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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87화 (87/199)

< 87화 한강 쟁탈전(2) >

87화 한강 쟁탈전(2)

신라의 외교는 참으로 기묘했다.

고구려와는 적대국이었다.

백제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기에 왜국과도 적대관계였다. 육지와 바다로 국경을 마주한 모든 나라가 적이었다.

유일하게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바다 너머의 나라들이었다.

그래서 한수는 신라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만일, 한수를 상실하면 신라의 세계에는 적대국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일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하여, 신라는 국력을 기울여서 한수 유역을 방비하고자 했다. 가장 중시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고구려의 남진을 경계하기 위한 관방 체계를 빼곡하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성인 아차산성,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군성인 대모산성, 반월산성을 구축했다. 동시에 현성이 빼곡하게 뒤따르는 방사선 형태였다.

이중 대모산성의 현성인 칠중성은 고구려가 남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최고의 요충지였다.

만일, 칠중성을 점령한다면 고구려의 대군은 설마치를 통과하여 단번에 아차산성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차산성이 무너지면 한수 전역에 위태로운 것이니 칠중성의 중대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규모로는 고작 현급의 산성이었으나 신라의 북방 방어체계에서 핵심적인 거점이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칠중성을 중심으로 신라의 대고구려 방위체계가 동서로 나뉘는 구조였다. 즉, 칠중성이 공격당하기만 하더라도 신라의 방위 역량은 동과 서로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중요한 칠중성에 고구려의 2만 기병이 등장했다. 그러니 신라군이 느끼는 위기감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고구려군이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려 태왕과 막리지가 2만의 기병을 이끌고 나타났으나 말이나 타고 고을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그러하다 보니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 신라는 지속하여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라······?”

이상한 말이 들렸다.

칠중성의 서쪽 오두산성의 성주는 자기 귀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부관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고생이 많군. 한데, 나는 쉬어야 할 것 같네.”

“자, 장군. 쉬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적군이 나타났습니다.”

“음. 적이라. 대체 왜 적이 나타났는지 내게 말해주겠나?”

“예?”

“적은 칠중성을 포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한데, 여기에 어찌 나타날 수 있나? 설마 우회하였다는 말은 하지 말게. 수만의 대군을 동원했는데 성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소, 소인이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천 기의 기병이 수백으로 분군하여 칠중성에서 여기까지 이르는 길목의 촌락을 모조리 약탈하고 있습니다.”

“······.”

성주는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고구려군은 칠중성의 성벽에 손 한 번 대보지 않고 우회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아군의 반격이 시작되면 보급로가 차단될 수밖에 없거늘 왜 그런 미친 짓을 한다는 건가? 고구려군이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한데, 고구려군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또 무슨 말인가? 하면, 백제군이 배를 타고 상륙하여 북쪽에서 부지런히 내려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거란족입니다.”

“······.”

“분명 거란족의 깃발이······.”

“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성주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거란족이 어디서 나타난다는 말이더냐!”

“하지만 분명 거란족이었습니다.”

“허······.”

“거란족이 배를 타고 온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배를 타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명령은 내려야 했다.

“전군에 일러 전투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게. 언제라도 적이 성을 공격할지 모르니 말일세.”

“그리하겠습니다.”

“자네는 내 말에 대꾸하지 말게.”

“네.”

“하.”

정말 짜증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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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탈고 달리는 돌라는 도무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인이 쳐다본다고 할지라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최근에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칠중성 외곽에서 말갈국, 고막해부와 결합한 직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원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갈의 2천 기병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약탈하기에 딱 적합했다. 고막해부가 결합한 뒤 칠중성을 압박하니 더 상황은 좋았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거란족의 기병이 결합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애초 세력의 규모 자체가 달랐기에 칠중성 주변을 깨작깨작 약탈하는 정도가 성에 찰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칠중성 일대 자체가 너무 협소했다. 2만 마리의 말이 달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니 약탈 범위를 더 확장해야 했다. 그러자면 칠중성을 넘어야 했다.

우회할 것인가 점령할 것인가.

여기서 의견은 첨예하게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돌지계와 아회씨 그리고 거란족의 부족장들이 모두 모였다. 어쨌거나 투입된 병력만 무려 2만여 명이었으니 정확하게 논의해야 했다. 생각이 다를지라도 가는 방향은 같으니 역할도 나눠야 했다.

모두 모이자 위계상 서열이 가장 높은 돌지계가 말을 꺼냈다.

“우선······.”

그러나 그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길게 논의할 게 뭐가 있겠소.”

돌라가 말을 자르며 나섰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칠중성을 넘어야 하오. 그래야만 성과를 낼 수 있지 않겠소?”

