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한강 쟁탈전(3)
88화 한강 쟁탈전(3)
고구려군이 쉽사리 남진을 감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신라의 관방 체계는 분명 탁월했다. 고개를 돌리면 산성이 배치되어 있었고,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뛰어난 방비책이었다.
이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신라는 확신해왔다.
하여, 신라는 확신해왔다.
고구려가 전처럼 도발적인 공세를 펼치기 부담스러울 것이기에 오랜 세월 한수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는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분명, 신라의 관방체계는 훌륭했다.
그러니까 ‘성’을 중심으로 한 방비책‘만’ 훌륭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공세는 성을 공격하고, 성을 점령하여, 땅으로 이동하여 다시 성을 공격하고,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아니, 이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수백 년간 이어진 쟁투의 역사가 모두 그러했다.
그러하니 고구려라고 하여 어찌 다르겠는가.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파상적인 공세는 쟁투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성을 도외시하고 땅을 내달리는 수만의 기병은 보급선 차단의 가능성을 과감하게 치워버린 법칙을 완벽하게 벗어난 행위였다.
분명, 보급선을 차단해야 하는데 신라의 병력은 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방책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나아간들 종횡무진 내달리는 기병을 상대하여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 번의 패배가 성의 궤멸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쟁투의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구축되었던 신라의 대고구려 관방체계는 하나의 성을 점령하지 못했을 때 기병이 남진하지 못하게끔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지 않았다.
애초 그런 역사가 없었기에 고민의 흔적도 없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상 자체를 어찌 모르겠는가.
기병의 행위는 분명한 ‘약탈’이었다. 일국의 장수들이 어찌 약탈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땅 쟁투의 역사에 무려 2만의 기병이 약탈‘만’을 일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의 부족함이 아니었다.
기병의 행위 자체가 괴이한 것이었다.
결과, 단 며칠 만에 기병이 땅과 땅을 지배하였고, 성과 성은 철저하게 고립됐다.
칠중성 성주는 핏발 선 눈으로 포위한 적을 노려봤다.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무려 1만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 일국의 막리지라는 이가 어찌 전쟁을 이렇게 저열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분통이 터졌다.
이미 결사를 각오했거늘 저열한 고구려의 막리지는 이조차도 박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성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었다. 1만의 기병을 상대하기에는 애초에 병력이 너무나도 열세였다. 심지어 적의 군기는 한눈에 보더라도 엄중했다. 정예군이 분명했다. 그러한데 어찌 틈을 보고 공세를 펼칠 수 있겠는가.
감정적으로 섣불리 싸우는 건 자멸의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였다고 할지라도 패배가 자명한 공세를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노려보면서 욕하고 숨을 쉬는 것밖에 없었다.
“장군. 밖의 사정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다.
칠중성을 점령하는 게 아니라 포위한 것만으로도 고구려의 기병이 남쪽을 마음껏 짓밟을 수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2만의 기병이라 하면 일국의 역량을 총동원한 것이다. 그러한데 어찌 이렇게 허비할 수 있는가.”
그랬다.
그토록 엄청난 역량을 쏟아내어 하는 짓이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다. 힘이 넘쳐서 대충 휘두른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고구려가 2만의 기병을 그냥 집어 던질 정도로 국세가 강성했던가.
아니다.
고구려가 강성할지라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태왕과 막리지가 출병하였다.
이는 또 역량을 집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성주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무엇 하나 명쾌하게 정리되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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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지계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땀이 흐를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쉬지 않고 뻘뻘 흘렀다.
말갈국의 기병은 며칠째 신라의 촌락을 모조리 짓밟았다. 이미 약탈을 감행하지 않고 있었다. 보이는 신라의 존재를 모조리 짓밟을 뿐이었다.
그의 핏발 선 눈은 어떤 각오로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아직도 돌라의 오만함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만일, 그때 아회씨가 거들지 않았다면 너무나도 비루하게 숨만 쉬었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말갈국의 국세를 키우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부지런히 약탈을 감행해왔다.
하지만, 이러한들 거란족을 앞설 수는 없다. 이미 10배의 차이가 있는 세력 균형을 어찌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늘 조롱당하고 무시당할 게 뻔했다. 과거라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돌지계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철저하게 고구려군이 되는 것이다.’
호가호위가 아니었다.
최고의 군공을 세워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하면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길은 고구려 귀족 질서에서 가장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게 옳았다.
근거도 명확했다.
‘왕고덕과 고정의의 개인 세력이 거란족보다 강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히 함부로 하였던가. 아니다. 그들이 곧 고구려이기 때문이니 그러한 것이다.’
지금처럼 허울뿐인 막리지가 아니라 진짜 막리지의 권위를 갖고자 한 것이다.
