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역사란 무엇인가(1)
90화 역사란 무엇인가(1)
고양성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눈도 몇 번이나 껌뻑거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렸고, 입도 삐쭉거렸다.
말은 안하고 이러기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폐하. 어찌하여 그러시옵니까?”
“아.”
“천하의 모든 기운이 고구려를 위하는데 근심이 있으시옵니까.”
“아니외다. 근심은 없소. 다만······.”
슬쩍 문서를 내게 내밀었다.
미처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고양성의 말이 이어졌다.
“농업 말이외다. 막리지가 그토록 강조하는 농업.”
“그렇사옵니다. 신은 농업을 아주 중시하옵니다. 하온데, 농업은 어찌 이르시옵니까.”
“농업부에서 이르길 ‘둔전을 폐지하고 친위대에 국한하여 정전제를 시행하는 게 옳사옵니다.’라고 하였소. 혹시 어렵소?”
농업부에서 올린 내용은 파격, 그 자체였다. 설마 여기서 정전제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로 이문진의 눈은 백성을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이 시절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건 민생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강렬한 연모였으니 가끔 엇박자가 나는 것이었다.
“막리지가 영 내켜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소. 한데, 나는 이 내용이 참으로 마음에 드오. 하면, 대체 이는 어찌 된 일이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잠시였으나 어지러워질 뻔했다.
나도 모르게 왼손 검지로 목을 살살 긁으면서 말했다.
“폐하. 오해가 있으신 듯하옵니다.”
“오해라고 하셨소?”
“정전제가 문제는 아니옵니다. 신이 내켜 하지 않은 건 다른 사유가 있사옵니다.”
“내가 오늘 막리지에게 할 말이 많소. 그러나 우선 들어보리다.”
정말 할 말이 많아 보이긴 했다.
그래도 내 말을 먼저 들어준다고 하니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폐하. 농업부의 방책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신이 주저한 건 과연 연속성이 있는가였사옵니다.”
“연속성이라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시절 가호당 최소 5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 친위대에 속하는 1인은 철저하게 군사 훈련만 한다. 나머지 4인이 경작을 하고, 새로운 시비법을 수급하는 역할까지 도맡는다.
이것이 이번 안건의 주된 골자로 한 마디로 그들은 국왕 직속의 친위대이며, 식솔은 농업부의 직원이 되는 것이다.
아예 새로운 개념이었기에 놀라웠고, 효과는 탁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 방책의 연속성을 어찌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친위대이기에 정전제의 구성원이 되옵니다. 한데, 그가 전사하면 어찌하옵니까? 유족은 그대로 땅을 경작하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새로운 인원을 추가했을 때 땅의 분배는 어찌하옵니까. 경작지가 무한한 것 아니옵니다.”
국가가 무상으로 땅을 분배한다는 발상은 이상적이면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물론, 친위대로 국한하는 것이었으나 이건 고구려 사회에 큰 충격으로 번질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로 창칼 들고 싸우는 이가 친위대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친위대는 1년 365일 창칼을 들고 다니기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객관적이고 냉정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러하니 이 논제를 먼저 해결하지 못하면 정전제는 고구려의 갈등 요소가 될 뿐이었다.
괜히 둔전이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전해진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하다 보니 내가 개혁의 반대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현대에서 왔는데 반대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친위대의 확장이 더디더라도 지금의 방침을 고수하는 게 옳사옵니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이 많다는 것이외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왜 반대만 하시오?”
“······.”
고양성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듣자니 의술의 확대도 막리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하오.”
이건 이문진이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역병을 차단하는 영역은 대비하다 보니 다른 건 왜 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내가 말하기도 했다. 반대했다고.
“다 합당하오. 정전제와 의술. 막리지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 타당하오. 한데, 그래서 행하지 않으면 되오?”
“폐하······.”
“기어이 해야 할 일이외다. 백성이 아프지 않고 오래 살아서 먹일 식량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했소? 막리지.”
고양성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와는 달랐다.
압도적이지 않았으나 사람을 지배하는 위엄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내가 막리지의 말을 부정하지 않소. 맞소. 가장 중요한 건 백성이 아니라 패권이외다. 백성의 삶을 챙기는 건 당대의 고구려가 품기에는 사치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과거의 나라면 이리 답하였을 것이오.”
“폐하.”
“농업을 일렀소. 농자천하지대본을 일렀소. 군량도 허덕이던 나라를 벗어나고자 나아가는 중이외다. 여기에 어찌 백성이 없을 수 있소?”
“······.”
“정녕 잊으셨소?”
내가 무엇을 잊었나?
아니다.
나는 잊은 게 없다.
“누구도 의술을 말하지 않았소. 한데, 농자천하지대본을 고구려가 품으면서 이문진이 말하였소. 왜? 이제 준비해야 하기에 그러하오.”
“······.”
“의원을 구할 수 없다고 하셨소?”
고양성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고요하고 거대했다.
“그걸 왜 고민하오? 누군가는 할 것이외다.”
“······.”
