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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68화 (68/199)

< 68화 평강공주 >

68화 평강공주

고구려의 지부상소는 조선과 달랐다.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겠다는 각오를 대외적으로 밝히는 결의대회였다.

그러기에 한번 도끼를 꺼내면 무조건 피를 봐야 한다. 피의 주인이 적일 수도 있고, 자신들일 수도 있다.

하여, 지부상소는 곧 출정식이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지고한 신념이 표출된 것이다.

고구려 지부상소 사(史)의 첫 장에 기록될 기념비적인 일이었으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해당 사안은 단지 ‘약탈’을 허락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작 말갈족만이 아니었다. 차후 진입할 거란족과 고막해족까지 고려할 때 고구려 유생이 신라 약탈의 선봉이 서는 건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작금의 사안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5부를 6부 아니 8부로 확장하는 중차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부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봤다. 기어이 목을 치고야 말겠노라고 나선 그들의 광기를 말이다.

장담할 수 있는데 고양성이 화끈한 비답을 내리지 않으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날 것이다.

힘겹게 양성한 2백 유생이 허무하게 사라질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이리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하하하! 과연 고구려의 유생이로다!”

고양성은 이러고 있다.

“이토록 기개가 넘치다니! 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사대부라면 응당 이래야 하는 법이외다.”

태왕으로서는 백성의 기특함이 마냥 기쁠 수는 있다. 그러나 본질은 결의와 결심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였다. 아니, 백년대계였다.

“폐하. 사안은 절대로 가볍지 않사옵니다. 신라 약탈은 말갈, 거란, 고막해가 담당하기로 했사옵니다.”

“그렇소. 그러기로 했소.”

“하온데, 우리 유생을 보내면 탈이 날 수밖에 없사옵니다.”

“우리 유생 200명이면 한수 약탈 전선이 꽉 차긴 할 것이오. 조기에 약탈 종말점이 도래할지도 모르오.”

“그러하옵니다. 이주해올 저들은 신라 약탈을 삼분할 것이라는 기대로 부풀어 있사옵니다. 한데, 우리 유생이 도끼를 들고 나아가 약탈 종말점을 일궈낸다면 불만을 폭발할 것이옵니다. 절대로 좋은 상황이 아니옵니다.”

정확한 본질이었다.

밥 산다고 부르길래 갔더니 빈 공기만 남아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열 받지.

그런데 고양성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건 문제가 아니외다.”

“어찌하여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옵니까.”

“막리지. 사안은 중차대하오. 한데, 복잡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소. 간단하게 살피시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유생이 지부상소를 감행했소. 한데, 내가 반려하면 저들은 죽소. 게다가 내용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소. 하면, 어찌해야 하오?”

완벽한 정리가 이어졌다.

“보내야 하오. 무조건.”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금 우리가 고민할 건 말갈, 거란, 고막해가 아니오. 막리지. 절대로 잊지 마시오.”

“······.”

“작금의 이주는 저들의 안락함을 담보하기 위함이 아니외다. 오직 우리 고구려의 국익을 위해서 단행되는 것이오.”

머리가 둔기로 맞은 것만 같았다.

그래. 고양성의 말이 옳았다.

지금 나는 과하게 저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 말이 초안을 어기거나 신뢰를 깨도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고구려의 국익이라는 원칙과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거란, 고막해, 말갈의 이권을 중심으로 지부상소를 바라본 것이다.

고구려의 막리지가 말이다.

“수나라, 진나라, 신라를 상대로는 그토록 당차던 막리지가 왜 말갈의 눈치를 보시오?”

아니, 난 눈치를 본 게 아니었다.

동화를 일궈내기 위한 유화책을 고민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묘수를 찾으면 된다.

“신이 불민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사옵니다.”

“하하하. 되었소. 하면,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해법은 이미 찾았사옵니다.”

“그렇소? 무엇이오?”

“폐하께서 비답을 내리시어 약탈을 윤허하여주시옵소서.”

고양성은 피식 웃었다.

“우직한 강행이라. 이것이 막리지의 해법이오?”

“그러하옵니다.”

“하면, 묻겠소. 그들의 반발을 어찌 무마할 것이오.”

“약조를 지킬 것인데 어찌 반발이 나오겠사옵니까.”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들이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아니라 어차피 ‘우리’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들도 고구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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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터지는 전투에서 중요하지 않은 병과는 없다.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충실히 역할을 다해야만 기어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고 하여 최종적으로 도출되는 ‘값’이 같을 수는 없었다.

이러하기에 기병이 더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지부상소는 전통적으로 도출되었던 값을 아예 바꿔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안학궁의 앞을 ‘부월수’가 지배하면서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하하! 나는 자네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네. 기어이 지부상소를 일궈내다니 말일세.”

의연은 호탕하게 웃으며 유생들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긴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 모든 건 스승님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진실을 뚫어보는 건 유생이 가져야 할 덕목이지. 그러하니 자네는 참으로 탁월한 것일세.”

“하하하! 참으로 정확한 안목이십니다. 소생은 스승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데, 스승님.”

