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고구려의 발견(2) >
72화 고구려의 발견(2)
고대원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건 갈망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갈망.
잠시 되새겼다.
또한, 나는 어찌하여 이를 고대원에게 말하는가.
그저 태자이기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고대원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말을 이었다.
“전하. 이제 고구려의 하늘을 더 확장해야 합니다. 바로 북방으로 말입니다.”
북방.
이 세계는 고작 두 글자로 담아낼 수 없는 세계였다.
오만한 중국 왕조가 가장 겸손해지는 세계가 바로 북방이었다.
중국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세계도 북방이었다. 통일 중국을 사분오열된 역사가 바로 5호 16국이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중국의 와신상담으로 북방이 크게 물러난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전투의 패배였을 뿐 역사의 패배는 아니었다.
북방의 역사가 곧 승리로 도출되는 건 아니었으나 가장 근접한 시대를 이끌었던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전하. 북방의 역사는 승리로 나아갔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승리로 귀결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한계를 작금의 돌궐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끝내 화북의 역사가 기어이 승리로 귀결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두려운 일인가.
“북방은 아무리 강성할지라도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흐름에 충실한 곳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강성함을 보일 때도 있으나 비루하게 목숨만 연장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북방의 강대함이 기어이 천하의 주인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작금의 돌궐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고작 선대와 지금에 이르는 2대 만에 패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이 말해는 주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즉, 북방은 천하에서 유일한 패권국이 될 역량은 없습니다. 그저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이 시절 하늘은 누구에게도 압도적인 힘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 강대할 수는 있으나 상대가 덜 강대할 뿐이었다. 짓누르거나 짓눌릴 상황은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다. 그저 현상만 나열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지만 화북은 다릅니다.”
중국은 다르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어진 중국사는 패퇴와 극복이었다.
하지만, 내일부터 펼쳐질 중국사는 승리 그리고 오직 승리의 시간이었다.
그 압도적인 승리의 공식은 북방을 집어삼켰다.
“천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 화북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하늘이 정한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흐름을 아예 없애버릴 것입니다.”
물론, 일국의 흥망성쇠는 발생할 것이다.
이는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북을 도모하면 그 어떤 비루한 성질의 나라라고 할지라도 천하 유일의 패권국이 될 것입니다.”
땅이 곧 천하가 될 것이다.
“지금껏 그 어떤 땅도 피하지 못하였던 흥망성쇠의 역사를 덮어버릴 것입니다.”
하여,
“화북은 감히 ‘중원’으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화북은 중원이 된다.
고대원의 눈동자가 살짝 꿈틀거렸다.
흔들린 게 아니라 꿈틀거렸다.
“물론, 북방의 역량은 남아 있기에 여전히 화북을 위협할 것입니다. 때로는 제압하여 다시 그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천하는 바뀌었을 때입니다.”
“대관절 무엇이 달라질 것으로 보는 겁니까.”
“북방이 주도하는 역사가 아니라 ‘중원’을 간절하게 탐하는 무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단지 겨루는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겁니다.”
후대의 북방은 지금처럼 역사의 대결이 아니었다. 오직, 중국의 풍요로움을 탐하는 생존과 강탈의 시대에 불과하다.
이는 북방의 자부심이 상실된 이유다.
“북방은 말할 겁니다. ‘우리는 척박하고, 저들은 풍요롭다. 탐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신라와 백제가 하늘만 바라보듯 그리할 겁니다.”
변방이란 늘 이러한 것이다.
“화북이 중원이라 칭해질 시대는 이미 저들의 힘이 가장 강성함이 입증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북방이 남하할 수 있다는 건 그저 잠시 비루할 때가 전부입니다. 북방은 발전하지 않고 지금도 100년 뒤에도 여전히 같은 힘을 가졌을 뿐인데, 이미 중원이 된 저들은 몇 배의 힘을 가지게 되었으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도태되었을 때 오직 중국의 국력만 팽창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이제 우리가 북방을 취하고자 합니다.”
고구려는 이 모든 흐름을 끊어낼 수 있다.
“오직 우리 고구려만이 넘치는 북방의 힘을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지난 북방의 역사가 보였던 비루함을 모두 걷어내어 오직 패권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장담할 수 있습니까.”
“고구려는 그저 탐하지 않기에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북방은 어찌하여 중원이 될 수 없었는가.
그들은 힘을 사용하는 역사만 답습했기 때문이었다. 더 키워내어, 더 강하게 만들어내지 않았다.
오직 방출하여, 남의 것을 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다르다.
“오직 우리만이 서토의 중원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중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동방의 하늘을 북방으로 확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그저 탐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할 수 있다.
