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신라를 위한 변명(2)
97화 신라를 위한 변명(2)
병부령 김후직은 피가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하루에 하루를 더할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점차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작은 단서라도 쥘 수 있다면 좋겠으나 상황은 지독할 정도로 미궁 속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1할의 확신조차 가질 수 없었기에 절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기다리는 건
“답답하도다. 어찌 아군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신라군의 북상 소식이었다.
이미 고구려군의 외곽을 흔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징후가 있어야 퇴로를 확보할 수 있거늘.”
원군이 칠중성을 포위한 적을 어찌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달려와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칠중성 이남의 퇴각로를 확보했다는 신호이기에 그러했다.
바로 그때 성문을 열어 결사의 기세로 군왕은 퇴각할 것이다. 진작 이러해야 했다.
한데, 아직도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전군이 죽기로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각오했다. 한데, 이리되어서야······.”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 없었으나 지금의 결의가 계속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음을 각오할지라도 굶주림은 절대로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량이 떨어지기 전에 결행해야 한다.’
굶기 시작하면 결의는 무조건 떨어진다. 설령 이를 악물고 버틴다고 할지라도 굶주린 병사가 어찌 왕의 퇴각로를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군량이 바닥을 보이기 전에 무조건 성문을 열고 달려야 했다.
‘이다지도 움직임이 없다는 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걸 의미한다.’
불미스러운 일은 필시 고구려군이 칠중성 이남 지역으로 진군했다는 걸 의미한다. 신라군은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김후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해야 하나.’
진나라 사신단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군은 늘어날 전망이었다. 그리하면 무려 10만의 대군이었다. 이는 1만 병력이 물러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배수진에 불과한 것이었다.
배수진은 장수의 각오로 훌륭하지만, 군왕이 선택해야 할 길은 아니었다.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는 지고한 가치에 왕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김후직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고구려의 본군이 오기 전에 성문을 열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아차산성까지만 간다면 한수 이남으로 순식간에 퇴각할 수 있다. 하면, 다시 후일을 기대할 수 있다.
1만의 병력은 생존을 기약할 수 없겠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라는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신라는 기어이 살아남을 것이다. 1만이 죽으면 이를 기반으로 2만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떻게든 생존해왔다.
어떤 위기에도 그리해왔다.
작금의 위기는 그저 스쳐 가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건국 이래 최대 위기라고 할지라도 그러했다.
이것이 신라였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것.
신라의 꽃은 이러했다.
김후직은 결국 결정했다.
‘고립되었다면 고구려의 본군이 오기 전 공격을 단행한다. 이게 옳다.’
이대로 무참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신라는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신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했다.
-----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런데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 군막을 지배하는 웅성거림은 오직 눈빛이었다.
돌지계와 거란족 부족장들의 눈동자는 상당한 시간 동안 흔들리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불평과 불만이 있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신라 왕과 혈전이 예상되었건만 고구려는 애매한 행보를 보였으니 갈수록 불평과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로 이 모든 건 씻은 듯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이 전장을 얼마나 중대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증명했기에 그러했다.
바로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고흘이 왔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부마 온달이 남진을 감행했으나 그 수는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 물론, 온달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국력을 아낀다고 생각할 여지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과거 요서에서도 그러했기에 삐뚤어진 시선이 지속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고흘은 온달과 사정이 아예 달랐다.
거란족, 고막해족 그리고 말갈의 유력가 중에서 고흘이라는 이름 두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 북방을 장악한 뒤 천하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나아가던 돌궐을 단번에 꺾어버린 불패 그리고 무적의 장수가 바로 고흘이었다.
그의 행보가 곧 고구려군의 총공세였기에 가히 백만대군의 위세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하기에 고흘의 참전으로 고구려를 향한 불만은 더 터져 나올 수가 없었다.
고흘은 수염을 유려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아군이 신라의 후방에 있는 당항성을 점령했소.”
이는 고구려가 수륙병진을 감행했다는 의미였다. 고흘은 말을 이어가며 잠시 왕고덕의 말을 되새겼다.
-장군. 우리는 처음부터 수륙병진을 꾀하였습니다. 이는 자명한 일입니다.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전장에서 불필요한 정략은 고흘과 어울리지 않았다.
평생 고구려의 강역을 지켜온 노장의 고집은 이토록 대단했다.
하여, 왕고덕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공들의 노고에 고구려가 수륙병진에 성공했소. 이를 어찌 부정하겠소이까.”
무릇 장수라면 공과가 분명해야 한다.
고흘은 이를 가볍게 한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공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오.”
말과 함께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비록 시간은 짧았으나 실로 강렬한 행동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돌지계와 부족장들은 고요했다.
고흘은 단 한 번의 언행으로 좌중을 지배했다.
“조만간 신라군이 성문을 열고 나올 것이외다.”
“어찌 장담하십니까.”
“아. 내가 그리 만들 것이기에 그렇소.”
