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구려가 농사도 잘함-71화 (71/199)

< 71화 고구려의 발견(1) >

71화 고구려의 발견(1)

고구려사에 길이 남을 첫 번째 지부상소였다. 주체와 기세 그리고 기승전결 무엇하나 거를 게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 많은 이가 기록될 정사에서 가장 앞에 거론될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평강공주였다.

그녀의 행보는 다시 생각해도 정말 대단했다. 또한, 그 모든 것이 단지 공주라는 지고한 신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건 더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공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었다.

정치라는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와 남매였다.

바로

“하하하! 이 사람아. 누가 지게를 그렇게 든다고 하던가. 이리 주게.”

고구려의 태자 고대원이었다.

사실 왕이 통치하는 전근대에서 개혁을 단행하고, 천년을 기약하고자 할 때 가장 크게 고민이 발생하는 건 역시나 후계자였다.

고양성을 중심으로 아무리 열심히 고구려를 뜯어고칠지라도 후계자가 엉망이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양성의 후계자는 무려 고대원이었다.

원 역사에서 통일 중국인 수나라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4차례에 걸친 침공을 막아내고 상대를 압살한 시대의 명군, 영양왕이었다.

고구려를 이끌고 수나라를 압살한 바로 그 영양왕이었다. 그러한데 통일 중국조차 이루지 못할 수나라가 어찌 고대원의 고구려를 넘볼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

내가 고대원과 실제로 대화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주 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성의 여기저기서 백성들과 웃고 떠들며 무언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는 어김없이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 아니, 오늘은 똥지게를 직접 들고 옮기고 있었다.

일국의 태자인데도 소탈하고 격의 없는 모습이었다. 존재 자체가 압도적인 권위인 평강공주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서 볼 때마다 궁금했다.

과연 고대원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오늘,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왔다.

“막리지.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고대원이 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의복의 곳곳에는 똥물이 튀어 있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한데 내가 어찌 티를 낼 수 있겠는가.

“소인을 찾으셨습니까.”

“아.”

고대원이 손을 내저으며 똥지게를 가리켰다.

“인분 시비법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백성이 똥지게를 옮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업 개혁은 단지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 다양한 삶의 길을 열어내고 있었다.

이는 실로 중요한 현상이었다.

엄밀히 따질 때 고구려는 분명한 고대국가였다. 이러하기에 생계를 꾸려가는 백성의 일이라는 건 다양할 수가 없었다. 애초 농업 생산력도 하루를 버티는 게 전부인 나라였기에 상업이 발전할 수도 없었으며, 그 외 산업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고대원의 말처럼 똥지게를 들고 다니며 인분을 사고파는 현상이 가시화되었다.

대저 인분은 어떠한가.

이는 그냥 생기는 것이다

신분 고하, 나이와 성별과도 관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인분이었다.

이는 만백성이 새로운 생계의 수단으로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를 옮기는 새로운 직업으로도 연결되었다.

단지 농업이 아니라 농업을 지탱하는 새로운 산업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의 역사는 이를 비료 산업의 시작이라고 이를 것이다.

“내가 백성과 이를 함께 경험하니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일러주신다면 소인이 상황을 파악하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똥지게를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시비법을 인분으로만 할 수는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전하.”

“하면, 인분 외의 시비법을 더 확충하면 백성들이 미리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생각이었다.

인분을 사용하는 게 최고의 시비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도 그렇듯 인분의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게 될 것이다.

인분이 곧 금값이 되는 세상.

고도로 농업이 발전하여 시비법을 일궈내는 세상이 수년 내로 열린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이제 막 농업에 손을 댄 고구려에서 이런 세상을 벌써 꿈꾼다는 게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조선도 후기에서 겨우 발을 들이밀었기에 때가 이르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조선에서나 그런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뤄졌기에 한양 도성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선과 철저하게 지방 분권이 이뤄졌고, 귀족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구려는 사정이 아예 다르다.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소인이 이를 잘 살펴서 일을 진행할 것입니다.”

“오. 새로운 농법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넘치고 넘친다.

원래 차츰 보급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를 미리 알리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의지가 있는 백성이라면 그 길 역시 개척할 것이니 말이다.

“하면, 뜻이 있는 백성을 따로 모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한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왕실에서도 많은 경작지를 꾸리고 있습니다. 백성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거나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새로운 시비법을 도입하더라도 아직은 인분이 강세다. 여전히 인분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전면적으로 생계를 틀어버린다는 건 참으로 도박성이 짙다.

