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남진(2) >
81화 남진(2)
국호는 존재이며, 깃발은 존재의 상징이다.
하여, 하늘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다.
누가 다가오는지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났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현 상황이 참으로 괴이했다.
“말갈국이라니. 그들이 언제 어디서 개국을 선언했단 말인가?”
말갈을 모르지 않았다.
한데, 그들이 대체 무슨 수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인가. 이것만 해도 어지러운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백 보 양보해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찌 고구려의 영토를 지나서 우리를 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하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말갈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무리였다. 그들이 개국을 선언했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의 수작일 것이다. 그러하니 고구려 영토에서 출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구려가 참으로 졸렬한 수를 사용하는구나.”
이를 갈아댔다.
“일전에는 돼지로 우리를 조롱하더니 이제는 말갈족으로 눈과 귀를 속이려고 하는구나. 참으로 저열한 무리가 아닌가.”
됐다.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누구라도 적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니 응당 잘 준비하여 물리치면 될 일이었다.
“적은 소수다. 필시 뒤로 대군이 들이닥칠 것이니 제대로 방비해야 한다.”
“하면······.”
“당장 보이는 말갈의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군이 곧장 남하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즉각 왕도로 사람을 보내어 전선의 위중함을 알리도록 하라.”
“자, 장군!”
다른 부관이 황급히 달려왔다.
상당히 중요한 내용으로 추정됐다.
“군왕의 깃발을 확인했습니다.”
“뭐라······?”
칠중성 성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도 하지 못한 내용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약탈하는 적과 싸운 아군이 전한 소식입니다. 분명 군왕기였습니다.”
“필시 태왕의 깃발이었느냐?”
“예. 왕의 깃발이었습니다.”
“허.”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애써 감추고자 했으나 하늘이 도왔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고작 1~2천 기의 기병이었기에 선봉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필시 뒤따르는 대군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군왕기라고 했다. 평범한 선봉이 아니었다.
자고로 군왕기는 절대로 위계로 사용할 수 없다.
아군의 사기와 직결하는 것이기에 그러했다. 또한, 일개 장수가 군왕기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었다.
하여, 군왕기는 곧 심장이었다.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나선 군왕.
그리고 뒤를 따르는 대군.
모든 건 명백해졌다.
“한시도 쉬지 않고 왕도로 가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태왕이 친정을 했다. 당장 달리도록 하라!”
말을 보탰다.
“왕도에서 대군이 당도할 때까지 기어이 칠중성을 사수할 것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죽음을 불사한 결의를 다졌다.
다시 명령을 내렸다.
“눈에 보이는 적의 수를 가볍게 여기고 움직였다가는 매복에 당할 것이다.”
태왕이 직접 선봉에서 기병을 지휘하고 있다. 적의 수가 소수라고 하여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곤란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산성을 사수한다.”
응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성 밖의 일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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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근행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보고 있노라면 나도 밝아질 것만 같아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대인. 대승입니다. 신라군 수십 명을 도륙했습니다. 연전연승의 기세를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저하께서 즐거워하니 소인도 기쁘군요.”
‘저하’라는 경칭은 원래 없는 것이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만 사용했으니 이 시절에는 존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자가 있으면 경칭도 필요하기에 내가 익숙한 ‘저하’라는 말을 도입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번듯한 나라가 아니며, 번국에 불과할지라도 위계조차 엉망으로 한다면 존속시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막리지인 내가 말갈국에 대한 존중을 확실하게 한다면 고구려 내부에서도 감히 함부로 대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리 가다가는 말갈의 군왕기가 신라인에게는 공포의 상징이 되겠습니다.”
“하하하! 군왕기가 제대로 휘둘러졌을지도 의문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군왕기에 대한 사소한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병에 나섰던 돌지계와 나눈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허. 군왕기라니. 이건 좀 민망하오.
-전하께서 친정하는데 군왕기는 필수적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긴 하지만······.
-이번 출병은 말갈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될 겁니다. 한데, 군왕기를 꺼내지 않으면 어찌 위력이 제대로 세워지겠습니까.
-끙. 알겠소.
-하면, 소인이 폐하께 청하여······.
-아, 아니외다. 이번은 내가 적당하게 준비하겠소. 폐하께서 군왕기까지 하사하시면 내가 너무 부담스럽소.
그러니까 돌지계는 정말 민망해 죽으려고 했었다. 보나마나 전장에서도 군왕기를 최대한 숨기면서 움직였을 것이다.
“혹시 전선에서는 어찌할 건지 연락이 왔습니까.”
