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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86화 (86/199)

< 86화 한강 쟁탈전(1) >

86화 한강 쟁탈전(1)

굳이 말로 옮길 필요는 없었다. 애초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말갈의 세력은 거란, 고막해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실로 그러했다. 고작 1할이었으니까.

말갈국왕 돌지계로서는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장차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것인데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한성 이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개국하여 한성을 도읍으로 삼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그들도 개국을 도모할 것이다. 하······가장 약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두렵구나.’

가슴이 무거웠다.

고구려가 특별하게 사정을 봐주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국력의 열세를 어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거란과 고막해족은 힘의 위계를 가장 중시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세력의 열세를 상쇄할 수 있는 건 오직 군공이었다. 고구려의 적국인 신라를 맹렬하게 타격하여 그들보다 높은 공을 세우면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해서,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약탈을 이어갔다.

약탈한 물자와 가축 그리고 사람을 따로 보내는 보급부대를 운영하면서까지 본군은 약탈을 감행했다.

물론, 자칫 잘못하여 크게 패하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기에 되도록 격돌은 최대한 피했다.

그랬다.

그랬는데······

“정말 저열한 나라군. 머리카락도 안 보여주다니.”

언제부터인가 신라군을 보지도 못했다.

아무리 말을 타고 달려도 신라군은 성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돌지계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으나 어처구니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하. 어찌할까요.”

“뭘 물어보나? 계속 약탈하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싸워서 크게 한 번 이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신라군이 참으로 나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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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약관의 나이로 전장에 섰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칠중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신라의 최전선에서 고구려를 견제하는 위치에 오르는 건 아무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도다.”

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군왕기가 등장했기에 결사의 각오로 수성을 선언했다. 수만의 대군의 돌격할 때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르고 기어이 막아내는 장면을 떠올렸었다.

만일, 중과부적의 상황이라면 자결해서라도 신라군의 기개를 지키겠노라 생각했다. 그 장면을 미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부풀러 올랐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그런데 현실은 참으로 이상했다.

“여전히 2천 기라고?”

“그렇습니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나? 정찰병이 실수한 거 아닌가?”

“아닙니다. 적의 규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군왕기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닙니다. 이제는 대놓고 휘두릅니다. 분명 군왕기였습니다.”

“······.”

맞다고 한다.

그러면 이미 2천이 아니라 2만은 되어야 할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장렬한 전투를 치르고 고함을 질러야 할 시간이 훌쩍 넘어서 버린 것이다.

한데, 아직도 2천 명만 날뛰고 있다.

심지어 무려 군왕기를 나부끼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

설마 군왕기가 위계일까?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이 혼탁하면 무슨 일이라고 하지 못하겠는가. 그래. 그럴 수 있다. 있는데······.’

있긴 하다.

그런데 대체 왜 그리한다는 말인가.

‘위계로 사용할지라도 상황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경천동지할 계책의 주춧돌이라거나······.’

한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말이나 타고 다니면서 약탈 따위나 하고 있다. 무려 고구려의 태왕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은 가정은 오직 한 가지였다.

‘소수 병력을 보고 우리가 성에서 나오길 바라는 것인데······.’

아니, 그런데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래서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자, 장군.”

정찰을 다녀온 부관이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다. 칠중성 성주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어서 말하라!”

“고, 고구려군의 본군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규모는 어찌 되는가?”

“기병 1만기입니다.”

“뭐라······?”

그리고

“막리지의 깃발을 확인했습니다.”

막리지라고 했다.

성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왕부터 막리지까지?’

고구려가 어떤 각오로 이번 남진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구려 태왕이 2천 기로 약탈을 감행하여 우리 민심을 교란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아군을 조롱하며 사기를 올린 것이야. 이때 막리지가 1만의 기병을 이끌고 왔다. 이는 한수 일대 우리 성의 연락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는 것이니라!”

드디어 모든 의도가 확인되었다.

칠중성 성주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기병이 1만이다. 하면, 뒤따를 보병은 최소 3만 이상일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총력전이다. 고구려가 한수를 도모하기 위해서 국력을 집중한 것이야.”

방비해야 했다.

철저하게.

“공성전은 아군의 소통이 차단된 이후다. 인근 성에 당장 이를 알리도록 하라. 고립되면 아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 적들은 우리가 청야전술조차 사용할 수 없게 미리 약탈이나 한 것이야. 저열하도다. 일국의 태왕이라는 인물이.”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당장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다시 확인해주듯 말했다.

“적의 병력은 최소 기병 1만, 보병 3만이다.”

“알겠습니다. 즉각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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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지계의 표정은 어두웠다.

타고난 낙천적이고 호탕한 성정도 지금만큼은 가려졌다.

“······.”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병이었다. 그 웅장함은 보기만 해도 압도되었다. 동시에 휘날리는 막리지의 깃발은 너무나도 위용이 있었다.

