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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75화 (75/199)

< 75화 백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1) >

75화 백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1)

고구려 왕실의 비사(祕史)를 들은 뒤 상당히 큰 여운이 뇌리를 지배했다. 이는 단지 태자와 공주의 관계성만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노선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고구려의 패권을 갈망하는 평강 공주와 백성에게 쉬지 않고 다가가는 고대원은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떤 방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고구려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또, 막상 이리되고 나니 평강 공주는 과연 고대원을 어찌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물론, 내가 그녀를 찾아가서 이를 물어볼 수는 없다. 듣기에 따라서 왕실의 내분을 조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다.

모처럼 찾아온 이문진의 얼굴은 밝았다. 아니, 맑았다.

이는 영농 후계자 이문진이 참으로 좋은 사업 아이템을 가져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덩달아 내 표정도 맑아졌다.

가볍고 경쾌하게 손을 움직이며 문서를 차르르 넘겼다.

그리고

“음······.”

분명 상당히 좋은 사업 아이템이었다.

시행하면 고구려의 저변에서 상당한 변화 아니,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이문진이 가져온 건 바로 의술의 발전과 관련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인. 소생을 믿어주시면 의술을 크게 일으켜보겠습니다.”

“음.”

“병마로 많은 백성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한다면 어찌 천하가 태평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일세. 의술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킨다면 병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말일세.”

“하하하! 그렇습니다.”

이문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 고구려의 의술은 부족한 건 아닙니다.”

이문진이 허황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시절 고구려의 침술은 굉장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시절 최고의 의술을 보유한 중국에서도 배우고자 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고려노사방’이라는 고구려의 처방은 각기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한 이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종기를 치료할 때는 최면요법 혹은 정신요법에 이르는 의술을 고도로 발전시킨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독보적인 수준에 이른 의술을 보유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다.

그러니까

“하지만, 의술은 여전히 귀족 중심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철저하게 귀족 중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기존의 의술에 서토의 의술까지 잘 엮어낸다면 만백성을 위한 의서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서토의 의술이라.”

“그렇습니다. 대인. 하늘도 우리 고구려를 돕고 있기에 잡아 온 서토인 중에서 의원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들을 잘 회유하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구구절절 옳고 좋은 말만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뭔가 내키지 않았다.

그새 이문진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약재도 잘 확보해야지요. 기존에 우리 고구려는 금설, 은설, 인삼. 세신, 오미자, 곤포, 관동화, 려여, 백부자, 무이, 오공 등 11개의 약재가 풍부합니다. 이 중 곤포, 백부자, 무이는 오직 고구려에서만 산출되며 려여는 천하에서 우리가 으뜸입니다.”

고구려가 수십 개, 수백 개의 약재를 보유한 건 아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몇 안 되는 약재로 의술을 이어왔다. 물론, 고구려 땅에서 구할 약재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또한 귀족 중심으로 의술을 발전시켰기에 폭넓고 대중적인 약재의 확보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의술을 배우고 익혀 고구려식으로 만들어낸다면 이 땅의 모든 풀이 약재로 거듭날 겁니다. 실제로 숨은 약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문진의 말대로 약재와 관련한 영역 역시 중국이 더 발전한 시절이었다.

이를 배우고 익히는 건 자존심이라는 영역과는 전혀 무관했다.

오직 나아가는 길이니, 말이다.

“대인. 소생이 해보겠습니다. 하하하! 우리 백성은 더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한 강인한 의욕이었다.

당연했다.

이문진의 기쁨이 말이다.

늘 백성을 삶을 고민하던 그가 의술에 뜻을 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래.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었다.

단적으로 인구를 늘리자면 출산이 많아야 하고, 사망자의 수가 줄어야 한다.

백성의 수가 곧 국력인 시절이었으니 동의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니, 동의만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원해야 했다.

“지원이라.”

“그렇습니다. 대인.”

“그래. 그래야지.”

그래서 말했다.

“역병을 방비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내게.”

“하하하! 물론입니다. 가장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하게.”

“예?”

“무리하지 말고 수백 명, 수천 명을 동시에 죽일 수 있는 역병을 제압하는 의술‘만’ 잘 다듬어 보라는 말일세.”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내가 계속 마음속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니, 확실하게 내키지 않는 게 있었다.

호랑이로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외교술을 펼쳤던 소설이 있었다.

그 소설을 보면 보건국을 수립하고 온 국력을 동원한 뒤 의술을 발전시켰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위생도 강력하게 보급했다. 그래서 성과를 봤다.

비록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농업 생산력이 우리나라 전근대 왕조 중 최고의 수준에 이른 나라가 바로 조선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고려 말을 거치면서 엉망이 되었던 시절이라고 할지라도 개혁을 단행하면 생산력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더 나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바로 조선 초기였다.

그러니까 그건 조선이었고, 이곳은 고구려다.

