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바람아 불어라(2) >
83화 바람아 불어라(2)
소위를 물린 뒤 지근찰은 핏대까지 세우며 말했다.
“북방의 주도권이 고구려로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이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가뜩이나 고구려를 견제하던 지근찰이었다. 한데, 수나라가 고개를 숙이며 세폐를 바치겠노라고 하였으나 더 거칠 것이 없었다.
“남진하지 않아도 세폐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필시 필요한 일입니다.”
“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셨소? 아니, 이대로 고구려의 승리를 바라만 보자는 것이오?”
이계찰은 이를 악물며 격하게 반론을 펼쳤다.
“고구려는 우리 동맹이외다. 이제 막 시작하였는데 대체 무슨 의도로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오? 당장 멈추시오.”
“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고구려가 아니오? 함께 장성을 넘기로 하였으나 먼저 파기한 건 고구려였소. 기주의 승리를 나눠 가지기 싫으니 한 행동이 아니오?”
온달의 대승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근찰은 애초 확정적인 승리였다며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수나라가 고개를 숙이니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수나라로부터 세폐를 받는 건 좋은 일이다. 애초 목표도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하여 애써 이룬 외교의 성과를 폐기해도 되는 건 아니다.
“상황을 제대로 보시오. 지금 수나라는 우리와 고구려의 동맹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그런데 동맹에 균열이 생기면 어찌 되겠소?”
“상황이라고 하셨소? 그건 내가 할 말이외다.”
지근찰이 턱을 올렸다.
“우리가 고구려보다 아래라는 것이오?”
외통수였다.
이계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오.”
“똑바로 들으시오. 동맹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우리가 끌려다닐 수는 없소. 하지만, 고구려의 행동이 참으로 오만하지 않소이까. 전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수나라가 무릎을 꿇었소.”
이계찰은 아사나 섭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수나라로부터 세폐를 받고 그 힘으로 고구려를 견제해야 합니다. 북방의 패권이 고구려로 넘어가는 건 곤란합니다.”
그리고
“거란과 고막해가 고구려 영내로 이주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흉계를 꾀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겁니다.”
그는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이계찰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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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사신단의 정사 소위는 돌궐 내부의 사정을 파악할 정신이 없었다.
더 심각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거란과 고막해가 고구려의 영내로 이주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북방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돌궐도 아니고 고구려다. 하필이면 고구려야.’
소위는 돌궐과 고구려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돌궐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나, 고구려는 홀로 생존할 수 있다.’
돌궐은 강성하지만 허약했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지만 튼튼했다.
해서, 돌궐은 한 번의 승리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명운을 걸고 싸워야 했다.
이토록 까다로운 고구려가 거란과 고막해족을 취한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수를 사용했기에 그들이 이주까지 했다는 것인가.’
신속을 청할지라도 영주를 벗어나는 법이 없는 이들이었다. 늘 눈치를 살피며 생존만을 도모하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세력의 명문을 걸고 이주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그 정도의 승패는 비일비재한 난세가 아니었던가.
‘변수가 상당히 크다. 하면, 폐하의 계책대로 일을 진행해도 되는 것일까.’
수나라 북방 정책의 방점은 돌궐의 분열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돌궐이 분열되어도 될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거란과 고막해처럼 분열된 돌궐의 일부가 고구려로 투항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돌궐인들이 분열의 책임을 찾기 시작한다면 일은 복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
소위는 이것이 두려웠다.
북방의 정세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최악의 경우 동방이 북방에 색을 칠할 수도 있다.
만일, 고구려가 북방에 영향을 끼친다?
‘지금껏 북방이 고작 한 세대의 강자로 그친 것은 역량을 제대로 갈무리할 수단과 방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다르다. 그들이 북방의 일부라도 점유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무조건
‘하루라도 빨리 황도로 돌아가야 한다.’
막아야 했다.
소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차피 돌궐에 세폐를 준다는 건 위계이다. 그러니 어떤 감언이설을 펼쳐서라도 저들의 흥미를 일으킨 뒤 떠나야 한다.’
물론, 돌궐을 분열시켜도 되는 건지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황명은 수행해야 하는 법이다.
그때였다.
“긴히 할 말이 있소.”
지근찰이었다.
소위는 고소를 삼켰다.
지금은 돌궐과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도 없다.
부드럽게 웃으며 반겼다.
“어서오시오. 한데, 긴히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오?”
“본론을 말하리다. 나는 불필요한 교전을 원하지 않소.”
말이 아주 쉬웠다.
분명 ‘나는’이라고 했다.
즉, 돌궐 내부에서는 이번 세폐 외교를 의심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는 뛰어난 인물이 있다는 의미였다.
