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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91화 (91/199)
  • 91화 역사란 무엇인가(2)

    91화 역사란 무엇인가(2)

    나와 고양성이 노발대발한 것과 별개로 이 시절 고구려와 신라는 숙적이긴 했다. 누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관계가 아닌 건 분명했다. 사실 애석하게도 전후 유효타는 신라가 더 많이 넣은 건 다 아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 전광판의 수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엄밀히 따질 때 고구려와 신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였다. 여전히 고구려는 대국이었으며, 신라는 생존의 하루를 살아가는 나라였다.

    되돌아보면 신라는 단독으로 당차게 고구려와 싸운 나라도 아니었다. 한강 유역을 확보할 때는 백제와 함께했고, 함경도로 진출한 건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인 결과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오래 점유하지도 못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최근 대륙을 향한 강렬한 외교는 고양성과 고구려의 자부심을 하늘까지 끌어 올렸다.

    이러한데 감히 신라 따위가 도발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 참으로 불쾌하도다!”

    고양성은 머리끝까지 화를 냈다.

    당연한 일이다.

    나도 화가 난다.

    “감히 신라 따위가 북상이라니! 우리가 남진하기 전까지 눈치나 봐야 할 역할에 불과한 비루한 무리가!”

    고구려와 신라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 오직 고구려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양성이 이렇게 흥분한 걸 처음 봤다.

    정말 불쾌한 모양이었다.

    다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화는 식힐 필요가 있기에 부득불 내가 나섰다.

    “이보게. 상황을 자세히 말해보게. 갑자기 신라군이 북진을 감행하다니? 아무런 징조도 없지 않았나? 음. 설마 일전에 사신이 문전박대당한 일로 그러나?”

    “그게 아니라······.”

    “하! 그때 막리지가 어디 틀린 말을 했소? 알이 여섯 개인지, 사람이 여섯 명인지도 알 수 없는 건국 따위가 중요하오? 닭알이나 먹으라고 하시오!”

    “과연 폐하이시옵니다. 닭알이 분명하옵니다!”

    나와 고양성이 광기까지 섞어 노발대발하자 연자유는 굉장한 속도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약탈에 대응한 것으로 보이옵니다.”

    이유라는 게 정말 가관이었다.

    고양성은 눈만 껌뻑였다.

    나도 눈만 껌뻑였다.

    말을 꺼냈던 연자유도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우리 세 명은 순서대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약탈 좀 했기로서니······.”

    “신라왕이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을 감행했사옵니다.”

    “하! 그게 사실이오? 친정?”

    “다시 말해보게. 친정이라고? 고작 1만으로?”

    “1만이면 신라의 최선이옵니다.”

    황당무계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에 우리 세 명은 헛웃음도 안 나왔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야 하기에 나라도 나섰다. 비록 했던 말을 정리하는 수준이었으나 뭐라도 해야 했다.

    “약탈을 좀 했기로서니 왕이 직접 움직이다니. 참으로 가벼운 나라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물론, 한강 약탈 전선에 투입된 약탈 부대가 2만 명을 넘어선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랑 닭이나 좀 잡아 오고, 시간 괜찮으면 신라인도 끌고 오는 약탈에 불과한데, 저들은 무려 왕이라는 자가 직접 오지 않았는가.

    “이건 법도가 아니옵니다.”

    “막리지의 말이 옳소. 하. 아무리 동방의 법도가 어지럽혀졌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무도할 수는 없소. 내가 부끄러워서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소.”

    “이 일이 어찌 폐하께서 부끄러워하실 일이겠사옵니까. 상대는 신라가 아니옵니까. 애초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사옵니다. 그들이 법도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평생 바닷가에서 낚시나 하고 살 무리이옵니다.”

    “답답하오. 참으로 답답하오. 아무리 그래도 동방에 속한 나라인데 저렇게 행동하면 내가 거란, 말갈, 고막해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소? 또한, 내가 체면이 서겠소? 마음껏 약탈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조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아니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소.”

    고양성은 정확한 핵심을 언급했다.

    첫 번째 약탈이었는데 신라가 이렇게 발작하듯 반응하면 눈치 보여서 제대로 약탈이나 하겠는가.