“글자를 안다고 하여 모두가 출사하고, 농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막리지만의 오만이외다. 누군가는 의원의 길을 걸을 수 있소. 한데, 이 인력조차 아깝다는 건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최소한 그 선택이 고구려의 국익에 어긋나지 않다면 열어주는 것도 옳소.”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정전제도 마찬가지외다. 사후 토지의 분배가 고려된다면 대대로 직역을 책임지게 하는 방법도 있소. 한데, 막리지는 어찌하여 대안을 내기 전에 반대하여 좌초시키는 것이오?”
생각이 많아졌다.
나와 고양성은 분명 함께 걷고 있거늘 어찌하여 도출하는 과정과 결론이 다른 것일까.
“막리지의 말이 옳소.”
내 말도 옳고
“한데, 이문진의 말도 옳소.”
이문진의 말도 옳다.
그리고 고양성의 결론은
“나는 두 가지를 중재해야 하오. 이것이 정치가 아니겠소?”
정치라고 한다.
“과거 막리지는 늘 타협하고 중재하며 해결책을 모색하였소. 한데, 농업을 집행하면서 어찌하여 늘 독선에 빠진 것이오? 나는 이를 이해할 수가 없소.”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나는 정치를 모르니까.
아니, 모른다고 하여 그리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지, 모른다는 말이 모든 걸 설명하거나 절대적인 방패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큰 틀의 역사를 알기에 매몰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현대인이기에 내가 옳다고 자만한 것일까?
아니면 역사를 알고, 특출난 능력이 있기에 오직 나만이 고구려가 걸어갈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일까?
그래.
어쩌면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 아니 오만.
원 역사의 고구려보다 더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 수 있다는 오만.
바로 이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내가 농자천하지대본을 꺼내기 전에는 고구려였다. 그런데 내가 농업을 부르짖으면서 이 나라는 고구려인가? 고구려이되 내가 아는 그 고구려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지 않을까······?
그래.
아니다.
이 나라는 고구려이지만 더는 한국사에서 영원히 빛나던 그 고구려가 아니다.
그리고······나 역시 현대인이 아니다.
나는 이곳의 막리지 왕고덕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역사는 이미 틀어졌기에 확신의 흐름이 아니다. 그래. 나는 역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러한데 나는 이토록 많은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고 기어이 일궈내려는 역사의 흐름을 내가 아는 고구려사와 일치시키고 있었다.
이미 아니건만 그리하고 있었다.
이는 오만이 아니다.
그저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새로운 역사가 이뤄지고 있다.
아니, 아니다.
새로운 역사가 아니라 그냥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이야기 속의 나라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현실이지 않은가.
그러한데 나는 내가 시대의 선지자처럼 행동했다.
농자천하지대본에 발맞춰서 변화의 물꼬를 틀고자 고민하는 이 나라의 고민을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기나 했다.
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말인가.
내가 저들보다 대체 무엇이 뛰어나다고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하자.
작금의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바라보는 건 나 혼자 나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고정의가 거란과 고막해를 설득했고, 온달이 수나라 대군을 격멸했으며, 연자유가 내정을 총괄하며, 이문진이 농법을 일으켰고, 고양성이 중심을 잡았다.
더 있다. 평강공주, 을지문덕, 가서일, 고식, 고흘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고구려인들. 셀 수도 없는 이들이 달려나가며 만들고 있는 게 바로 오늘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데, 나는 어찌하여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참으로 못났다.
내가 말이다.
이렇게 오늘 나는 드디어 깨닫고 말았다.
나는 이곳에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말했다.
“되돌아보았사옵니다.”
고개를 들어 고양성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위엄은 사라지고 포근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가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다음 달에 과거 시험을 치르면 어떠하겠사옵니까.”
“다음 달이라고 하였소? 허. 너무 촉박하지 않겠소?”
“소수라도 꾸리면 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첫 시작이 꼭 성대할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이런. 내가 실언했소. 하하하! 내가 실언했소이다.”
“혹시 역사에 길이 남는 첫 번째 과거 시험을 품으신 건 아니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신은 참으로 난처하옵니다.”
“하하하! 실은 그 생각을 해보긴 했으나 내가 어찌 욕심을 내겠소이까.”
이제 본론을 꺼낼 때다.
나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정전제 그리고 의술. 모두 이문진의 초안을 집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초안이라고 하셨소?”
“아. 이번에는 신이 실언했사옵니다. 가장 합당한 방도를 찾아내겠사옵니다. 그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사옵니까?”
“하하하. 그렇소. 이러니 이제 막리지답소.”
더 나은 고구려는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의 걸음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게 더 나은 고구려로 가는 길이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였다.
“폐하.”
연자유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상당히 중요한 사안으로 추정되었다.
“왜 그러시오? 변고라도 터졌소?”
“신라군이 전쟁을 일으켰사옵니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이오?”
정말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아주 실망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양성을 바라봤다.
“백제가 참으로 고달프겠사옵니다. 안 그래도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는데 말이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외다. 그래도 양국이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앙증맞고 그렇소.”
“하하하! 토닥토닥하며 잘 싸우긴 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옵니다.”
연자유의 말이 이어졌다.
“본국을 향하여 창을 겨누었사옵니다.”
“······.”
“······.”
고양성의 볼이 씰룩였다.
내 볼도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