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남진(1) >
80화 남진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농업 개혁이 본격화된 이후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추측할 수 있다.
만일, 그러하다면 제법 긴 시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을 담아낸 고식의 고민이 담담하게 풀어지듯 흘러나왔다.
“대형. 개인과 세력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전장에서 몸을 던져 죽을 수는 있어도 가문의 기둥을 뽑는 이는 없습니다.”
서두부터 여러 번뇌가 느껴졌다.
“고구려의 남아로서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도모하고자 나아가기에 어찌 모든 걸 감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귀족은 모두 이러합니다. 그런데도 아쉬운 건 모든 흐름에서 귀족은 주체로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
“철저하게 객체로 치부되었을 뿐입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토론하지 못했고, 의견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합의가 없었기에 결과를 따라가기에만 바빴습니다. 대형. 작금의 고구려는 과할 정도로 일방적입니다.”
“그건 나도 인정하겠네.”
나라고 하여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았겠는가?
개혁을 단행하며 오늘에 이를 동안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논의하고 합의하여 개혁을 이끌어 간다면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내가 나를 믿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이보게.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아. 그래서 인정한다는 걸세. 한데, 나는 한가하지 않아.”
되돌아본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저 내정에만 치중하고자 했다. 농업 생산력만 폭증시키면 된다고 여겼다. 원 역사에서도 수나라를 압살한 고구려가 아닌가. 한데, 농업 혁명을 등에 업은 고구려를 상상하니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바뀌었다.
을지문덕을 만나고, 고양성과 대화를 나눴고, 고구려인과 어울리면서 바뀌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설득하여 고구려의 길을 제시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설득되어 고구려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토론하지 않았다.
합의하지 않았다.
대화하지 않았다.
오직 집행과 집행 그리고 집행만 있을 뿐이었다.
지독할지라도.
냉정할지라도.
악독할지라도.
왜?
함께 걷는 길은 너무나도 느렸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내전이나 일으키는 귀족을 상대로 합의를 바라나? 건국 이래 최대의 난세와 만난 고구려에 그럴 여유는 없네.”
작금의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래 최대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어떤 난세도 10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침공하는 수나라의 무게를 앞설 수는 없다.
“서토는 꿈틀거리며, 북방은 죽을 길로 들어가고 있네. 한데, 우리끼리 손잡고 대화하며 하하 호호할 시간이 있다고 보는가? 웃다가 적의 창칼이 요동을 무너뜨리고 평양 도성의 지척에 있을 것이네. 국운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일세.”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다고 하여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게 아니었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통일 중국은 영원히 고구려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를 막을 방법은 고구려가 패권을 확보하는 것이 유일했다. 고구려의 땅이 곧 중원이 되어야만 했다.
이를 도모해야 하기에 급할 수밖에 없다.
내부에서 반발이 나와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패권을 잡을 수 있는 적기는 오직 지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원 역사에서 가졌던 고구려의 비루함을 말하였다.
“우리는 남쪽의 신라조차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였네. 서쪽을 방비해야 했다고 변명하지 말게. 결과는 늘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니까. 이러한데, 내가 귀족과 토론이나 해야 하나? 어림도 없네.”
“그렇겠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거점을 송두리째 빼앗긴 귀족의 불만 역시 그러합니다. 그들이 양보하지 않으면 말갈, 거란, 고막해를 품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가 패권을 확보할 첫 번째 과업이거늘 내부의 다툼으로 무산시킬 수는 없지요.”
의외로 고식은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는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거점을 지킬 역량으로 평양 도성을 강화하고자 한 방책이었습니다.”
“만일 해내겠노라 나선다면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그보다 훌륭하고 위대한 결의는 없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자네 내게 항의하러 온 거 아닌가?”
“그 훌륭한 일을 우리 평양계 귀족이 다 해내고 있습니다. 결의를 모아냈습니다. 그러니 대형도 무언가를 꺼내시지요.”
“······.”
대화의 흐름은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눈을 껌뻑이니 고식이 싱긋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형님께서 분명 그러셨습니다. 이보다 훌륭한 결의는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했습니다. 설마 말로만 그러신 것이었습니까?”
“······.”
“대형.”
“원하는 걸 말해보게.”
“평양계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입니다.”
“무엇인가.”
“남진의 주도권입니다.”
“허.”
모호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고구려 귀족이라면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욕심이 과하군.”
“하지만, 받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그러니까 남진의 주도권이라는 건
“남쪽 영토의 분할이라.”
고구려가 확보할 백제와 신라 영토의 이권을 평양계 귀족에게 먼저 나눠달라는 말이었다.
