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개황의 치 >
69화 개황의 치
주지했듯 유력 귀족 가문에서는 농학자를 확보하고자 식객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농학자가 되기 위한 관문인 과거시험은 고작 천자문을 확인하는 수준이었기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문진이 집행하는 농업 개혁에서도 실무 인원의 부족 현상이 두드러졌기에 대대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바가 있다.
현재 유생의 구조는 양분화되어 있었다. 이건 의도성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레 이뤄진 현상이었다.
그러니까 유생의 분포는 정말 평범했던 백성과 원래 먹물을 먹었던 식객 출신이었다.
여기서 후자는 기존에 완성된 학자형이었기에 주로 이문진의 지시에 따라서 고구려 전역을 누비며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반면, 전자는 완성된 학자가 아니었기에 평양 도성과 인근을 머물며 철저하게 의연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지부상소를 주도한 이들은 평범한 백성 출신의 유생들이었다.
물론, 식객 출신들도 실무를 보느라 바쁠 뿐 기본적으로 고구려 출신이기에 약탈을 선호하는 이들이긴 했다. 그저 지부상소에 참여하지 못하여 도끼를 하사받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데, 오늘 평강공주가 가문 당 50명의 유생을 추가로 언급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우리 백성은 참으로 총명합니다. 그들에게 글자를 익힐 기회를 내려 유생의 길을 걷도록 하는 아름다운 일에 답하지 않는 건 내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불쾌합니다.”
즉, 식객 출신의 유생이 아닌 아예 새로 꾸려오라는 의미였다. 이리하면 고구려 유생의 수는 순식간에 천 명을 넘게 된다.
하면, 이들을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폐하께서 이미 200명의 유생에게 부월을 내리셨습니다.”
부월.
군왕이 내리는 군권의 상징이다.
한데, 유생이 통제할 수 있는 병력은 없다.
그러니까 이는
“고구려의 유생도 점차 위계를 가질 것입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부월은 바로 그 시발점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새롭게 결합하는 유생은 그들의 지휘를 받는 부월수로 거듭날 것입니다.”
유학자의 병력화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평강공주의 유려한 언변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사대부.”
대관절 사대부란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유학은 고구려의 국시가 아니다.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복무하게 된다. 이는 필히 그러했다.
“맹도가 말했습니다. 서토의 역성을 결정할 천명은 오직 고구려에 있다고 말입니다. 하면, 사대부란 천명을 수행할 태왕 폐하의 근위대인 겁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 고구려의 정기를 지키는 이들이기에 사대부입니다.”
“······.”
“왕족이 아니며 귀족도 아니지만, 왕가를 사수하고 고구려를 나아가게 할 그들이기에 사대부라고 부릅니다.”
“······.”
“한데, 귀족이 50명의 유생도 새롭게 끌어내지 못하는 겁니까? 하면, 이 나라 고구려의 위정자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유학이 고구려의 국시가 아니기에 사대부는 위정자가 아니다. 그들은 고구려의 한 부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고구려의 위정자는 귀족이었다.
“고작 사대부가 고구려의 영광을 위하여 도끼를 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한데, 귀족은 고작 실무적인 일도 하지 못한다면 이건 대체 어찌 여겨야 합니까?”
“······.”
“태왕 폐하의 의지를 전하였거늘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공들을 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최후 통보였다.
“반론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하길 바랍니다.”
누가 감히 그녀의 말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원래도 압도적인 여인이었으나 온달이 대승을 일궈내면서 평강공주는 철저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무리하여 권력을 강화한 게 아니라 그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새기세요.”
그녀가 말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고구려의 승리는 확정적이며, 패배에 내어줄 여백은 없습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예견하고 있다.
“위정자. 바로 귀족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야 할 겁니다. 그래야만 고구려사에 귀공들의 자리가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누구의 반론도 없었다. 불편함을 표출하는 이도 불만을 삼키는 이도 없었다. 하여, 사대부는 더 확충될 것이다.
더불어 이주 정책을 비롯한 평양계 귀족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는 터져 나올 수 없는 시대의 개막이 선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오직 공주의 역량만으로 도출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녀의 정확한 화법이 지극한 사실을 수면 위로 끌어낸 것이다.
사대부 그리고 위정자.
백성 그리고 귀족.
지부상소 그리고 고구려.
기층에서 분출된 위대한 고구려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모든 사안의 대의명분으로 아로새겨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나는 이 땅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은 현상을 보고 있었다.
피지배계층이 단호한 결의가 지배계층을 이끌어 일국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역사였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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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황제 양견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우측으로 뒤틀며 왼손으로 수염을 만질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 차분하고 무던한 듯 보였다.
