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바람아 불어라(1) >
82화 바람아 불어라(1)
아회씨는 처세도 남달랐으나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말을 돌리거나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넣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인. 우리도 개국하고 싶습니다.”
“허. 보자마자 용이 되게 해달라니 참으로 부담스럽소.”
“아닙니다. 소인이 다 압니다. 늦었지요. 이 눈치, 저 눈치 살피지 않았다면 한성의 주인은 소인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 뼈에 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평생 후회만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아회씨는 고막해 자체였으나, 돌지계는 말갈의 일부를 가진 부족장에 불과했다. 단지 말갈의 이주 시기가 빨랐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의 결정은 파격적이었다.
아회씨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당혹스러울 것이다. 거란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상되는 반응에도 우리가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바로
“어찌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겠습니까.”
이런 말을 기다린 것이다.
당장 아회씨만 해도 적극성을 강력하게 보인다. 통합된 상태가 아닌 거란족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국 말갈을 중심에 세우자 거대 세력인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큰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회씨를 지그시 쳐다봤다.
“다 알겠소. 한데, 도읍은 어찌할 것이오?”
“그건······.”
“애석하게도 우리는 땅을 더 내어줄 수가 없소. 물론, 훗날 한수를 도모하면 사정은 다르겠으나 아직은 아니외다.”
핵심적인 사안을 말했다.
아회씨는 눈알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원래 그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저 미리미리 하나씩 배워두면 좋을 듯하여 오늘 대인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소?”
“물론입니다. 소인은 한수 외에는 어디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한수를 점령하기 전에는 말갈국이 통치하는 한성에 거주하겠다는 정치적 동의였다.
그러나 세력이 월등하게 강한 고막해족이 말갈국에 속한다는 건 참으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회씨는 최대한 빠르게 한강을 도모하고자 나설 것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다?
그때부터 그 비루한 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이보다 좋은 일이 없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고막해부가 고구려의 역사에 등장했소.”
고구려는 7부가 되었다.
그리고
“감축드리오. 막리지.”
막리지가 한 명 더 탄생했다.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인.”
“같은 막리지끼리 대인이라니요.”
“위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뛰어난 처세.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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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덕의 예상대로 거란족은 큰 혼란 상태였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말갈국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돌라는 버럭 화를 냈다.
영주 땅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갈국의 아래로 들어가게 생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우리가 왜 말갈의 아래라는 것이오?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이럴 수 없으면 어쩌자는 것이오?”
막하불이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다른 세력을 찾을 수도 없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돌아가면 어찌 막을 것이오?”
“설마 고구려의 도성 지척에서 다툼이라도 일으키자는 것이오? 제정신이오?”
그리한다면 고구려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란족은 모조리 도륙당할 것이다.
돌라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며 어물쩍 말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고구려의 약조가 틀리지 않소이까.”
“그렇소? 내 생각은 다르오. 한수를 도모하면 개국을 약조하였소. 이게 전부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영 내키지 않으면 혼자 가시오. 돌궐과 친분이 돈독하니 갈 곳은 있겠소이다.”
“이, 이보시오!”
“됐소. 나는 고구려의 방침을 따를 것이외다.”
“나도 그렇소.”
막하불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미가 황급히 동의 했다.
이를 지켜보던 오적은 속이 쓰렸다.
‘고구려의 계책에 손쓸 틈도 없이 당했구나.’
왕고덕의 말을 되새겼다.
-거란의 부족장을 모두 막리지에 임명할 수 없소. 오직 한 명이 될 것이니 알아서 정리하시오. 누가 막리지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외다.
부족장 중 한 명이 막리지가 된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말갈국의 국왕이 고구려의 막리지라는 건 잊지 마시오.
막리지가 되는 부족장이 거란국의 왕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모두 알고 있다. 한번 결정된 위계는 고구려의 국세가 유지되는 이상 절대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고구려의 눈에 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만 막리지도 하고, 거란국의 왕도 할 수 있다.
세력이 열세라도 개국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미 말갈국의 돌지계가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고구려의 위세에 기대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은 것이니까.
이는 지금만 봐도 그렇다.
과거 막하불은 늘 돌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따졌다. 아니, 면박을 주는 수준이었다. 더 우스운 건 돌라가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고구려를 의식한 결과였다.
“모두 진정하세요. 우선 중지를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중지를 모아내자니요? 그게 어찌 가능하오?”
“우리끼리 이렇게 다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셨소? 우리는 지금 한배를 탄 거란족이 아니라 왕위 경쟁자라는 사실을 말이오.”
“······.”
“됐소. 그렇지 않아도 나는 고 대인을 뵙기로 하였소. 그러니 먼저 일어나겠소.”
