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사문난적(1)
94화 사문난적(1)
진나라 사신단 정사 위정은 병부령 김후직을 빤히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췌하였는데 정말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동방에서 신라의 위치가 정말로 형편없구나.’
바다 건너의 일을 어찌 세세하게 알겠냐마는 그래도 한때 고구려를 크게 위협하였다고 들었다.
그러니 제법 위치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신라의 위치는 그냥 신라였다.
의아할 필요도 없었다.
왕이 친정했는데 병력이 고작 1만이었다. 이러한데 어찌 평가가 좋을 수 있겠는가.
‘애초 오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하지만, 왔기에 이토록 중대한 일을 하게 되었다. 만약, 성사만 한다면 고구려는 진나라에 빚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하기로 했다.
“음. 내가 중재라는 걸 하려고 하오.”
“중재라고 하셨소?”
김후직은 헛웃음을 지었다.
‘진나라 사신이라고 하여 괜한 짓을 하는구나. 최소한의 예의를 다할 뿐이다.’
사실 진나라는 그렇게 비중이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자체적인 국세를 떠나서 신라의 운명을 좌우할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나라면 또 모를까.’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한 수나라는 아주 매력적인 나라였다. 언제라도 동진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는 나라니까. 아니, 솔직히 진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지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래야만 수나라가 고구려를 더 강하게 압박할 것이니 말이다.
물론, 대놓고 박대할 정도로 신라라는 나라가 간이 크지는 않다.
“공의 마음은 감사히 받겠소. 하지만, 고구려는 애초 협상할 생각이 없소. 일국을 조롱하는 막리지와 대체 무엇을 논할 수 있겠소이까.”
“하면, 중재를 거절하는 것이오?”
“결사의 각오로 싸울 뿐이외다.”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근왕군을 꾸릴 것이다. 하면, 고구려군의 칠중성 포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또한, 더 시일이 지나면 왕도에서 다시 근왕군이 북상할 것이다.
그러니 버티면 된다.
군량이 부족하면 나무라도 씹으면서 버티면 된다.
‘어차피 위정이 가져왔을 중재라는 건 고구려의 입장만 대변한 것이다. 들어볼 필요도 없다.’
쟁투의 역사에서 협상이라는 건 결국, 전쟁의 결과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다시 협상에 임한다는 건 굴욕과 직결하는 것이다. 이미 한 번 경험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위정은 쓰게 웃었다.
아니, 한심했다.
‘이토록 상황 파악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냥 죽으라고 무시하고 싶었다. 애초 딴 나라의 일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빚을 안겨 주고 싶은 마음이 인내를 발휘하게 했다.
“아차산성의 원군을 기다린다는 건 내가 잘 아오. 한데, 아회씨의 기병이 남쪽을 방비하고 있는데 쉽겠소?”
“잘 알겠소. 하지만, 본국의 운명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소. 대화는 이미 무의미한 것 같소만.”
“뭐. 알겠소. 돌아가리다. 한데, 정확한 상황은 전해주겠소.”
위정은 답변을 듣지 않고 태연하게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고구려군 5만 명이 추가로 남하하기로 하였소.”
“······.”
“여기에 수군도 보태진다고 하오.”
“······.”
“육지로는 5만, 바다로는 2만이라고 하였소.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전부요. 거짓은 없소.”
“······.”
“어떻소? 감당할 수 있소?”
“······.”
김후직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도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두 12만······이 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숨이 턱턱 막혔다.
그 꼴을 보던 위정은 답답함에 고개까지 내저었다.
“이보시오. 병부령. 귀국과 싸우자고 일어난 고구려군이 10만을 넘었소.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싸울 것이오.”
“허.”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무조건 수가 많다고 하여 이기는 것도, 적다고 하여 패배하는 것도 아니다.
위정의 말대로 왕도에서는 대군을 꾸리고 있을 것이며, 후방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10만이라는 수치는 이 땅 쟁투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압도적,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쉽사리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기어이 싸워야 할 때라면 준비하여 싸우겠으나 지금은 총력전도 아니었다. 진짜 어쩌다 보니 이리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신라는 10만의 적과 싸울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딱하여 말해주리다.”
어느새 위정은 진심으로 안쓰러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한 치의 위선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고구려는 공성전을 치를 생각이 아예 없소. 이곳은 포위만 하고 몇만의 기병과 수군이 귀국의 영토를 짓밟을 것이외다.”
“······.”
들은 바를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철저하게 약탈을 감행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여기에 위정은 보태듯 상상력을 꺼냈다.
“한데, 이것도 알 수 없는 일이오.”
“무슨 말씀이시오?”
“내게는 저렇게 말하긴 했소. 나는 들은 바를 귀국에 전할 뿐이지요. 한데, 이래놓고 대뜸 어느날 갑자기 10만 명이 칠중성에 총공세를 펼칠 수도 있는 게 아니겠소?”
“흥! 하면, 능히 감당할 수 있소.”
“응당 그럴 것이오.”
위정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물론,
‘미친놈.’
속내는 달랐지만 말이다.
“한데, 반대의 경우도 고려해보시오. 이는 단지 성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전투가 아니라 군왕의 신변과 직결하는 일이외다. 만일, 귀국이 패배하면 어찌 되오?”
성의 패배는 전투의 패배다.
왕의 패배는 일국의 패배다.
그리고 왕이 붙잡히면 모든 것이 패배한다.