그래야만 말갈국을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돌지계는 약탈이 아닌 철저한 파괴를 감행한 것이다. 신라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준 병력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느새 새로운 촌락이 보였다.
돌지계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최대한 타격을 줄 것이다. 이 땅에서 신라가 재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우고 죽여라.”
전방위적인 공세만 퍼부을 생각이었다.
죽이고 이동하고, 불태우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이 땅에서 신라가 다시 소생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이 길에 대해 확신했다.
‘이리하는 게 옳다. 우리 말갈이 비록 소수지만 거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을 세우는 것이다.’
돌지계는 다시 외쳤다.
“신라의 숨통을 확실하게 쥐어짤 것이다.”
목표는 신라 대북방 관방체계의 심장부, 아차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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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은 화살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방으로 교통이 이어졌기에 정보의 취득이 빠른 건 당연하거니와 틀어막고 있으면 누구도 남진할 수 없기에 북방을 향한 화살과도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고구려만이 그러한 게 아니었다.
만일,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유한다면 남쪽의 신라 역시 북상할 수가 없다. 이곳은 마치 호리병의 입구와도 같았기에 아차산성을 도모하지 않고는 나아갈 수가 없다.
즉, 아차산성은 한수 이북의 패권을 좌우하는 요충지이자 상징적인 거점이었다.
누가 이곳을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한수의 주인을 논할 수 있었다. 하여, 이 땅의 눈과 귀는 아차산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뺏으려는 자도 최선을 다할 것이며, 지키려는 자도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바로 이곳에 고구려군이 출몰했다.
“허.”
성주는 황당했다.
북방의 정세가 전과 달리 어지럽다고 할지라도 이토록 저돌적인 기세로 남하할 줄은 몰랐다.
“아직 함락당한 성이 한 곳도 없는데 아차산성으로 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적은 지척에 이르렀다. 심지어 무려 군왕기까지 휘두르면서 말이다. 이는 위보나 위계가 아니었다.
그러하니 그저 황당함에 헛웃음만 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비라는 걸 해야 했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차산성을 고구려가 점령하면 우리는 당항성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수나라, 진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되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사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한데, 고작 2천 기 남짓한 기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복잡하다.
적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한 가지였다.
“태왕이 왔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
“물리치면 그만이다.”
아차산성은 북방의 현성과는 규모와 병력 등 모든 준비 태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요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출병을 준비하라.”
고작 2천의 기병이다.
그러면 보병 방진과 중장기병 그리고 쇠뇌병과 경기병을 적절하게 조합하면 능히 압살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장군!”
파발이었다.
그런데 아차산성의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폐하께서 지척에 당도하셨습니다.”
중앙군의 장수였다.
성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거 잘하면 태왕의 수급을 취할 수 있겠군.”
초유의 대승을 거머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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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령 김후직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이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담아낸 것이다.
“폐하. 급보이옵니다.”
“급보? 무엇이오?”
“고구려의 태왕이 아차산성의 지척에 이르렀다고 하옵니다.”
“허.”
김백정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보고된 북방의 정세가 일목요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고구려가 함락한 성은 없소. 하면, 무작정 돌격했다는 것이오? 태왕이라는 자가 아차산성까지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아차산성을 끊어내면 우리의 숨통을 겨눈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리 무모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기병 2천 기에 불과하옵니다.”
이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미친 짓이었다.
“······.”
김백정은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김후직만 쳐다봤다. 고개를 살짝 뒤틀며 말했다.
“위계의 가능성은 없소?”
“없사옵니다. 오직 2천의 기병이옵니다. 아차산성에서 이토록 중대한 일을 가볍게 파악했을 수는 없사옵니다.”
“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해할 필요도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적의 군주가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2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말이다.
“폐하. 하늘의 뜻이 우리 신라로 향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사옵니까.”
김후직의 말이 이어졌다.
“백제에 이어서 고구려의 왕도 우리가 도모하는 것이옵니다.”
오만한 고구려의 왕을 죽일 수 있다.
김백정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죽일 필요는 없소.”
그의 말은 다소 결이 달랐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고구려는 오랜 세월 내전을 치른 나라요. 작금의 태왕도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 내전이 발생했소.”
“그러하옵니다. 하오시면 폐하의 뜻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떠올랐다.
“그렇소. 만일, 우리가 생포할 수만 있다면 고구려는 거대한 내전이 발생할 것이외다.”
확신했다.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적에게 사로잡힌 무능한 왕에 대한 공격. 이 모든 건 오랜 세월 이어진 갈등에 불을 붙일 것이외다.”
“과연 그렇사옵니다. 여차하면 고구려가 아예 분열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평양과 국내성으로 말이옵니다.”
“그건 실로 축복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