게다가 돌지계를 쓱 쳐다보더니 코웃음까지 치며 말했다.

“수백 개의 촌락이 있는 칠중성 이남을 약탈해야 어떤 성과가 날 것이외다. 이렇게 사람 몇 명, 소나 닭 몇 마리를 구해서 어디에 쓰겠소? 우리 거란은 깨작깨작 약탈하지 않소.”

대놓고 말갈을 깔보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말을 제지하는 거란족 부족장은 없었다. 내부에서야 치열하게 다퉜으나 대외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거란족의 누구도 말갈보다 자신들이 아래라고 여기지 않았다.

거란족의 부족 중 가장 약세에 해당하는 다미의 부족이 말갈국의 세력과 비슷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말갈보다 뒤처진 현실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돌지계의 안색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점령할 것인지 우회할 건지를 정해야 할 것이오. 한데, 우리의 주된 목적인 당장 영토 확장을 하려던 것도 아니외다. 강도 높은 약탈을 단행하는 것이었소.”

“말을 참 복잡하게 하시오? 그냥 우회하면 되오.”

이를 빤히 지켜보던 아회씨가 턱을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돌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가 같은 말을 한 것이오.”

“아오. 근데 복잡하다는 말이오.”

“허. 작전을 수립하려면 전후 상황을······.”

“됐소. 어차피 신라군은 성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오. 이대로 포위하면 남진에 아무런 지장이 없소. 내 말이 틀렸소.”

“하. 좋소. 그래. 그 포위를 귀공이 할 것이오?”

“내가 원래 압박했소. 근데 이참에 제대로 포위하리다.”

“뭐요······?”

거란족이 결합하기 전에는 고작 2천에 불과한 말갈이 칠중성을 포위할 수가 없다. 그러니 아회씨가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병력의 규모가 두 배나 늘었으니 계산은 달라져야 했다.

그런데도 하던 역할을 그대로 하겠다고 나서니 돌라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금 전까지 보였던 오만한 태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하하하!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니겠소?”

아회씨는 호탕하게 웃었다.

‘너희가 영주에서야 거란이지 여기서도 위세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참으로 우스웠다.

어차피 칼자루는 고구려가 쥐고 있다. 그러자면 최대한 그들의 사고로 움직여야 했다. 현재 가장 고구려다운 행동은 친말갈정책이다. 물론, 대놓고 편을 들 필요는 없다. 이렇게 거란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 언제라도 발을 빼야 할 공간은 마련해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회씨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한데, 거란족은 누구와 대화를 나눠야 하오? 아직 내부 정리가 안 된 것 같구려. 이러하니 겸상할 수가 없지 않겠소이까?”

“뭐요······?”

“거참. 내가 말해야 하오? 나는 고구려 고막해부의 막리지외다. 한데, 공은 무엇이오? 아. 혹시 부족장이시오? 아직?”

돌라의 안색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막리지를 운운하는 아회씨와 다툰다는 건 고구려의 태왕에 대한 반기로 읽힐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참아야 했다.

어차피 다른 부족장들은 거들 생각도 없으니 말이다.

*****

생각을 거둔 돌라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좌우를 돌아보니 이미 온 사방이 불길이었다. 거하게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가뜩이나 기분도 별로였기에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모조리 뺏어라! 반항하면 죽여라!”

계속 부르짖었다.

“사지 멀쩡한 놈은 모조리 포로로 데려갈 것이니라!”

사람이 살려면 화를 낼 곳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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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 동쪽에는 수철성이 있었다.

고구려군의 남진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긴 했으나 칠중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없었기에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왕도에서 대군이 당도하여 반격할 정도로 시간은 넉넉할 것이다.

분명 그랬다.

그러나 지금 수철성 성주의 안색은 짜증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고작 2천 기의 기병을 어찌하지 못하다니······.”

고구려는 광기에 물든 게 분명했다.

칠중성을 그대로 두고 남진한다는 건 보급선을 고려하지 않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이른 군세는 무려 군왕기까지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태왕과 막리지가 2만의 기병으로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런데 성은 도모하지 않는다.”

결국, 주력군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병이 2만이니 최소한 5만은 넘는 병력이 예상되었다.

그러니 보급선이 잠시 위험할지라도 칠중성 남쪽을 거칠게 압박하는 게 분명했다.

태왕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사실 몇 번이나 유혹을 참아냈다.

이대로 나아가 태왕의 수급을 취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계책일지도 모르기에 기본 방침대로 성을 수성하기만 했다.

그래도 되었다.

어차피 고구려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폐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셨다. 패악질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잠시만 수모를 참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대반격을 할 것이니 말이다.

< 87화 한강 쟁탈전(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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