눈동자는 번잡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눈가의 주름도 불편하게 요동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가볍게 움직이며 종이를 잡았다. 자연스레 종이가 펄럭이듯 설쳤으나 막상 그의 손은 아무런 떨림이 없었다.
“음.”
참으로 오랜만에 양견의 입에서 ‘소리’라는 게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단 한 음절에 불과했으며, 특별한 감정이 실린 게 아니었기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장면을 바라보는 고경과 소위는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분노를 표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충격적인 패배가 발생했는데도 황제는 너무나도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기주의 소와 돼지 그리고 닭과 양을 모조리 약탈했다고 하오. 허. 이리하면 기주의 백성은 참으로 손해가 막심하지 않겠소?”
양견은 내정을 언급했다.
민심을 걱정하고 있었다.
황제가 민심을 챙기고 내정을 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작금의 정세는 철저한 전시였다. 당면한 일이 너무나도 엄중한데 내정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지금 양견의 반응은 정상의 궤를 벗어난 게 확실했다. 결국, 보다 못한 소위가 나섰다.
“폐하. 고정하셔야 하옵니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오? 설마 내가 거대한 패배의 소식을 접하고 실성이라도 한 것 같소? 아니외다.”
거대한 패배와 실성 그리고 아니다.
양견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는 수염을 만지던 왼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싸워 패배하였소. 그러니 약탈에 노출되는 건 당연한 일이외다. 그러한데 뭐 하러 화를 내겠소? 이리하면 감정에 지배당할 것이니 황제로서 적합하지 않소. 이는 암군의 일이외다. 지금 내게 요구되는 건 가장 철저한 반격이외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태도였다.
“황공하옵니다. 신이 실언하였사옵니다. 하온데, 반격이라고 하셨사옵니다. 대군을 출병하여 저들을 벌하실 것이옵니까?”
“그럴 생각은 없소. 그냥 둘 생각이외다.”
“먼 나라로 원정 가는 건 어려운 일이옵니다. 하오나, 이를 이리 둔다면 또 탈이 날 수밖에 없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냥 두고자 하시옵니까.”
“내 말을 오해하셨소. 나는 기주를 내어준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패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수용한다는 말이외다.”
양견의 말이 이어졌다.
“현실을 인지해야만 제대로 된 반격을 도모할 수 있소. 지금 내가 선택해야 할 반격은 침묵이오.”
그의 말은 빠르지 않았다.
그리고 느리지도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차분했다.
“아군의 패배와 기주의 약탈이 뼈아픈 건 사실이오. 한데, 말이외다. 우리는 이 일로 아주 중요한 걸 얻었소.”
문서의 위를 서서히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고구려의 부마가 선봉에 섰고, 전투 직후 고막해족과 거란족이 대대적으로 기주 전역을 약탈했소. 이는 늘 눈치를 살피던 두 부족이 철저하게 고구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오. 하면, 어찌 되겠소?”
“신이 패전의 충격에 빠졌기에 눈이 흐려졌사옵니다. 하오나 뒤늦게라도 깨달았사옵니다.”
지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소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구려와 돌궐은 군사 동맹을 체결했사옵니다. 한데, 이번 전투와 약탈에서 돌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사옵니다. 본국과 생사결을 결의한 적들이기에 틈을 보지 않고 타격하는 게 옳사옵니다. 하온데, 그러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렇소. 우리를 크게 궁지로 몰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시도하지 않았소. 이는 기주의 일에 양측은 합의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사안이 있었다.
“고구려의 부마 온달이 2천의 기병으로 아군을 물리쳤소. 참으로 놀랍지 않소?”
“그러하옵니다. 신 역시 참으로 놀랐사옵니다.”
고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내가 의아한 건 이토록 대단한 능력을 갖춘 온달이 왜 고작 2천의 병력으로 아군과 전투를 치루었다는 사실이오. 일신의 무위와 병법에 자신이 있더라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전투였으니 말이오. 가볍게 여길 때 고구려는 귀족의 내분이 심하기에 그를 토사구팽하였을 수도 있소. 그런데 이는 아니오. 어불성설이오.”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고구려는 극심한 내전이 발생하지만,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는 늘 공고하게 단결했소. 본국에 선전포고한 고구려가 그런 명장을 죽이고자 내쳤다? 어림도 없소.”
양견은 확신했다.
“고구려는 기주의 일을 계획한 것이 아니오. 2천은 약탈의 병력이었소. 그러나 때마침 아군이 북상하였기에 온달은 공세를 펼친 것이었소.”