“초안은 적과 교전하며 약탈하다가 대군이 당도하면 물러서고자 했습니다. 한데, 겁많은 신라인들이 산성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농성으로 대응할 생각이군요.”
“그런 것으로 파악됩니다. 한데, 아군은 절대로 응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단지 전장의 문제도 아니었다.
현재 말갈국은 규모는 수천에 불과했다. 일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중 2~3천여 명의 병력으로 신라군과 공성전을 펼친다는 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크게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말갈국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 말갈부도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러니 기동력을 이용한 약탈전을 광범위하게 펼치는 것이 합당했다.
물론 신라군이 이렇게까지 몸을 사리는 건 계획에 없었기에 당황스럽긴 했다.
어쨌거나 이만하면 첫 출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한데, 대인.”
돌근행이 눈치를 살피며 멋쩍게 웃었다.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궁색한 말을 꺼낼 준비를 한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으나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자고로 아쉬운 말은 상대가 직접 하도록 유도하는 게 옳은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굳이 먼저 나서서 편하게 해줄 이유는 없었다. 이건 사교가 아니라 정치였으니 말이다.
“그······.”
“저하. 내가 좀 바쁩니다.”
“소, 송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거란, 고막해가 지척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요?”
“그들도 한성으로 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막해, 거란과 말갈은 규모 자체가 달랐다.
양측의 인구는 이미 10만 명을 넘었고, 병력만 수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한 말갈로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데, 그들이 한성에 들어선다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내가 특별하게 나서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저 빤히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하니 돌근행은 진땀을 흘렸다.
이는 내가 일부러 상대를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처지를 말하는 돌근행이 원하는 나의 답변은 고구려가 말갈을 특별하게 우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찌 그리할 수가 있는가. 고구려는 말갈에만 과한 특혜를 줄 수 없다. 물론, 역학 구도에 따라서 달라지겠으나 당장은 그러했다.
그러니 분명하게 정리해야 한다.
“저하.”
“예. 대인.”
“고구려는 고구려의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번국의 처지를 살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오직 귀국만 알뜰하게 챙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돌근행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가볍게 말을 돌렸다.
“이번에 잡아 온 신라인은 말갈국에서 중시 사용하면 될 듯합니다.”
“하지만, 첫 승전입니다. 응당 폐하께 바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조금씩 세력을 늘려야지요. 말갈국의 번영이 곧 충심입니다. 이를 늘 명심해야 할 겁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타 세력의 강대함에 위축되어 고구려에 기대기만 한다면 작금의 대계는 시작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강성한 번국이지, 어리광이나 부리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이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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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인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막상 내가 눈으로 보니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아주 놀라운 정도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눈으로 10만 명을 본 느낌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멍하게 쳐다보다가 지척에 다가온 이의 기척을 느꼈다. 이번 대계의 일등 공신인 고정의였다.
“······고생하셨소.”
“끌. 말도 마시오. 정말 고생했소.”
고정의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사정인지 보고를 들었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요서에서 고구려의 내부를 관통하는 10만이 넘는 이주 행렬이었다. 사실 편의상 10만이라고 부를 뿐 훌쩍 넘는 규모였다. 이러하니 민심이 크게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 수천에 불과한 말갈의 이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고정의가 동행하며 매번 중재하지 않았다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한성으로 이주시킬 것이오?”
“그래야지요.”
“이거 상당히 재미나겠소.”
고정의는 잔뜩 기대한 듯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사실 나도 비슷한 감정이라서 같이 웃었다.
그때
“하하하! 왕 대인!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호탕한 사람이 다가왔다. 고막해의 수장 아회씨였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말갈국의 왕, 돌지계와 정말로 비슷했다.
생김새와 말투 그리고 목소리에서 행동까지.
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만일, 이 자리에 돌지계가 있었다면 참으로 볼만했을 것 같았다.
“대인의 위명이 사해를 진동시켰기에 너무나도 뵙고 싶었습니다.”
구사하는 미사여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노련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바꿔 말해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고로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 어려운 건 동등한 위치일 때다. 확실하게 위계로 정리된 관계에서 처세가 뛰어난 이보다 편히 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짙게 웃으면 답했다.
“어서 오시오. 본국은 고막해족을 열렬히 환영하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데, 대인. 듣자니 한성은 이미······.”
“아. 그렇소.”
말끝을 흐리며 눈치껏 행동하길래 딱 잘라서 대답해줬다. 그리고 나도 운을 던졌다.
“대화가 편한 곳으로 이동하지요.”
“과연 왕 대인이십니다. 듣던 대로 신묘한 계책을 펼치시니 소인이 어찌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고막해족의 아회씨.
참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