“나, 나도 함께 가오.”
“허.”
막하불이 다미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거. 왜 계속 따라다니시오?”
“그게······.”
그때였다.
“고막해족이 한성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실로 발 빠른 움직임이었다.
막하불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나는 일단 한성으로 가리다.”
그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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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나?”
“······.”
“어째서 영주가 무주공산이 된 것인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쟁투의 중심지였던 영주였다. 그런데 고구려가 영주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영주에서 생존을 도모했던 거란족과 고막해족도 떠났다.
그래서 지금 영주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많던 이가 모두 떠난 것이다.
고구려로.
“자네들은 어찌하여 조용한가. 무슨 말이라도 해보게.”
“속셈은 뻔합니다.”
지근찰이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뒷감당을 할 수가 없으니 물러나는 겁니다.”
“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서두부터 짜증 나는 분석이었기에 이계찰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대승을 거둔 고구려가 무슨 뒷감당을 걱정한다는 것이오? 상황을 저열하게 보면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소. 잘 보시오. 거란과 고막해도 이주했소. 이는 고구려의 속내를 살펴야 한다는 걸 의미하오.”
“속내라고 하셨소? 나는 백 번을 생각해봐도 고구려가 대승을 빌미로 10만이 넘는 인원을 챙긴 것으로 발을 뺐다고 보오. 딱 제 나라의 이익만 생각한 것이오. 이게 저열한 것이외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오.”
“하.”
정말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시야가 좁고 속이 꼬이고 매사 이권이나 찾다 보니 음흉하게 정략이나 꾀하는 것이다.
천하의 패권이 오고 가는 엄중한 정세를 어찌 이토록 졸렬하게 분석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계찰은 겨우 화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은 거란족과 고막해족이외다. 그들은 그 누가 압박을 가해도 지금처럼 적극적인 이주에 임하지 않았소. 한데, 이를 단지 고구려의 이익을 취한 결과로 바라본다면 대체 무슨 논의를 할 수 있소?”
“실체적인 과정은 더 파악해봐야 하오. 내가 주목한 건 고구려가 이권을 독점했다는 지극한 사실이외다.”
“하면, 고구려가 우리와 논의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오?”
“말을 똑바로 들으시오. 나는 온달이 대승을 거둔 직후 북방의 유목 세력이 고구려가 상황을 주도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소. 한데, 어찌 되었소? 당장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그러고 있소. 이게 핵심이라는 것이외다.”
늘 그렇듯 지근찰의 언변은 유려했다.
그리고
“그건 참으로 곤란한 일일세.”
아사나 섭도의 역린을 건드리기도 했다.
“고구려는 동방도 제대로 평정하지 못한 나라이거늘 어찌 북방의 패권을 탐할 수 있겠는가.”
이계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지금 그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논의가 대체 왜 이렇게 흘러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추상적인 가치에서 비롯한 불필요한 탐욕이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계찰은 숨을 내쉬면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결국, 중요한 건 수나라로부터 확보할 세폐입니다. 이를 달성하자면 고구려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그전까지는 작은 갈등은 넣어두는 게 옳습니다.”
“허. 작은 갈등이라니요?”
두 사람의 논쟁은 다시 불이 붙었다. 하지만, 더 이어질 수는 없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방문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수나라의 사신단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정사가 다른 사람도 아니라 소위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수나라 황제 양견의 최측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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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는 맑게 웃으며 예를 취했다.
“북방의 주인을 뵙습니다.”
참으로 공손한 자세였다.
동시에 아사나 섭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수나라에서 이곳까지는 어찌 온 것이오?”
“북방은 말이 길고 번잡한 걸 선호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과연 그렇소. 그래. 용건을 말해보시오.”
“세폐를 바치고자 합니다.”
소위의 말은 거대한 침묵을 일으켰다.
아니, 장내가 얼어붙었다.
소위를 제외한 아니 돌궐인 모두가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계찰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외다.”
“허. 어찌 그렇게 타박하시오?”
지근찰이 끼어들자 이계찰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말하려고 할 때였다.
“솔직히 답하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소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돌궐인은 조용해졌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 장내를 지배했다.
“세폐는 참으로 막대한 수량입니다. 본국의 내정에 심대한 타격을 줄 정도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부담스럽다고 할지라도 북방의 안정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결론이 도출되었던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구려의 대승이 수나라를 위축되게 만든 것이다.
그토록 오만하던 수나라 황제 양견에 머리를 숙이고 올 정도로 위협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
아사나 섭도의 안색이 굳었다.
동방의 패자였던 고구려가 북방에 확실하게 등장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