    정말 거란, 고막해, 말갈이 항의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나와 고양성이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이고 있을 때 침착함을 유지한 연자유가 나섰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우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자유가 다시 말을 꺼냈다.

    “신라의 무도함이 어디 하루 이틀이옵니까. 하오나, 지금은 저들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정확한 말을 했네. 그래. 저들이 어찌하고 있나? 아니지. 자네는 분명 신라가 창끝을 북으로 찔렀다고 했네. 설마 국경을 넘었다는 말인가?”

    “신라왕은 칠중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지 않는 듯합니다.”

    “응? 거기서 안 물러난다고? 하면, 지금 신라가 국경선에 1만의 대군을 배치했다는 말인가? 심지어 왕이 직접 와서?”

    “그렇습니다. 형님. 해서, 내가 신라의 창이 우리를 향한다고 한 것입니다.”

    “허. 약탈 좀 했기로서니 왕이 온 것도 황당한데, 이걸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가? 고작 1만으로? 미치겠군.”

    “돌아가는 상황은 그렇습니다.”

    “정말 무도한 무리로다.”

    이건 내가 들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 순수 고구려인들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아니, 이건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신라가 아닌 행동을 한 것이다.

    “참으로 이기적인 무리로다. 어찌 동방의 하늘 아래 저토록 심사가 꼬인 나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양성은 여전히 불쾌함을 터트리고 있었다.

    “내가 더 기분 나쁜 건 고작 1만을 이끌고 와서 친정이니 뭐니 떠들며 우리 영토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외다.”

    “그러하옵니다. 1만 명이면 우리 번국이 되려고 파닥거리는 거란족의 병력보다 부족하옵니다.”

    거란족의 총병력은 4만 명에 육박한다. 이번에는 한성 이주도 해야 하고, 첫 출병이기에 가볍게 내려간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더 마음이 아프오. 거란족은 필시 다음 약탈에는 전 병력을 동원하여 한수 이남도 가보려고 했을 것이외다. 한데, 신라가 저리 나오니······.”

    고양성은 다시 탄식했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되찾고 말을 꺼냈다.

    “어찌 되었거나 적의 수괴가 지척에 있소. 이를 그냥 체면이 말이 아니외다.”

    “폐하. 그건 곤란하옵니다.”

    “허. 막리지. 이를 그냥 두고 보라는 말이오?”

    “그게 아니오라 폐하께서 친정을 고려하셨사옵니다. 신은 확신하고 있사옵니다.”

    “당연히 그러하오.”

    “폐하. 이미 고구려는 번국을 두었사옵니다. 또한, 거란과 고막해는 번국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한데, 고작 신라 왕 따위가 왔다고 하여 폐하께서 응수하시는 건 참으로 가벼운 처사이옵니다. 체면이 더 떨어질 것이옵니다.”

    “말이 좀 이상하오?”

    “그럴 리가 없사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대군을 일으켜서 신라와 싸울 생각이었으면 이주시키지도 않았다. 대가가 무려 옥토 한강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우리 병력의 상당수는 농사 준비하느라 바쁘다. 신라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막리지. 일전에 내게 말하였소. 적이 1만으로 공격하면 5만, 10만으로 화답하는 게 국력이라고 말이외다. 나는 이번에 기어이 이를 봐야겠소. 아. 좋소. 친정은 안 할 테니 이참에 확실하게 보여주시오.”

    그 병사들이 지금 농사 준비하느라 바쁘다니까.

    나는 반대 의사를 꺼내기로 했다. 다른 수가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약탈은 번국의 일로 국한되어야 하는 법이다. 매번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다.

    “폐하. 신이 사료할 때······.”

    “폐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학궁을 흔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흘이었다.

    “신라군이 말갈국왕 돌지계를 추격하다가 우리의 영토를 범하였사옵니다.”

    아니,

    “폐하. 1만으로 공격해오면 5만, 10만으로 화답하는 게 바로 국세이옵니다. 신이 이번에 이를 입증하겠사옵니다.:”

    이러면 상황이 바뀔 수밖에 없다.

    영토를 범하는 건 침략이니 말이다.

    아무리 고구려가 침착하게 응대하려고 해도 저들이 이토록 비이성적으로 나오면 참을 수가 없는 법이다.

