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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67화 (67/199)

< 67화 지부상소 [유료화 시작] >

67화 지부상소

개혁이란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위대하기에 백 년의 대계를 집행함에도 순탄하게 이뤄졌다. 필시 이러했기에 모든 건 순풍에 돛단 듯 이뤄졌다.

그런데 밥상 다 차려서 수저 들려고 하는데 구시렁거리는 무리가 등장했다. 놀랍게도 평양계 귀족이었다.

“대인.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복어처럼 볼이 부풀러 오른 상태였다.

사실 이주 지역이 평양계 귀족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이었기에 반발은 당연히 예상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어이가 없는 건 그간 조용하다가 대뜸 이래서였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본진을 버리고 고구려의 심장부로 이주하는 일이었다. 이게 말처럼 간단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라도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한데, 막상 일이 미친 속도로 진행되니 화들짝 놀라서 나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아니, 이게 또 여기까지 와서 이들의 말을 들어줄 수도 없다. 오고 있는 말갈족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명실상부 평양계 귀족의 수장이었기에 이들의 고충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런······나는 전혀 몰랐네. 자네들이 이렇게 고민이 많은 줄이야. 정말로 아예 몰랐네.”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가불기를 걸어야지.

“이 사람들아. 반대할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반대했어야지. 일이 다 진행됐는데 대뜸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나는 진실로 자네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무언의 찬성을 하는 줄 알았네. 하여, 역시 우리 평양계 귀족은 오직 고구려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모든 걸 내놓는다고 여겼지 않은가. 나는 참으로 자부심을 느꼈네. 어디 나만 그러하겠는가? 폐하께서는 옥루(玉淚)를 흘리시며 감격하셨고, 국내계 귀족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네. 바야흐로 우리 평양계가 고구려의 역사와 전통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네. 한데, 이게 뭔가? 그간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휴. 되었네. 내가 비밀로 해줄 테니 조용히 물러가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네.”

숨도 안 쉬고 일장 연설을 했다.

평양계 귀족들은 눈을 껌뻑이면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만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길을 마음껏 걸었다.

“자부심이 부끄러움으로 바뀌는 게 이토록 쉬울 줄이야. 참으로 개탄스럽군.”

뒤로는 무슨 짓을 할 수가 있다.

속으로 나를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를 더 따지기에는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

“이 문제를 더 거론하지 말게. 게다가 안학궁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굳이 내게 앓는 소리를 할 생각이었다면 사가로 찾아왔어야지.”

물론, 지나친 압박은 늘 탈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 확실한 약속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길지 않을 것이네. 일시적으로 그들을 모아내는 것에 불과하네. 한수를 도모하면 다 내려갈 것이니 잠시만 인내하시게. 하면, 어려움은 없을 것이네.”

“대인께서 오해하신 거 같습니다.”

“오해라고 했나? 하면, 말해보게. 내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말일세.”

적당하게 타협점을 내밀 게 뻔했다.

그래도 일단은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대, 대인!”

사색이 된 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위 관등의 귀족이 논의하는데 대뜸 이렇게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이기에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그러나? 대체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한 것인가?”

“지, 지부상소가 발생했습니다.”

“뭐······?”

갑자기······?

아니, 그건 내가 보급하라고 한 건 맞는데 지금 그럴 사안이 있었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해명을 바라는 눈으로 빤히 쳐다봤다.

“신라 약탈의 대업을 말갈족에게 양보할 수 없다며 출정을 선언했습니다.”

“뭐······?”

“만일,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면 당장 목을 자진해서 치겠답니다.”

“······.”

이 나라의 유생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양계 귀족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들이 오해라고 한 부분이 이토록 의기가 넘치는 일이길 바랄 뿐이네.”

유생이라고 부르지만, 출신의 절대다수는 백성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백성이 귀족보다 앞선 결의를 꺼낸 것이다. 여기에 섣불리 나설 정도로 우매한 이들은 없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고구려의 5부가 6부, 7부, 8부로 나아가려는 이때 고작 정파의 이권을 앞세우는 일을 내가 보고 듣지 않도록 해주게.”

“······.”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기특한 우리 유생들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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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한 유생들을 보러 왔는데······음.

“왕 대인이다!”

“왕 대인이 저기 있다!”

“우리의 자존심을 긁어서 바닥에 버린 왕 대인이 저기에 있다!”

이거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200명이 넘는 마동석 같은 유생들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보고 고함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긴 유에 고를 입고 허리는 대를 맨 옷고름이 달린 복색이었다. 그러니까 부월수의 옷 그 자체였다.

이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보는 눈만 없으면 최선을 다하여 도주하고 싶은 정도였다. 진심으로. 피를 토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아니, 이건 거의 본능의 영역이었다. 기특한 우리 유생들과 대화를 나누긴 해야 하는데 심장이 너무 놀라버린 것이다.

“대인. 괜찮으십니까?”

“음?”