“물러서도 될 일이었사옵니다. 그러한데 온달은 싸움을 택했사옵니다.”
“고구려가 반드시 그리해야 할 이유. 바로 거란족과 고막해족이외다.”
추론의 근거는 차고 넘쳤다.
“늘 세력의 눈치를 살피는 간악한 무리외다. 언제 배신할지도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족속이 바로 거란족과 고막해족이오. 보시오. 그들은 온달의 전투에 결합하지 않았소. 하지만, 고구려가 승리를 일궈내자 온 힘을 다하여 기주를 약탈했소. 이는 물자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오. 마치 간절하게 바라보며 한 것이오.”
하면, 누구를 간절하게 바라본 것인가.
“고구려에 대한 뜨거운 구애.”
드디어 양견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자리 잡았다.
“늘 장성을 탐하지 않았던 고구려가 결사의 각오를 보이자 불나방처럼 구애하는 것이외다.”
“폐하. 고구려가 그토록 결사의 각오로 나선 이유는 명확하옵니다.”
소위는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했다.
그러기에 의도 또한 볼 수 있었다.
“북방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돌궐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것이옵니다.”
“그렇소.”
양견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란족과 고막해는 북향의 풍향계요. 그들이 신속을 청하는 이가 북방을 주도하는 것이외다. 한데, 고구려가 명확하게 품었으니 돌궐은 참으로 불편할 것이외다.”
“그러하니 뒤늦게라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옵니다. 지금 자신들이 대군을 출병하여 장성 이남을 어찌한들 승리의 주역은 고구려가 될 것이니 말이옵니다.”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오. 만일 돌궐이 고구려를 경쟁 세력으로 의식하지 않았다면 기회가 왔으니 소수의 병력이라도 보냈을 것이외다. 한데, 움직임이 없소.”
양견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양국의 불화는 시작된 것이오.”
“아군의 패배가 뼈아프지만 결국, 북방의 분열로 연결되었사옵니다. 폐하. 뿌리가 얕은 돌궐은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렇소. 또한, 고구려와 경쟁하는 돌궐은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장성을 넘을 수 없소.”
결론은 내려졌다.
“달해장유에게 1만의 병력을 내려 기주의 약탈을 대비하게 하시오.”
백 승의 명장인 달해장유였기에 적의 약탈에 적절하게 대비할 것이다.
다만, 규모가 1만이라는 게 의아하였다.
“오직 장성만 굳게 지키면 될 것이오. 우리가 무리할 필요는 없는 정세를 개막할 것이니 말이외다.”
군사적으로 무리하지 않는다는 건 곧, 외교의 승리를 도출하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돌궐에 세폐를 바쳐야겠소.”
“폐하.”
“아. 물론 시일을 끌어 내어주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 기간 돌궐은 고구려와 반목할 것이며, 북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될 것이외다.”
소위는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폐하. 신이 가겠사옵니다.”
당대 최고의 명재상인 소위라면 외교를 어렵지 않게 소화할 것이다.
“그리해주시겠소?”
“신이 어찌 몸을 사리겠사옵니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기어이 해야 할 일이옵니다. 신이 기어이 돌궐과 고구려의 반목을 끌어낼 것이옵니다.”
“공이 해낸다면 기어이 그리될 것이외다.”
북방은 여기까지였다.
남은 건 남방이었다.
“적의 공세가 이토록 치열하오. 하면, 필시 진나라도 손을 보탰을 것이외다.”
“그러하옵니다.”
진나라의 움직임을 주시해온 고경이 말을 이었다.
“이미 진나라의 주라후가 대군의 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사옵니다.”
“필시 시일을 맞춰 북진하고자 할 것이외다. 아니, 그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봐야 할 정세요. 하여, 나는 이 모든 걸 미연에 제압할 것이오.”
“신이 진나라를 견제하겠사옵니다.”
“10만의 군세를 내릴 것이오. 진의 공세를 대비하시오. 그들은 기어이 북상할 것이니 말이오. 아니, 틈이 보이면 급소를 취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기주의 패배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에 모든 것이 개운해졌다.
남은 건 모든 적의 공세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양견은 자신이 있었다.
“절대로 잊지 마시오. 우리의 대적은 돌궐이오. 그들의 발목을 잡아야 하오. 그래야만 본국이 천하의 주인으로 거듭날 것이니 말이외다.”
말을 보태었다.
“한 번의 틈이 발생할 때 급소를 찔러야 하오. 시작은 고구려와의 반목을 유도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돌궐의 영원한 분열이외다.”
기어이 일궈야 할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