그러니까

“한데, 왜 안 죽이려고 하나?”

생명 연장의 꿈이 지금 왜 필요할까?

내가 미친놈일지도 모른다.

정말 최악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을 농업으로 잣대를 세울 수밖에 없다.

처참할 정도로 생산력이 낮은 고구려에서 취할 수 있는 내정 개혁은 정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귀족의 다툼을 종식하고, 군비를 증강하고······이런 건 고민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해야 한다.

한데, 의술의 발전이라는 건 사정이 달랐다.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이 아예 달랐다.

나는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말을 듣지 못하였나? 굳이 왜 안 죽이려고 하나?”

“대인······.”

이문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아니, 아예 당황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진심이었다.

“달리 물어야 하나? 안 죽일 준비는 되어 있나? 나는 이것이 참으로 궁금하다네.”

“대,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살리고자, 죽이지 않고자 의술을 일으키자는 겁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군. 나는 백성을 안 죽인 다음에는 어찌할 건지 물어본 것일세.”

“예······? 어찌 그런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답하군.”

그러니까 내 말은

“고구려가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느냔 말일세.”

그들을 부양할 능력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역량과 밀접한 것이었다.

생명 연장의 꿈.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나, 막무가내로 돌질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평균 수명이 서서히 늘어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 시절 고구려의 역량을 고려할 때 고령인구의 증가는 절대로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농업이 전과 달리 크게 일으켰다고는 할지라도 아직 초입 단계일세.”

아직 고구려의 국고는 가득 채워진 게 아니었다.

아직 고구려의 군량은 100만 대군을 운용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 고구려의 농업은 초라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살려서 어찌할 건가? 고구려가 그들을 먹일 능력은 있나? 아니, 백성은 그리할 여건이 되는가?”

무턱대고 평균 수명을 늘린다······?

이건 선정이 아니라 그냥 반역이었다.

나는 판단해야 한다.

아니, 우리는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과연 고구려는 늘어난 수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즉, 고구려는 준비 태세가 완벽한가.

정책의 기준을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예상치로 확실하게 정리한 나로서는 단호하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우리 백성은 그럴 능력이 없네.”

“대, 대인.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을 제압하고자······.”

“맞네. 우리는 그들을 크게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네. 막대한 물자가 필요하겠지. 이 모든 건 농업의 개혁을 통해 확보한 추가 생산량으로 집행할 것이네.”

“······.”

“군량미를 확충하는 것도 사실이지. 한데, 자네의 안건을 이와 같은 선상에 두지는 말게. 만일, 그리한다면 그건 정말로 반역이니까.”

백성의 수명 그리고 고구려의 전선.

이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게 아니다.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쌀 10석을 더 확보하게 된다면 절반은 군량으로 사용할 것이네. 나머지 5석은 북방의 패권을 도모하는 일에 쓰일 것이네. 그러니 묻겠네.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리는 건 좋은데, 그들은 무엇으로 먹일 것인가? 아니, 약재를 확보하여 백성에게 나눌 수는 있나? 먹기도 어려운데 어디서 약재를 구하나? 설마 이를 그냥 내어줄 망상에 빠진 건 아니라고 여기겠네.”

“그건······.”

“말끝을 흐리지 말고 제대로 답하게. 만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며,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자네의 의견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네.”

평소와는 다른 나의 완강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이문진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하면, 대인께서는 조정이 힘을 기울이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이대로 방치하자는 겁니까?”

“방치가 아니라 여기까지가 딱 우리 수준이라는 걸세.”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생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백성의 더 부유하게 만들 정책을 직접적으로 내놓지는 않습니까? 비단 의술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늘 이러십니다.”

“자네 세상이 아름답나?”

“예······?”

오늘 나는 이문진이 바라보는 세상을 처참하게 짓밟을 생각이었다. 하여, 참으로 잔인하게 말을 꺼냈다.

“그들은 전장에 나설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네. 그러나 막대한 식량이 필요할 것일세.”

일부러 죽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살려도 감당할 수 없다면 무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면, 젊어 고구려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이들을 늙었으니 버리자는 겁니까.”

“원론은 넣게. 나는 현실을 따지는 걸세.”

나는 농업을 중시한다.

지금껏 고구려에 와서 모든 걸 마음대로 했으나 딱 하나 함부로 하지 않은 건 식량을 허비하는 것이었다.

“자네 혹시 우리 백성이 늘 호탕하게 웃고, 생기가 넘친다고 하여 삶이 마냥 아름답다고 여기나?”

“백성의 삶이 아름다운 나라를 일궈야 합니다. 백성이 근본이며 가장 중요하니 말입니다. 기어이 일궈야만 고구려가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패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백성이라고 했나?”

“하면, 아닙니까?”

정말

“천하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나?”

천년 뒤에나 나올 법한 유교적 법치 국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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