한성이 거점이라고 하지만 한수 이남과 비교할 건 아니었다. 그 넓은 땅을 거점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손해를 꾹 참고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그 땅을 모두 달라는 게 아니지요. 한성을 대체할 수 있는 옥토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한데, 한수는 저들에게 내어주기로 했네만.”
“대형의 대계가 어디 한수로만 그치겠습니까.”
당연한 말이다.
백제와 신라는 어떻게든 손을 보아야 한다. 아예 무너뜨릴 수 있다면 가장 좋지만, 어렵다면 팔다리 중 두 개 정도는 부러뜨려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겠네. 약조하지.”
막지리의 약속은 천금보다 무거운 법이다.
고식은 안도하듯 웃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끔 두려워질 정도였습니다”
“대뜸 무슨 말인가?”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줄 생각은 아예 없는 것인가?”
“대형의 속내 말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대체 무슨 말일까.
멀뚱히 쳐다만 봤다.
고식은 내 시선을 받으며 넘기듯 웃었다.
“대형은 평생 웃으며 밥을 나눠주는 분이셨지요. 거짓이나 위선은 없었습니다. 늘 호의만 가득하셨지요.”
“······.”
“농업 개혁을 입안하셨을 때도 대형의 진심을 곡해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농업, 그 자체라고 여겼지요.”
“······.”
“그러나 아니었지요. 대형은 모두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반발하는 귀족에게 얼마든지 거병하라고 호기롭게 도발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거대한 충격이었습니다.”
고식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직 때를 기다리며 늘 웃기만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까. 고구려 전체가 대형의 진짜 모습을 몰랐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나조차도 몰랐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내 의도와 무관하게 왕고덕이 이렇게 평가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늘 웃으며 귀족들의 마음을 얻었고, 이 모든 건 결정적 시기를 위함이었다고 평가될 줄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좋습니다. 누구도 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또 궁금하군.”
“대형의 개혁은 지치고, 변화를 거부했던 고구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만큼 고구려는 침체의 분위기로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침체라.”
“그랬지요. 국시가 남진이었으나 지속되었던 패배는 우리를 움츠리게 했습니다. 그 옛날, 서토를 위협했던 강대한 국세는 그저 전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패권을 논하고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지탱했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하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살아온 세월만큼 어깨에 올려진 짐이 많으니 말이다.
“전통이 부활했을 때 모두가 열광했습니다. 그토록 열의에 찬 우리 귀족의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아니, 처음 보았다고 해야 할까요?”
“······.”
“하면, 된 겁니다.”
고식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형. 누구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누구도 쓰라리다고 인지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
“뒤는 우리가 알아서 잘 해결할 겁니다. 아무런 탈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나아가십시오.”
고식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훗날 과실을 나눌 때가 오겠지요. 바로 그때 고구려답게 시원하게 다퉈보는 겁니다. 그러니 나아가십시오.”
“이런. 그 말은 또 그대로 두렵군.”
“하하하! 고구려인이 쉽사리 변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도 피식 웃으면서 화답하듯 말했다.
“그나저나 아직 거란과 고막해가 당도하지 않았네.”
“하하하. 그건 그대로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동방이 요동칠 것이네.”
“하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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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하(연천군 장단면)부근의 여울은 참으로 강물이 얕아서 말이 도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도모했을 때도 이곳을 지났다는 것 역시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다만, 참으로 오랜 세월 이곳을 거세게 내지르는 기병은 보기 어려웠다.
남북으로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 곳이었으나 신라가 한수 지역을 점령한 뒤 전선의 고착화가 원인이었다.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이곳을 돌격하는 기병대가 있었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앞을 바라보며 거칠게 내달렸다. 말머리가 향하는 곳은 신라의 북방 최전선 중 한 곳이 칠중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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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의 성주는 잠시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뭐라······?”
최전선이었기에 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고구려의 2천 기병이 남하하였다고?”
“그렇습니다.”
“이곳을 향한다고 하였나?”
“분명 그러한데, 무언가 이상합니다.”
“자세히 말하라.”
“굉장한 속도로 남하하는데 굳이 불필요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군은 늘 정예군이었다.
전쟁을 일으켰을 때 약탈보다는 철저한 작전을 수립하여 거점을 타격해내는 무리였다. 한데, 2천의 기병이 여기저기 움직이며 약탈이나 한다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남하하고 있는데 더 이상한 게 있습니다.”
“더 이상한 부분이라니?”
“지금껏 경험한 고구려군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복식도 그러했고, 특히 깃발이 말갈이었습니다.”
“말갈······?”
“정확하게는 말갈국이었습니다.”
“말갈국······?”
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