    아니, 다 떠나서 보는 눈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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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중성까지 북상하자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 흩어졌다. 굉장히 빠른 행동이었기에 처음부터 이곳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그래도 큰마음 먹고 기세 좋게 북상했는데 허무할 정도였다.

    하지만, 하늘은 마냥 야박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군왕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기병대가 뒤늦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위계는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고구려군의 퇴각은 일사불란하긴 했으나 모래성이 흩어지는 듯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랬는데 태왕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하여, 신라군은 기병을 꾸려 맹렬하게 추격했다.

    고구려의 영토를 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태왕만 사로잡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괴이한 건 몇 차례 전투가 발생했는데도 맹렬하게 도주만 했다는 것이다. 위계라고 의심이 들었으나 아무런 일도 없었기에 계속 추격했다.

    그러나

    “하! 이럴 수가 있나!”

    놓쳤다.

    김백정은 분통이 터졌다.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작전을 입안한 병부령 김후직은 죄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되새기면 정말 잡힐 듯 말 듯 도주하는 고구려 기병이었다. 창칼도 섞었다. 피도 봤다. 그런데 놓쳤다. 그래서 더 아쉬웠고, 면목이 없었다.

    “폐하.”

    “되었소. 이미 지나간 일이외다.”

    김백정은 일국의 군왕답게 작전의 실패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전투에서 대패하여 치명적인 손실을 입힌 것도 아니니 말이다.

    “철군 준비를 점검하시오.”

    엄청난 성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고구려군을 ‘격퇴’했고, 북진하여 태왕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만하면 친정의 결과물이라고 떠들어도 될 듯싶었다.

    어차피 철군 준비도 막바지였다.

    김후직도 더 반론을 펼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고구려 영토에서 전투를 펼치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의문인 건 대체 고구려는 어찌하여 2만이나 기병을 남진시켜서 약탈 따위나 하였는가였다.

    내내 이를 되새기던 김후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폐하. 이번 전쟁은 여러 가능성을 시사하옵니다.”

    “무슨 말이오?”

    “신이 사료하였더니 만일 고구려군이 주력으로 수만의 보병을 남진시켰다면 우리의 대 북방 방어책이 상당히 위험하였을 것이옵니다.”

    “······.”

    “기병으로 성과 성을 고립시킨 뒤 각개 격파하였다면 어찌 쉽사리 감당하였겠사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면, 병부령은 고구려가 대대적인 남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이번 격전은 전초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김백정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역시 이번에 느낀 것이 많았다.

    다른 무엇보다 일단 병력의 차이였다. 무려 2만의 기병을 선봉대로만 운영한 고구려의 역량과 왕이 친정하기에 온 힘을 다하여 1만을 출병시킨 신라는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다.

    만일, 고구려가 더 힘을 쏟아냈다면 5만 이상의 대군이 남하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고구려의 서부 전선이 더 요동쳐야 하오. 그래야만 한수를 넘보지 못할 것이니 말이외다.”

    “그러하옵니다. 우리의 방비도 중요하지만, 수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압박하는 게 더 중요하옵니다. 어차피······.”

    ‘어차피 신라는 고구려를 감당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김후직은 눈치껏 행동했다.

    물론, 김백정 역시 듣지 않아도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신라인 중 신라가 자력으로 고구려를 도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퇴각 준비는······.”

    “폐하!”

    불안한 외침이 들렸다.

    “고, 고구려군이 나타났습니다.”

    “뭐라······?”

    도주하다시피 했던 고구려의 대군이 나타났다.

    심지어

    “족히 5만은 되는 규모이옵니다.”

    전보다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저, 적이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칠중성의 지척이옵니다.”

    “뭐······?”

    “포위되고 있사옵니다.”

    “······.”

    “퇴각 준비로 인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시선은 당연하게도 이 모든 상황을 입안하였던 김후직에게로 쏠렸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5만의 병력이라면 순식간에 칠중성을 포위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왕 김백정이 적에게 포위되는 것이었다.

    모든 건 그야말로 찰나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하온데, 적이 협상을 요청했사옵니다.”

    “협상? 그게 무슨 말이더냐?”

    “막리지 왕고덕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고구려 평양계의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신라의 건국을 조롱했던 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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