‘이계찰이로구나. 돌궐로서는 애석하게도 그가 수세인 모양이군.’
소위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본국 역시 돌궐과 우호를 증진하고자 온 것이외다.”
“해서, 묻겠소. 고구려는 어찌할 것이오?”
“그들이 장성을 넘었소.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소.”
“음. 그렇소?”
“이리 찾아오셨는데 더 숨길 게 뭐가 있겠소? 본국은 고구려를 응징할 것이외다. 그러자니 귀국과 우호를 맺어야 하오.”
소위는 유려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말을 이었다.
“북방과 동방.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겠소? 당연히 북방의 패자인 귀국이외다.”
지근찰은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우리와 고구려의 국세를 비교할 수는 없지.’
돌궐과 싸우고자 고구려와 손을 잡는 것.
고구려와 싸우고자 돌궐과 손을 잡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약세인 고구려와 손을 잡고 우리를 견제할 방법도 있을 것이외다.”
사실 이리하는 게 전통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약자와 손잡고 강자를 제압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현상만 보시오. 기주를 범한 건 귀국이 아니라 고구려였소. 그러한데,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고구려와 손을 잡을 수 있소?”
“바꿔 말해서 고구려를 도모한 뒤 우리 돌궐과도 싸울 수 있겠구려?”
“그건 우리가 논의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오만.”
소위는 지근찰을 지그시 바라봤다.
때로는 외교에서 진실에 가까운 사실관계가
“귀공께서도 양국의 우호가 영원히 이어진다고 여기지는 않을 게 아니오.”
가장 강한 힘을 내는 법이다.
지근찰은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이오! 옳소.”
어차피 돌궐과 수나라는 영원히 우호를 맺을 수 없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돌궐은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고, 수나라는 세폐를 바쳐야 한다.
그런데 수나라는 세폐가 부담스럽고, 돌궐은 세폐가 없으면 군사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모순의 톱니바퀴가 기괴하게 돌아가는 관계였기에 영원한 우호는 불가능하다.
이를 신뢰한다는 건 이토록 중대한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조와 같은 수준으로 세폐를 내리다. 그러니 귀국도 우리의 노력에 화답해주길 바라오.”
“귀국이 원하는 우리의 노력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오.”
“고구려 견제가 아니겠소?”
“이런 걸 이이제이라고 한다고 하지요?”
“내키지 않으면 그냥 지켜만 봐도 좋소.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오.”
“큭. 좋소. 의견을 개진해보겠소.”
“이러면 귀국이 본국과 고구려를 상대로 이이제이를 펼치는 것이구려.”
“하하하! 그게 또 그리되는 것이오?”
대화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소위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마지막 말, 수나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이이제이하느냐는 말.
‘지금 북방에서는 돌궐과 고구려가 기 싸움을 펼치고 있다.’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건 돌궐이 기세에서 밀리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소위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너희가 싸우거라. 오랑캐들아.’
원하는 모든 걸 파악했다.
아니,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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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양견의 수나라가 다시 세폐를 바치겠다며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소식은 돌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파가한 대라편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수나라가 세폐를 언급한 건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북의 왕조는 늘 형세를 살피며 간사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도 고구려의 압박에 화들짝 놀라서 달려온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유심히 살펴야 할 건 고구려의 동향일세.”
대라편은 대카간에 즉위해야 할 위치였다. 그러나 모계가 천하다는 이유로 내부의 반발에 직면하여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라편은 포기한 적이 없었다.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수나라의 세폐보다는 작금의 흐름을 더 유심히 살폈다. 심지어 대카간이 알지 못하는 정보까지 있기에 더 세밀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족 부족장 돌라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주 정책을 취한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라는 건 분명하지. 저들을 이주시킬 발상을 했다는 것 어처구니없다고 해야 할까.”
거란족의 내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기에 고구려의 의도까지 더 자세히 알 수밖에 없었다.
“대카간은 수나라의 세폐에 만족하고 고구려와 척질 움직임을 보이고 있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방의 하늘에만 만족했습니다. 실제로 이번에도 요충지인 요서에서 철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고구려와 척지는 건 아주 우매한 행동일세.”
대라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카간이 고구려와 본격적인 갈등을 일으킬 때를 대비해서 고구려와 남몰래 접선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돌라와도 적절하게 연락을 유지하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돌라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걸 대카간은 몰라야겠지.”
돌라가 친돌궐의 성향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된 건 아파가한인 대라편이 유일했다.
그리고 대카간이라는 지고한 북방의 패자를 바라보고 있는 대라편에게는 아주 유용한 끈이었다.
“우리로서는 고구려의 내부 정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을 영구히 파견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작금의 정세에서 고구려는 대카간으로 가는 동아줄이다.
대라편은 이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