“귀국은 응당 어떤 불이익도 감내하며 군왕을 향한 의리를 지킬 것이외다. 한데, 만에 하나 왕도에서 새로운 군주를 옹립하면 어찌 되오?”
“말이 과하시오?”
“가능성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오. 귀국도 군왕기를 쫓을 때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소?”
“······.”
“상대가 새로운 왕을 옹립했을 때 인질을 풀어주는 상상 말이외다.
당연히 했다.
태왕을 인질로 잡아서 고구려를 분열시키는 게 최상의 경우였다. 한데, 반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니 너무나도 끔찍했다.
김후직은 속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리되었다는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출병해서 달리다 보니 고립됐다.
더 한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의 분열을 유도하는 게 전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우리를 아예 무너뜨릴 수 있다.’
왕이 인질로 된다.
이는 같은 상황, 같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예 다르게 도출되었다.
이는 엄연한 국력의 차이였기에 너무나도 한스러웠다.
”모든 상황은 전하였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항복하면 세상이 평온하다는 것이오.“
”······.“
김후직은 손끝이 떨렸다.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지금은 왕고덕보다 위정이 백 배는 더 가증스러웠다.
“우리 황상께서도 신라가 적절하게 처신하길 바라시오.”
“······.”
김후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그냥 열이 뻗쳤다.
‘진 황제를 누가 신경 쓰는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신라도 이 정도의 파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중재가 아니라 고구려의 입장을 전하러 오셨소?”
“항복을 수용하면 내가 더 중재하지요.”
“되었소.”
“허. 그리하시오. 나도 더 말하지 않으리다.”
위정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신상담이라고 하였거늘.”
마지막까지 조소를 날렸다.
물론, 김후직은 답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신라의 병부령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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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다.
사실 가장 좋은 건 위정이 중재를 잘해서 신라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겠으나 나는 나름대로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어이 싸우겠다고 하였다.
아니, 이렇게 결의를 보일 거면 그때 나와 대화할 때 좀 들이박기라도 하지 그랬나 싶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하긴, 강자에게 약한 건 그들의 DNA에 충실한 것이었으니 어찌 의문을 가지겠는가.
그래.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머리 박은 것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기에 발생한 일이 아니겠는가.
신라의 김백정이라고 하여 다르겠는가.
다만, 우리가 귀찮을 뿐이다.
그래서 더 무리하기로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것인데 참으로 송구하오.”
“하하하! 아닙니다. 응당 나서야지요.”
내 앞에서 호탕하게 웃는 이는 바로 온달이었다. 그는 여전히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만일, 부르지 않았다면 참으로 서운했을 겁니다.”
정말 듬직했다.
“나의 주된 역할이 무엇입니까.”
“국내성의 대병이 당도하기 전까지 신라의 영토를 완벽하게 교란하는 것이외다.”
“하하하! 그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요.”
진심으로 걱정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신라의 왕도까지 점령할 기세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고구려 최고 정예군 3천을 이끌고 가는 겁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는 없지요.”
온달이 이끌고 갈 병력은 친위대 3천이었다. 그들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원래 이들은 을지문덕에게 전담시킬 생각이었으나 급한데 어쩌겠는가. 온달에게 맡겨야지.
아.
아니다.
큰일 날 뻔했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정확하게는 3,200명이지요.”
“이런. 큰 사달이 날 뻔했군요.”
추가로 보탠 200명.
이들은 바로 부월수였다.
그러니까 지부 상소하던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남진한다.
아니, 그들이 온달과 함께 친위대를 이끌고 약탈에 임하는 것이다.
“혹시 기회가 되어 신라 왕을 사로잡으면 어찌 합니까?”
“칠중성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데 어찌 잡을 수 있겠소이까.”
“어떻게든 도주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음. 그러면 최대한 사로잡아야지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적국의 왕은 죽이는 것보다 잡아서 부리는 게 더 좋은 법이니 말이오. 이는······.”
“하하하! 아닙니다. 나는 그저 전투만 하겠습니다. 복잡한 정치와 외교는 막리지께서 잘하시겠지요.”
“좋소.”
“어쨌든 결론은 사로잡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군요.”
“바로 그러하오.”
“알겠습니다.”
온달은 싱긋 웃으면서 움직였다.
그러더니 대끔 좋은 말을 했다.
“아. 문덕이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특별히 편애한다고 혹시라도 내가 오해할까봐 한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을지문덕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겠는가?
을지문덕, 그 넉 자가 바로 승리의 징표이니 말이다.
“그는 장차 고구려 최고의 무장이 될 것이오. 그러니 중히 써야지요.”
“이런. 막리지께서 사람 보는 눈이 아주 탁월하시군요.”
“을지문덕, 이름부터 최고가 아니겠소?”
“하하하! 농이 과하십니다. 솔직히 이름은 별로입니다.”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온달이 볼 때는 그런가 보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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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국운이 걸린 위기였다.
시간을 작게라도 허비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쟁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러한 사례는 무려 3번이나 있었다.
고구려 왕이 1명 죽었고, 백제 왕이 2명이나 죽었다. 그러하면 신라 왕이라고 죽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신라는 다급했다.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한 근왕군을 꾸렸다.
그런데
“법도도 모르는 사문난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미친놈들을 만났다.
“약탈은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해야 하거늘 어찌 왕의 친정으로 화답하는가!”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니라!”
“하하하! 우리가 법도를 뚫린 심장에 새겨주리라!”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데 기어이 미친 자들이었다.
“법도를 어지럽힌 너희는!”
게다가
“사문난적이니라!”
미친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