이 위험 부담을 왕실의 경작지에서 부담하겠다는 말이었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대원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어차피 고구려에는 없던 수익을 창출하는 겁니다. 손해가 아니니 아무런 탈이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장담하시니 소인이 어찌 더는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그래.

이 길 역시 고구려의 변혁을 일궈낼 것이다.

“그나저나······.”

고대원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나 역시 발걸음을 맞추며 그를 따랐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말을 아끼던 고대원의 입이 열렸다.

“막리지. 그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르십시오. 전하.”

“어찌하여 남방의 일을 말갈, 거란, 고막해에게 일임한 것인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고구려의 국세만 바라보면 응당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건 본질적인 기조입니다.”

이는 지부상소의 역사적 의미를 관통하는 물음이었다. 명확하게

약탈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시였던 남진의 주체가 누구냐로 귀결되는 사안이기도 했다.

하여, 정확한 물음이었다.

나는 걸음의 보폭을 일정하게 하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전하. 천년의 역사는 늘 승리하거나 정확한 선택을 하였던 세월이 아닙니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쓰라린 패배와 가슴 저리게 하는 안타까운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천년의 성공과 실패가 고구려의 저력입니다. 이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는 무슨 말인가.

“일찍이 우리는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작금의 고구려는 실패의 길을 걷지 않도록 하고자 합니다.”

“실패의 길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시행착오를 경험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삼국 통일을 일궈내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 해낼 수 있었던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백제와 신라의 실체적인 힘을 떠나서 고구려의 국세가 가장 강성했던 시절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능했을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고작 그들의 숨통을 끊어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버리지 못한 게 원인이 아닙니다.”

“······.”

“아니, 어쩌면 고구려의 힘이 부족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를 기어이 무너뜨릴 국력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면, 시행착오가 아니라 한계가 되어야 합니다. 한데, 소인은 이를 시행착오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백제와 신라의 천하를 확장시켜준 것입니다.”

이것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키기는커녕 그들의 세계관을 넓고 광활한 천하로 이끌었다.

특히 문제는 신라였다.

고구려는 신라인의 눈에 천하를 보여주었다.

고구려가 그들의 두 발이 천하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신라는 변방의 소국이었습니다. 바라볼 필요도 없는 존재조차 희미한 나라였습니다. 광개토 태왕께서 그 비루한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기어이 나서야 했다면 여기까지였어야 한다.

“그저 숨만 쉬게 두었어야 합니다. 한데, 우리는 그들에게 천하를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동방의 하늘, 고구려의 그늘에 국한 시켰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해내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감히 고구려의 옥토를 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시행착오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작금의 방책은 저들의 세계를 다시 고구려의 그늘, 동방으로 국한하게 할 겁니다.”

감히

“북진을 꾀할 수 없을 겁니다.”

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제 땅을 지키는 것도 버거울 것입니다.”

야욕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고작

“고구려가 가진 광활한 세계의 일부에 불과할 겁니다.”

거란, 말갈, 고막해와 싸우며 비루한 역사가 끝이 날 것이다.

이것이

“이를 위함입니다.”

그들의 위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와 신라의 시간도 참으로 장구합니다. 한데, 그들은 천하를 움켜쥐고자 나선 적이 없기에 저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그저 시간에 불과합니다.”

고구려의 역사가 이길 수밖에 없다.

“동방의 하늘은 오직 고구려입니다.”

다시 말했다.

“인간은 감히 하늘이 내리는 권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종국에는 기우제를 지내고 고개를 숙입니다. 백제와 신라는 그리될 것입니다.”

대계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의 선대가 내린 천하를 다시 거둘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하늘을 치우고 고구려의 하늘이 찬란하게 동방을 뒤덮을 것이다.

“전하.”

우리의 선대가 저들에게 천하를 보여주었다.

“저들은 천하를 바라만 볼 뿐, 손가락 하나 뻗지 못합니다.”

본다고 하여 비루함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더 비루해질 뿐이다.

“뻗지 못하면 쳐다도 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덧붙였다.

“눈을 뽑아서라도 그리해야 합니다.”

고대원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멀찍이서 웃고 떠드는 백성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참으로 바라만 봐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성군의 자질을 갖췄다고 말한다.

“막리지.”

“예. 전하.”

“하면, 묻겠습니다. 고구려의 천하란 과연 무엇입니까.”

고구려의 천하.

“영원한 천하입니다.”

불멸의 역사다.

어찌하여 불멸의 길로 갈 수 있는가.

“이미 남진의 역사가 곧 시행착오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바로 잡을 것이며, 새로이 구축할 북방의 역사에서는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북방은 고구려가 반드시 담보해야 할 세계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