“식은땀을 흘리십니다.”

관리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그만큼 내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좋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리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해일세.”

“예? 오해라니요? 땀을 이렇게 흘리시는데······.”

“오해가 확실하네.”

“관세음보살께서도 보고 계십니다.”

“오늘 그분께서 피곤하신가 보군.”

“아니······.”

그리고 그때

“왕 대인!”

지부상소를 하던 유생들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난 건 일어난 건데 갑자기 대열을 맞추는 게 아닌가? 간격까지 자로 잰 듯 반듯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서 한발, 한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 손으로 든 도끼를 어깨에 올리고 지탱한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지나가다가 봤으면 출정하는 정예군으로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막상 이렇게 되니 상황 파악이 됐다.

······가두시위라니.

참으로 선진적인 고구려인들이었다.

아니, 무슨 연좌를 하면서 움직인단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왕의 비답이나 기다려야지. 대체 누가 이런 걸 알려줬단 말인가.

그런데

“왕 대인!”

대뜸 내 앞에 앉아버렸다.

“대인. 해명하십시오.”

“오해가 있네.”

그러자

-콰앙!

-콰앙!

-콰앙!

-콰앙!

······

-콰앙!

200여 개의 도끼가 일제히 바닥을 찍었다.

소리는 어찌나 묵직한지 모르겠다.

“······.”

참고로 저들이 들고 있는 도끼는 예사로운 도끼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적은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사이즈였다. 애초에 저걸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사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찌하여 소인들을 두고 말갈족에게 신라 약탈의 기회를 넘기시는 겁니까?”

“소인들이 이리하려고 유학을 익혔나 자괴감이 듭니다.”

나도 이 꼴을 보자고 유학을 보급하고, 지부상소를 세상에 꺼냈나 자괴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사상 초유의 지부상소를 구경하러 온 게 아니다. 요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국정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분위기를 환기하듯 소매를 내저었다.

막리지로서의 위엄을 보이며 소란을 정리시킨 것이다. 과연 유생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이번 말갈족의 이주는 단지 약탈이 핵심은 아니다. 우리 고구려를 흠모하여 오는 이들을 어찌 내칠 수 있는가?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또한, 우리 고구려는 서토를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있다. 한데, 남쪽의 신라가 주제도 모르고 칼을 들이밀고 있으니 어찌 근심이 아닐 수 있겠느냐.”

“······.”

“이때 말갈이 나서고자 한 것이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느냐. 나 역시 대략의 사정은 전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의 지부상소가 단지 약탈을 ‘독점’하려는 이기심의 발로라면 내가 어찌 수용할 수 있겠는가.”

“······.”

정보의 전달이 잘 이뤄진 건 아닌 듯했다. 필시 단편적인 내용만 알게 되어 약탈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이는 잘 타이르면 된다.

물론,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다.

애초 내가 지부상소를 입안하였을 때는 물러설 수 없는 결사의 출정식을 상기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부월수의 기개가 고구려의 원대한 기상과 일치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오늘의 지부상소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기풍을 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행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는 바람직한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지부상소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백성의 기백이 귀족을 압박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을 정리하는 게 옳다. 최대한 어떤 가치도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도끼를 뽑았으면 목을 치거나 왕명을 받아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하는 것이 지부상소였다.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네들이 이리 나선 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최대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네. 자네들도 양보할 건 해야겠지만. 어쨌든 폐하께서 곧 비답을 내리실 것이니 차분하게 기다리게.”

자고로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정치력이 아니겠는가.

내가 잘 알아서 하면 된다.

그런데

“무릇!”

가장 선두에 있는 이가 선창했다.

그러더니

“무릇!”

돌아서려던 나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는

“스승께서 이르셨습니다. 지부상소는 목을 걸고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면 돌파였다.

그 순간 선창한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인!”

불안함이 거세게 엄습했다.

“만일!”

안돼.

하지 마.

그냥 있어.

숨만 쉬어.

그의 손에서 도끼가 움직였다.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말리게!”

“왜 말립니까! 폐하께서 출정을 윤허하지 않으시면 도끼로 목을 치겠습니다!”

“!!!”

그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아무리 대인이라고 하실지라도 사대부의 기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와씨.

이게 아닌데.

진짜 기겁했다.

“소생들은 폐하께 직접 청할 겁니다.”

“······.”

“출병을 윤허하여 주시거나 다 죽이시라고 말입니다.”

이건 진짜다.

조선 시대처럼 도끼 들고 위협만 하는 게 아니라 안 보내주면 진짜 다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야 말았다.

결국, 눈을 부릅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들의 기개는 폐하께 잘 전할 것이니라.”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기어이 이 자리를 출정식으로 만들어 올 것이네. 그러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히 기다리게.”

바로 자리를 피했다.

깨달은 것이다.

저들에는 매 순간이 실전이라는 걸.

등을 돌렸다.

그리고 가서일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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