“일찍이 광개토 태왕께서 동방의 패권을 도모할 힘을 일구셨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고구려는 폐하께서 북방의 패권을 가질 기반을 다지고 계십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관을 하나로 묶어내는 대사(大事)다. 당대는 동방과 북방을 잇는 가교(架橋)의 일을 하기에도 버겁다.
하여, 통합된 세계의 주인이 될 자는 바로 고대원이었다.
원 역사의 고대원이 수나라를 압살했다면, 내 앞에 있는 고대원은 진정한 주인일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들 새로운 ‘중원’의 주인 말이다.
“수나라 황제는 참으로 뛰어난 인물입니다. 이는 고구려로서는 축복입니다.”
“적의 황제가 뛰어난데 축복이라.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그가 맹활약하여 돌궐을 쥐어짜 낼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틈을 노릴 겁니다.”
“가령 돌궐의 분열과도 같은 일을 이르는 겁니까?”
“그 또한 하나의 방책이 될 것입니다.”
수나라 양견은 어찌할 것인가.
“수나라 황제는 세폐를 주겠노라 했으나 꺼내지 않을 겁니다. 본국과 돌궐의 분열을 일으키고자 할 계책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천하의 정세는 복잡하게 흘러갔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시하는 건 역시 외교와 분석이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외교가가 고구려의 태왕이었다. 고양성, 그는 천하의 정세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전하. 돌궐은 수나라 황제가 세폐를 언급만 하더라도 원정을 거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원래 세폐였으니 그리하겠지요.”
참으로 한심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어찌 천하의 질서를 규정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로 잡아야 할 전쟁을 준비하면서 세폐에 모든 걸 귀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렇습니다. 수나라가 겁을 먹고 백기를 들었다고 자찬하며 필시 그러할 것입니다. 만일,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지라도 내부의 불화가 터져 나올지도 모르기에 무조건 수용할 겁니다.”
물론, 돌궐이라고 하여 수나라가 세폐를 주지 않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희망을 품을 것이다.
수나라가 다시 전처럼 개밥을 던져줄 것이라는 비루한 희망 말이다.
“만일, 세폐를 받지 못하면 돌궐은 심대한 문제와 봉착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그들은 황급히 원정을 다시 준비하겠으나 그때가 되면 이미 본국과도 관계가 틀어졌을 겁니다.”
“하면, 대대적으로 분열이 발생하겠군요.”
“예. 전하.”
바로 그때 고구려는 시작할 것이다.
“돌궐은 우리의 지원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개밥을 먹는 게 너무나도 익숙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차려준 밥상만 탐하는 무리를 길들이는 건 절대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겠으나 감내할 만하다.
중국이 돌궐에게 세폐를 바친 건 생존과 현실 도피의 결과물이었다. 이길 수 없는 강대한 적을 만났기에 일단 화를 면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와신상담하여 치욕을 되갚았다.
이는 참으로 오랜 세월 반복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차려주는 밥상은 떠돌아다니는 들개를 잡아 길들이는 과정이다. 중국의 왕조처럼 들개가 물까 봐 무서워서 밥을 주고 길을 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번 약탈의 의미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온달의 대승 이후 감행한 약탈은 기주 전역을 초토화했다.
“굳이 농기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대 경작 시대로 돌입하는 작금의 고구려는 사소한 문제조차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미경지를 경작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농기구가 필요하다. 물론, 연자유가 자체적인 철 생산으로 일궈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외부에서 가져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잡아 오는 중국인이 수천에 이르며, 가축의 수도 셀 수가 없다.
이 모든 건 고구려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전하. 북방을 동방과 일치하는 대사의 시발점은 거란과 고막해 그리고 돌궐을 남방으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수나라의 황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계입니다. 하여, 저들은 변화가 급격히 이뤄지는 북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새 수나라가 남정을 꾀하면 어찌할 겁니까.”
“수나라가 만에 하나 남진이라도 꿈꾸면 고구려의 대군이 장성을 넘을 겁니다. 2천이 아닐 20만이 말입니다.”
물론, 격돌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압박만 해도 충분하다.
20만 명을 동원한 무력시위면 수나라는 절대로 경거망동할 수 없다.
“음.”
고대원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리지의 대계는 참으로 잘 들었습니다.”
다시 느끼지만, 고대원은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었다. 백성과 씨름하고 함께 일할 때는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이다. 첫인상만 고려하면 열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천하의 정세를 나누었던 줄곧 말수가 거의 없었다.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느끼기에 따라서 정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저 백성과 함께 뛰어노는 것만 즐기는 인물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만일, 고대원이 영양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선입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누이가 있습니다.”
평강공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사롭게는 누이였으나 왕실의 중추에 해당하지요.”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이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아니, 고대원이라는 거인의 머릿속이 궁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