”

“고작이라니?”

“고구려가 느끼는 변화의 강도가 큰 건 사실일세. 한데, 이런 수준의 개혁은 서토에서 시비법을 가져온 뒤 경작지를 확대했다고 가정해보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가서일은 이문진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대번에 깨달았다.

“왕 대인이 입안한 혁신적인 농법에 비해 성과가 미진하다는 건가?”

“바로 그 말일세. 너무 안일해.”

“음.”

“이미 폐하께서 돌궐을 분열시켜 북방의 패권을 도모하겠다고 천명하셨네. 한데, 지금 우리의 준비 태세가 어떠한가? 대체 무슨 수로 돌궐을 지원해줄 수 있나? 아직 내실도 제대로 다지지 못했는데 가당키나 한가?”

“그렇군. 실질적인 성과에 비해 고구려의 대의가 너무 거대하긴 하지.”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

“자네는 왜 또 면박을 주나?”

두 사람은 괜히 티격태격했다.

가서일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천명하셨으니 당연히 우리가 수행해야겠지. 10할을 달성하지 못해도 5할을 이루면 된다는 말은 의미가 없네. 무조건 10할을 이뤄야지. 내가 이를 어찌 모르겠나.”

“그렇지. 바로 그것일세. 그러자면 지금의 수준으로는 곤란하네.”

“한데, 방법이 있나? 사실 지금만 해도 사병까지 다 동원되어 농업 개혁을 진행하고 있네. 여력이 있겠나?”

“없지.”

“그러면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고민일세.”

“한데, 찾아내지 못하면 북방을 도모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세.”

“하면, 찾아야지.”

가서일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역시 작금의 정세야말로 고구려가 북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하늘의 내린 시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일. 방향을 틀어야 하네.”

“방향을 틀다니?”

“눈에 보이는 땅은 백성들이 나아가고 있네. 한데, 조정이나 귀족도 여기에 힘을 보태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저 백성이 우경을 할 수 있게끔 거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걸세. 시비법은 당연한 걸세.”

“하면, 자네가 생각하는 건 뭔가?”

“누구도 경작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에서 농사를 지어야지. 그리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도해야 하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백성에게 맡겨야지. 조정은 개척해야 하는 게 옳지 않겠나?”

“어디인가?”

“비탈밭이네. 여기를 경작해야 하네.”

비탈밭은 하늘이 내린 황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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