고흘의 말에 돌라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반론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말이었다. 지금껏 불평과 불만을 가장 많이 터트렸던 이였기에 더 머쓱했다. 그러나 말을 보태며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장군. 자세한 내용을 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돌지계가 눈치껏 나섰다. 고흘은 그에게 예를 취했다. 여기에 다시 부족장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에게 말갈국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나라였다. 그러한데 고흘이 이토록 예를 취하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이로써 확실한 건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누구도 돌지계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돌지계의 표정이 묘할 정도로 밝고 맑아졌다.
“지금부터 고구려의 군세가 칠중성을 포위할 겁니다.”
“바뀐 사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고흘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병부령 김후직은 고구려군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포위한 병력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병부령. 정확한 판단에 기초해야 하오.”
“폐하.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현상에 충실할 뿐이옵니다. 지금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고구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옵니다. 칠중성의 포위 병력이 말이옵니다.”
김후직의 말에 담긴 의미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김백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선택이 신라의 명운과 직결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폐하. 진나라의 사신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의 말에는 사실이 있겠으나 분명한 주관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신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
“폐하. 되돌아보시옵소서. 우리 신라의 성은 견고하옵니다. 일찍 고구려가 남진하여 취하고자 했을 때도 수만의 대병을 동원했사옵니다. 그런데도 쉽게 점령하지 못했사옵니다. 비록 본국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한들 어찌 고구려가 쉽게 도모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면, 병부령은 남쪽에서 고구려가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오?”
“최소한 변동은 있을 것이옵니다.”
“음.”
“만에 하나 진나라 사신의 말대로 10만의 대병이라고 할지라도 칠중성에는 폐하와 1만의 결사대가 있사옵니다. 저들이 어찌 경거망동하겠습니까. 그러기에 포위에 수만의 대군이 필요할 것이옵니다. 즉, 남진에 동원되는 병력은 절반도 안 될 것이옵니다.”
김후직은 최선을 다하여 김백정을 설득했다.
“폐하. 이미 고구려는 수군까지 출병했사옵니다. 만일, 당항성까지 빼앗긴다면 어찌하옵니까.”
“뭐요······?”
“잊지 마소서. 당항성은 신라가 품은 새로운 꿈의 상징이옵니다. 작금의 신라는 생존과 꿈, 이 두 가지를 모두 위협당하고 있사옵니다. 이를 극복하자면 기어이 나아가야 하옵니다.”
김백정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러나 김후직은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과거 동방교위를 움켜쥐었을 때 신라의 모든 이가 열광했던 일을 잊지 마셔야 하옵니다.”
“······.”
“더는 신라가 생존이 아니라 꿈이라는 꾸게 되었던 순간이었사옵니다. 한데, 여기서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사옵니다. 폐하. 결단을 내려야 하옵니다.”
김후직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그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김백정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폐, 폐하!”
다급한 외침.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구려군이 전열을 정비할 때 우리 전령이 돌파하여 성에 당도했사옵니다!”
말 그대로 급보였다.
김백정은 안색이 환해졌다.
“당장 그를 데려오라!”
명과 동시에 전령이 모습을 보이며 예를 취했다. 김후직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전령······?’
참으로 희한했다.
능히 일군을 이끌 기세를 가진 이였거늘 고작 전령이라고 했다. 의아했으나 금방 이해했다. 지금 정국에서 적의 포위를 뚫고 달려온다는 건 아무나 가능한 게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폐하! 칠중성 이남에서 북상하던 아군이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의 말은 참으로 참담했다.
김후직의 안색은 와락 일그러졌다.
심지어
“하옵고 당항성이 함락됐사옵니다.”
꿈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아직 하늘은 남아 있다.
바로 신라의 국체, 생존이었다.
“지금 고구려군은 어떠한가?”
기본이라도 지켜야 했다.
현재로서는 이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다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자 전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김후직은 평생 이토록 광활한 눈동자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귀국의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그의 입에서 기괴한 말이 흘러나왔다.
멍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다했도다.”
부복했던 전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곧게 하고 어깨를 편 그의 기세는 가히 만부부당이었다. 마치 태산이 이와 같을까.
“이미 전쟁에 이겨 그 공이 높으니.”
그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직 내용을 전할 뿐이었다.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면 어떠하겠소?”
대체 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더는 듣지 못하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진심이오. 생존을 위한 최고의 계책을 사용했으며 유효했소. 그런데 더는 생존이 위태롭소. 하여, 말하오. 지금부터 다시 귀국의 국시, 생존을 확실히 도모하시오.”
“······.”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를 취하시오.”
그의 눈동자는 오직 김백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통성명도 하지 않았소.”
드디어 그의 표정에서 감정이라는 것이 솟아났다.
그건 웃음이었다.
아주 싱그러운 웃음.
“나는 고구려의 사대부, 왕실의 수문장 부월수의 총대장.”
그는
“을지문덕이라고 하오.”
을지문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