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북방의 법도
89화 북방의 법도
쟁투의 역사를 고려할 때 평지에서는 전 병력의 2할을 기병으로 하며, 산악에서는 1할로 했다.
이리한 건 기병을 확보하는 게 어려운 것도 있으나 보병의 도움을 받지 않은 기병의 활약이라는 건 명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면전이 발생했을 때 보병이 없는 오직 기병으로 이뤄진 병력을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아니, 쉽지 않으나 병력의 절대적인 차이가 있기에 그러했다.
선봉에서 보병방진과 중장기병으로 압박하면 기병의 돌격을 제압할 수 있다. 그 즉시 후방에서 쇠뇌병이 공세를 펼치고 어지러울 적의 측면을 경기병으로 제압하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방법을 취하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적의 규모가 고작 2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상상했다.
비루하게 무릎을 꿇은 고구려의 태왕을.
물론, 목표에 미달할 수는 있다.
그래도 상상할 만했다.
차갑게 식은 고구려 태왕의 수급을.
이 모든 건 한수 땅에서 수백 년간 이어진 쟁투의 역사는 마침표가 찍힐 것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쾌거가 아니겠는가. 하여, 상상만으로도 기뻤다.
그랬다.
그랬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현실은 상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정말로 아예 달랐다.
김백정은 당혹감을 숨기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상황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말하다가 말문이 막혀서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김후직도 멋쩍은 표정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그 역시도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싸우다가 물러난 것도 아니오. 대군이 몰아친 것도 아니었소. 고작 100여 기의 기병을 노출하여 유인하고자 한 것이외다. 그런데 보자마자 퇴각하는 게 말이 되오? 심지어 태왕이라는 사람이? 이게 말이 되오?”
한 끗 차이었다.
고구려 태왕이 달려오기면 하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보자마자 사라졌다. 애초 전투 의지가 없어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퇴각했다.
“아니, 이건 퇴각이 아니라 도주요. 도주.”
말을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되새길수록 황당했다.
“······아군의 매복을 눈치챘다고 볼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셨소?”
심지어 아차산성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진행한 작전이었다. 누가 봐도 아차산성에서 뛰쳐나온 병력으로 보이게 했다. 물론, 이 모든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이리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
사실 이번 작전은 원군의 등장이 파악하지 못할 때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이미 실패했고 1만에 육박하는 정예군은 머지않아 포착될 것이다.
“하지만, 폐하. 날랜 기병을 꾸려 추격하게 했사옵니다.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야지요. 그리고 모든 성에 사람을 보내어 적의 이동 경로를 일제히 차단하라고 하시오.”
1만의 대병이 당도했기에 더는 성에서 숨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김백정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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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약탈을 감행하던 거란족 부족장들은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허······.”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일이외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오?”
“실로 어처구니가 없소이다.”
“아니, 이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오?”
“신라는 실로 괴이한 나라가 분명하오.”
“남들에게 욕 듣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외다.”
분명 신라의 영토에서 약탈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분통을 터트리며 신라를 규탄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했다.
“아니, 변방에서 약탈 좀 했기로서니 왕까지 올 일이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이러면 대화를 할 수가 없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외다. 약탈하면 사신이 와서 협상도 하고, 교류도 하고, 이것저것 받고 잠시 중단해주고. 이리하는 게 유구한 법도 아니겠소?”
“그런데 발작하듯 왕이 달려오면 뭘 어쩌란 말이오?”
“참으로 야박하오.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사겠다는 심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누가 보고 들어도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신라라면 치를 떠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소.”
“대화 좀 하자는데 때 칼이나 꺼내는 나라와 어찌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겠소?”
“하. 이건 진짜 아니오.”
“그렇소. 이는 진짜 아니외다. 이러면 약탈하지 말라는 말이외다.”
“아니, 약탈하지 말라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천년을 이어온 북방의 법도이거늘.”
“여긴 동방이라서 그런가 보오.”
“동방 인심은 참으로 형편없소.”
“고구려도 동방인데 어찌 신라는 저러오?”
“신라는 너무 동방이라서 그런가 보오.”
신라의 행동은 너무나도 법도에 어긋나고 저열했기에 규탄 대회는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 그나저나 이제 어찌할 건지 명확하게 정해야 하오.”
특히 이번 약탈에 큰 기대를 했던 막하불이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었고, 오적은 이를 되새길수록 쓴웃음만 새어 나왔다.
‘동방의 질서가 이러한지 고구려가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동방의 패자로 군림하는 고구려가 아닌가. 그러한데 신라가 약탈에 발작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모든 건 고구려의 철저한 계산이었다는 게 결론이었다. 물론, 이를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거란의 주도권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 괜한 말을 보태어 고구려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우매한 짓이다.’
판단이 빠르다는 건 관계 설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될 일이었다.
“길게 고민할 필요가 있겠소?”