반면, 군왕기는 너무나도 초라하였기에 지금이라도 숨기고 싶었다.

고막해부의 막리지가 보면 한껏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위계를 어찌해야 하는가.’

엄밀히 따지면 고막해부의 막리지와 말갈국의 국왕이었다. 그러나 세력의 열세는 이런 위계를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걱정스러움에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하하! 전하! 참으로 반갑습니다! 소인은 고막해부의 막리지 아회씨라고 합니다.”

막리지 아회씨는 너무나도 호탕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더욱이 위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지켰다.

크게 안도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러기에 돌지계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하하하! 참으로 반갑소. 한데, 이름이······.”

“그냥 다들 아회씨라고 부릅니다. 전하께서도 편히 불러주십시오!”

“이런! 참으로 호탕하오.”

상황은 참으로 바람직하게 흘러갔다.

돌지계가 이토록 안도하는 건 정말 괜한 걱정에서 비롯한 게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2천과 1만의 차이는 명확하다.

게다가 고막해부가 전 병력을 이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한성으로 이주를 하느라 전군을 이끌고 오지는 못했습니다.”

“하하하! 내실부터 다져야 하는 법이외다.”

“과연 전하께서 통 크게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이토록 알아서 처세하니 어찌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두 사람은 참으로 비슷했다. 호탕한 웃음부터 외모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까지 말이다.

“그나저나 이왕 내려왔으니 거하게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막리지의 말이 참으로 옳소. 그렇지 않아도 다시 출병하려고 했소. 그런데 신라군이 도통 보이지 않소. 그래서 내가 참으로 답답하오.”

“하하하! 전하의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지요.”

“이런.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 거요?”

“하하하! 전하. 그저 사실을 말하였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참으로 잘 맞았다.

마치 평생을 함께한 벗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전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신라군은 농성전을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러한 듯한데, 굳이 응해줄 필요가 있겠소?”

“하하하! 물론 없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적이 성문을 열고 돌격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사실 그 또한 신경 써야 하오. 언제 신라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전면적인 약탈도 생각만큼 쉽지 않소.”

아회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말갈국의 기병은 2천 기에 불과하다. 한 번이라도 패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니 신라군의 움직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기병 2천이라면 약탈에 딱 적합했다. 그러나 돌지계처럼 장기적으로 상대국의 내부를 휘젓기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약탈의 성과는 충분하다. 그런데도 무리하는 건 결국 가장 약세라는 걸 고려한 거겠지.’

그렇다면 판단해야 할 때였다.

‘우리도 적당하게 약탈한 뒤 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한수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건 결국, 고구려군의 남진이 감행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신라군을 최대한 자극해야겠지.’

약탈 종말점을 최대한 빨리 도래시켜야만 신라군이 발작하듯 움직일 것이다. 이때가 바로 고구려의 본군이 움직일 시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어차피 내 경쟁 상대는 거란이다. 그들보다 빨리 개국하고, 한수의 가장 풍요로운 곳을 도읍으로 취해야 한다.’

이미 마음에 둔 곳이 있었다.

과거 백제의 왕도였던 위례성이었다.

‘큰 공을 쌓는 것도 좋지만, 난처해진 말갈국과 우호를 적극적으로 쌓는 것도 중요하다. 빚을 안기면 필시 내게 돌아올 것이니 말이다.’

짧은 시간, 아회씨는 상황을 정리한 뒤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아군이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겠습니다. 그새 전하께서는 마음껏 약탈하십시오. 소인만 믿으십시오.”

“허. 정말이오?”

“하하하! 물론입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소인을 거들어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여부가 있겠소이까!”

돌지계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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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이 이상했다.

무려 1만의 기병을 동원해놓고 산성 지척에 진을 설치하고 있다. 아니, 지척은 아니었다. 적당한 압박이었다.

마치 나올 테면 나오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성주는 치욕스러웠으나 일단 참으며 의도를 가늠했다.

“어째서 기병 1만 명이나 데려와 놓고 저러는 것인가. 무려 막리지라는 사람이 말이다.”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 1만 기병을 상대로 돌격할 수는 없다. 왕도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성을 사수하는 게 가장 합당한 방책이었다.

“이미 결사의 각오이거늘!”

너무 답답했다.

그때였다.

“자, 장군!”

심장이 두근거렸다.

성주는 즉각적으로 외쳤다.

“고구려의 본군이 나타났나?!”

“일단 더 왔습니다!”

“보병 2만 명 이상인가?!”

“아닙니다. 기병 1만 명입니다!”

“뭐라······?”

이게 무슨 말인가.

성주가 눈을 껌뻑였다.

심장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란의 깃발이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졌다.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글자 좀 제대로 읽고 오라!”

이미 두근거리지 않는 심장까지 더해져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거란족이 여기를 왜 오는가!”

정말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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