“하하하! 어서 말하게.”

“제자의 도리로 스승님의 말씀에 답한 것입니다.”

“음? 무슨 말인가?”

의연이 다소 당황한 듯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유생은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목숨을 건 지부상소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오직 태왕 폐하의 비답을 기다리며 결의를 다지는 것이지요.”

“······.”

“이 엄숙한 자리에서 사사로운 인연에 입각한 대화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소생들은 진실로 이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 된 도리는 이 정도가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

한 마디로 더는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니 물러나달라는 의미였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의 의젓한 모습에 감격한 것일까? 의연은 계속 눈만 껌뻑였다.

그러자

“스승님께서도 함께 도끼를 들겠습니까?”

유생들이 그물을 던졌다.

물론,

“나는 불자일세.”

의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내게 도끼를 허락하지 않으셨네.”

반론의 여지가 없는 타당한 말이었기에 유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의연이 불자이긴 했으니 말이다.

“하면, 소생들은 소생의 길을 가겠습니다.”

“응당 그리해야 할 것이네. 자네들의 길이 곧 고구려의 길이니 말일세.”

의연은 스승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다가 뒷사람과 툭 부딪혔다.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가느다란 눈이 보였다.

“허. 자네였나?”

“그렇습니다.”

가서일이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소생은 지부상소를 모조리 지켜봐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습니다.”

“이런.”

장인의 고집을 느낀 의연은 멋쩍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폐하! 기어이 신들의 간곡한 청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목을 치겠사옵니다!”

지부상소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의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폐하! 어찌하여 신라 약탈의 즐거움을 말갈에게 양보하라고 하시옵니까!”

“신들이 옹졸하고 편협해 보이실 수도 있사오나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신들은 이를 포기할 수 없사옵니다.”

“약탈은 우리의 생명이옵니다.”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누구라도 이를 막을 수 없을 수준이었다.

“폐하! 신들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고작 신라 따위를 약탈하는데 어찌 이토록 장고를 거듭하시옵니까.”

“설마 신들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오늘 일몰까지이옵니다. 기어이 비답을 내리시지 않으시면 지부상소의 끝을 볼 것이옵니다.”

“신들의 도끼는 날카롭고, 맹수와도 같사옵니다!”

해 떨어지기 전까지 윤허하지 않으면 중대 결단을 내리겠다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그때였다.

“자네들의 목숨은 고구려의 기상이거늘 어찌 섣불리 끝을 보려는 것인가.”

안학궁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2백 유생의 기세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조정의 일을 하루에 결정하라는 건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아무리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아니 될 것이네. 이는 바로 잡아야 마땅하네. 차분하게 결의를 다지며 며칠이 걸릴지라도 기어이 관철해야 하는 게 지부상소의 묘미이거늘.”

유생들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상대는 고구려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백성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부상소를 행하고 있다. 폐하께서 오시더라도 자리를 고수해야 하거늘 어찌 경거망동하는가.”

평강공주였다.

그의 날카로운 일갈에 유생들은 실수를 깨달았다. 감히 숭고한 지부상소를 하는데 공주에 대한 예를 차리고자 이탈을 감행할 뻔하지 않았는가.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대 실수였다.

평강공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들은 아직도 부족하네. 이래서 어찌 고구려 사대부의 기개를 품었다고 하겠는가. 참으로 애석하도다.”

유생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백성의 흠모를 받는 평강공주의 입에서 실망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오물에 빠져도 이보다 참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물론,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오늘 자네들이 보인 의기와 기개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기에 어찌 탓만 할 수 있겠나.”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폐하께서 비답을 내리셨다. 모두 예를 취하라.”

태왕의 결정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유생들은 일제히 자세를 고쳐잡았고, 도끼를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유생마다 준마 2필을 내리실 것이다.”

“······.”

“또한, 활과 화살을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싱긋 웃었다.

웃음에는 기쁨과 담대함이 담겨 있었다.

“고구려 왕가의 상징, 태양을 새긴 부월을 모두에게 내릴 것이다.”

이는

“너희는 한 명의 유생이 아니라 장차 고구려의 보루로서 다수의 지휘할 부월수가 될 것이니 각오를 새로 하고 기어이 나아가 우리의 태양이 유일한 태양임을 알려야 할 것이다.”

약탈의 창군을 의미하였다.

압도적인 왕명이었다.

하여, 고요했다.

평강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가서일 역시 경거망동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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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토록 빠르게 지부상소가 감행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단지 보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유생은 농법을 보급하고 농업 개혁을 추진하는 핵심이었는데 이대로 약탈을 떠나면 상당한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서서히 역량이 무르익었을 때는 유생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기층에서 자체적으로 농법을 집행하게 될 것이다. 다만, 아직은 이리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애석한 부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평강공주가 귀족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가문마다 유생 50명을 배출하지요.”

다들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누구도 답하지 않는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공기가 얼었다.

정치적으로는

“내가 결정하였는데 답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그녀가

“감히.”

고구려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이는 대대로가 공석인데도 탈이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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