돌라의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약탈은 어디까지나 약탈에 불과하오. 적의 군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약탈이 아니지요. 이는 오랜 세월 이어진 관례이니 이견은 없을 것이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법도를 언급하였다. 여기에 보태듯 한 마디를 더 꺼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나는 게 아니오. 사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소?”
사실 왕이 친정하였다면 대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더욱이 신라 최고의 정예군일지니 겨루자면 지금까지 한 것처럼 편하게 말을 타고 다닌 약탈이 아니라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
승패를 장담할 수도 없다.
머리 아프게 작전도 수립해야 한다.
돌라의 말은 이 모든 걸 함축하고 있었다.
모두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오늘만 날이 아니지요.”
“회군하지요.”
논의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마무리되었다.
늘 그렇듯 하던 대로 행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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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에 진입한 김백정은 그냥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구려의 태왕은 정말 미친 속도로 사라지고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냥 어지러웠다.
“이게 뭐요······?”
무려 1만의 대병을 이끌고 여기까지 ‘직접’ 왔다. 오만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여 왕권을 더 안정시키고 신라의 위상을 동방 전역에 떨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저들은 왜 퇴각하는 것이오?”
고구려군이 그냥 물러났다.
일제히.
종횡무진 날뛰던 적을 고사시키고자 모든 성에서 성문을 열고 나오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제대로 집행도 하기 전에 물러났다. 물론, 싸우지 않고 적이 물러났으니 좋은 일이다.
한데, 지금 신라는 왕이 친정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과물이 너무 엉성했다.
더 나아가 어쩌면 고구려 태왕을 제압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펼쳤기에 허망함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폐하.”
김후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적이 다시 칠중성에 결집하고 있사옵니다. 아마도 공성전을 시도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
“하. 내 말이 정말 그렇소. 아니, 보시오. 공성전을 펼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하면 되었소. 한데, 여태껏 말 타고 달리기만 하다가 내가 오니 희롱하듯 공성전을 도모한다? 이게 말이 되오?”
전혀 말이 안 된다.
정말 그리한다면 전술을 모르는 수준이 아니다. 그냥 고구려군이 아예 미쳤거나 김백정의 말대로 희롱하는 것이다.
“하. 그래요. 본국의 건국까지 조롱하였던 무도한 무리이니 그리할 수도 있을 것이오.”
김백정은 이미 감정적이었다.
“만약에 이대로 퇴각한다면 어찌 되오? 우리는 정말 조롱만 당한 것이오. 고구려는 그저 ‘툭’하고 건드려본 건데 화들짝 놀라서 왕이 친정까지 한 것이외다. 하!”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어떤 경우의 수라도 정말 최악이었다.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를 다른 장수들이 느끼지 못하겠는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군왕의 친정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김백정이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 당연했다. 고구려의 행보가 참으로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게 하였기에 만류할 수도 없었다.
물론, 만류하지 않을 뿐 대안을 내는 것이 신하의 일이었다. 김후직은 병부령답게 이 일을 타개할 방책을 꺼냈다.
“폐하. 신이 고려해봤사옵니다.”
“무엇이오?”
“일단 칠중성까지 진군하셔야 하옵니다.”
군왕의 행보는 무겁다.
만일, 1만의 대병을 이끈 왕이 최전선까지 간다면 방어를 위한 친정은 의미가 달라진다. 군사, 정치,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아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북진의 의지라도 펼치셔야 하옵니다.”
북진을 담아내고 있기에 그러했다.
김백정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그라고 하여 어찌 북진하여 적을 궤멸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건 그저 상상의 나래에 불과했다. 애석하게도 신라는 칠중성 이북으로 진군할 국력이 없었다.
넘는 순간 궤멸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신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칠중성까지 순회하듯 다녀오면 현재 상황에서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었다.
그러한데 김후직이 이를 제안한다면 명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김백정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병부령은 나를 이해시켜줘야 할 책무가 있소.”
“복잡하지 않사옵니다. 적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가늠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오나, 적어도 칠중성의 포위는 우리가 무너뜨리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옵니다. 그래야만 이어질 폐하의 행보가 합당하게 되옵니다.”
“합당하게 된다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만일, 전투가 발생하여 물리치면 가장 좋은 것이며, 적이 전처럼 허망하게 퇴각하면 추격이라도 해야 하옵니다. 비록 고구려의 영토라고 할지라도 말이옵니다. 한 마리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땅을 밟게 해야 하옵니다. 그래야만 친정이 합당하게 되옵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간단한 판단이 아니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폐하. 어차피 선수는 고구려가 취했사옵니다. 하면, 마지막은 폐하께서 이루셔야 하옵니다. 신은 진실로 이리 여기고 있사옵니다.”
너무나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백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칠중성으로 북상하겠소. 또한, 모든 성도 화답하라고 전하시오.”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