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천년의 탑
66화 천년의 탑
고상하게는 광인(狂人), 속된 말로는 미친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에게 사용하는 말인가.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말이다.
“하하하!”
뻔뻔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광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과연 부마로다!”
비단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물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썩은 표정으로 고양성을 쳐다봤다.
“하하하! 듣고 있소? 내 사위가 대승을 거두었소! 내가 너무 기분이 좋소이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좋소.”
온달의 대승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게도 고양성이 숟가락을 올렸기에 우리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고구려 땅에 사는 사람치고 고양성이 온달을 얼마나 구박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게다가 이 시절 세기의 결혼식이었던 평강공주와 온달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한 사실도 만백성이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데, 온달의 일에 숟가락을 올리고 있으니 우리의 표정이 썩고, 눈동자가 흐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썩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늘 인과응보가 아니겠는가.
이를 구현할 이가 등장하였다.
“왜 그리 좋아하십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찰나 고양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용안도 다소 굳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군요. 폐하께서 어찌 부마의 일에 슬쩍 말씀을 보태십니까?”
고양성은 고구려의 태왕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에게 이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바로 평강공주였다.
다들 입장이라는 게 있다 보니 머쓱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딱히 만류할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평강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다 우리 속에 있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허음. 공주가 왔느냐. 한데, 어찌 왔느냐. 음. 언제 왔느냐.”
무슨 말이야?
고구려 말인지, 신라 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하나로 고양성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부마가 기주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응당 신이 와야지요. 고구려에서 신보다 부마의 승전에 말을 보태고 의미를 부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공주를 부를 생각이었다. 응당 네가 와야지. 그러니 참으로 바른 선택이다.”
수나라에 선전포고할 정도로 담대한 고양성이었다. 늘 위엄이 넘치는 그였으나 평강공주한테는 늘 지고 들어갔다.
사실 애초 이런 구도가 아니었다면 평강공주가 세기의 결혼식을 치를 수도 없었다. 원래도 이러했는데 이후 온달이 혁혁한 공을 세우기까지 했으니 평강공주의 입지는 더 탄탄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만 정리할 일이 아니었다.
온달의 부상은 단지 한 명의 명장이 고구려사에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정치 지형을 흔들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단번에 구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진 평양계를 멱살 잡고 끌어온 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대표적인 명단만 해도 온달, 을지문덕, 가서일, 이문진이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괜히 평강공주를 향하여 고구려 최고의 정치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양성을 몰아치던 그녀는 자연스레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이 일은 고구려의 경사입니다.”
“공주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다. 광개토태왕 이후 전설로만 남았던 위대한 역사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문답은 간단했으나 정치적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과거였다면 온달의 승리는 태왕의 경사였고, 평양계의 승리로 일축했을 것이다. 하여, 왕권 강화의 위력적인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다. 오직 고구려의 단결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는 실로 위대하며, 고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행 중인 승리는 확정적인 승리로 만들어야 하는 법.”
위엄이 가득한 말이 흘러나왔다.
고양성의 입가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선을 움직이며 우리를 한 명씩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참으로 깊고 맑았다.
온달의 승리는 태왕을 태양에 가깝게 만들어낸 것이다.
“말갈족이 이주를 시작했소.”
그랬다.
드디어 말갈족의 돌지계가 수천 명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바로 한성으로 말이다.
“고구려의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포용하도록 하시오.”
“응당 그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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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 앞에서 방긋 웃고 있으나 첫인상은 참으로 별로였다.
바로
“대인. 일전에는 소인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돌지계의 아들 돌근행이었다.
그러니까 일전에 뽕나무 농사를 감행하려고 할 때 나를 차별주의자로 낙인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말갈족의 돌근행이었다.
얼마 전부터 고구려가 적극적인 대외 동화정책을 펼치자 돌근행이 부쩍 나를 자주 찾아왔었다. 아무래도 말갈족의 차기 지도자였기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가 통 크게 한강 유역을 내준다고 선언하니 정신이 아득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돌근행은 평양도성에 거주하며 출사까지 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고구려에게 있어서 한강 유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른 말갈족보다 이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강 유역이 지금은 신라의 영역이라는 건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핵심은 이를 주도한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피식 웃었다.
자고로 대국의 막리지라면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건 옳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용을 베풀 듯 진심으로 말했다.
“알면 됐네.”
“······.”
돌근행이 다소 당황했다.
아무래도 내가 말을 너무 돌려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잊을 생각이 없네.”
“하하하······.”
“어떤가. 자네가 내 기억을 없애줄 수 있겠는가?”
“소인이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농법을 다 일러주겠네.”
“예?”
“나는 말갈족이 농사에 적극적이었으면 한다는 말일세.”
“그 말씀은······.”
“체계로 들어오라는 말일세. 명확하게.”
“······.”
이미 이주는 진행되고 있었다. 며칠 내로 돌지계가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까 부동산 계약 다 끝나고 이사하고 있는데 계약서 변경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를테면 월세 계약했는데 전세로 변경하라는 식이었다. 보증금 더 내고 말이다. 게다가 월 경비는 그대로다.
이러한 돌근행이 당황하는 건 당연하긴 했다. 그런데 내가 상대의 감정까지 살피면서 대사를 치를 수는 없다.
나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불안정한 월세살이보다 전세 계약이 좋은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자네 혹시 한성이나 한수에서 유목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설마 정말 그러하다면 당장 이주를 중단하게. 저곳은 유목에 적합하지 않네.”
“······소인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한데, 농사지으라는 말에 당황하였네. 그러면 묻지. 왜 오나? 뭔가 계획이 있을 게 아닌가.”
집이 좋아 보여서 이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고구려의 전통을 배우고 익히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됐네. 우리끼리 있는데 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나? 신라 약탈하러 오는 거 아닌가?”
“실은 그렇습니다. 신라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자신도 있습니다.”
돌근행은 의외로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이러면 대화가 더 쉽다.
“말과 활과 가깝다고 하여 약탈을 크게 이뤄낼 수 있는 건 아닐세. 근거지의 내적 역량이 튼튼해야만 가능한 일일세. 한데,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전처럼 말만 타고 다닐 것인가?”
“음.”
“잘 듣게. 본국과 다른 세력의 약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내가 말해주겠네.”
“이르십시오.”
질적인 차이만 간단하게 언급해줄 생각이었다.
“우리에게 약탈은 생존이 아닐세. 그래서 전통이라는 걸세. 그래서 여유를 가질 수 있네. 판단할 수 있는 걸세. 그러나 약탈이 본업이 되면 사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네.”
“음.”
“또한, 우리가 약탈하는 건 부흥을 위한 단초에 불과하네. 고작 하루를 위하여 약탈하는 게 아니라는 말일세. 한데, 자네들은 여기까지 와서 하루살이가 되려고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나? 농사를 지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만 약탈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걸세. 작전도 짜고.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돌근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반박하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무슨 차이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계약서를 슬쩍 교체할 때가 됐다.
“말갈족이라고 하여 어찌 일국의 역사를 취하지 못하겠는가.”
“그 말씀은······.”
“본국의 백성이 되게. 하면, 길이 열릴 것이네.”
이건 엄청난 모순이 있는 말이었다.
창업의 길을 열어준다면서도, 백성이 되길 권하였다.
그런데 이건 또 모순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구려는 제국이며, 태왕은 황제이기 때문이다.
“설마 번국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번국을 내린다.
이는 고구려가 말갈족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것이다. 영지는 거대하지는 않으나 말갈족이 번영을 구가하기에 적합하며, 고구려에 속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화는 다르지만, 자유로운 교류를 통하여 공통점을 늘릴 것이다.
오롯이 하나라고 말하려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조선도 4군 6진을 소화하는 데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하면 된다.
아울러 이 세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갈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핵심은 고구려의 국력이었다. 오직 우리의 힘이 천하를 움켜쥐고 있으면 말갈은 최선을 다하여 더 고구려가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지형적으로는 이미 남쪽으로 내려온 말갈족은 영구히 우리의 역사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무릇, 남쪽의 비옥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순간 북방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창업 그리고 체계 그리고 기술 그 외 모든 것을 내어주겠네. 고구려인이 되게.”
그러니 이제 가장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됐다. 전세살이가 아니라 호적을 옮기라는 말이었다.
“말갈족 말고 말갈부가 되게.”
그리하여
“고구려는 5부가 아니라 6부가 되는 걸세.”
진정한 고구려를 꿈꾼다.
“소인이 부족을 설득하겠습니다.”
됐다.
말갈의 차기 지도자가 이를 동의했기에 어려운 일은 없다. 언젠가는 되는 일이다.
100년이 지날지라도.
물론, 나는 급하지 않았다.
새로운 천년의 탑을 쌓는 것이니까.
남은 건 거란족과 고막해족의 계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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