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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65화 (65/199)

65화 땅(2)

65화 땅(2)

땅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는 난세였다. 그러나 요동은 주인은 오직 고구려였다. 하여, 작금의 천하에서 요동은 곧 고구려이며, 고구려가 곧 요동이었다.

고승의 말이 참으로 옳았기에 고정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수나라는 요동을 넘을 수 없네. 고구려의 국세가 이토록 강성하기에 일국은 능히 감당할 수 있겠지. 그러나 영원히 서토와 싸운다면 어찌 요동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고정의는 참으로 두려운 가정을 하나 꺼냈다.

“만일, 서토를 다시 오롯이 하나로 묶어내는 나라가 등장한다면 하늘 아래 기회라는 글자는 사라질 것이네. 오직, 운명이 존재할 뿐일세. 저 땅을 차지한 나라가 주도하는 운명이겠지. 저들은 자신을 천하의 주인이며, 하늘의 대리인이라고 말할 것이기에 그 운명을 천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지껄이지 않겠는가?”

“참으로 오만하지만 그럴 힘을 가지는 것이지요.”

“또한, 모든 것의 전제는 바로 우리의 말살일 것이네.”

“하여, 그 전에 모든 걸 제압해야지요.”

“그래야지. 그래서 오늘이 중요한 걸세.”

이제 대화는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했다.

고정의의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담겼다. 강인한 의지가 깃든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하고, 가장 많은 백성이 사는 땅이 서토일세. 끝을 알 수 없는 잠재력이 존재하는 땅.”

여러 추론을 거쳐온 대화의 끝은 서토에 대한 정의로 이어졌다.

“하여, 서토는 유목 세력에게 기회의 땅일세.”

그곳은 진실로 그러했다.

“누구라도 깃발을 꽂을 수만 있다면 족히 백 년은 기약할 수 있기에 기회의 땅일세.”

틀리지 않았다.

저들의 땅은 분명 그러했으니 말이다.

하여, 모두가 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모두 몰락한 분명한 이유가 있네. 이를 아는가?”

“일러주십시오.”

“땅을 그냥 두었기 때문일세.”

“땅을 가졌는데 어찌하여 그냥 두었다고 하십니까.”

“땅의 주인이 되었으니 깃발만 꽂은 것일세. 다 취하지 않은 것일세. 오직 서토의 비옥함에 정신을 뺏기고 무너뜨릴 의지를 세우지도 못한 것일세. 이는 언제라도 빼앗길 준비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네.”

이는 언제라도 원래 살던 이가 다시 일어설 원천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여, 기회의 땅이었으나 절망의 땅이기도 한 것일세. 누구라도 들어가면 먹혀버리는 통곡의 땅 말일세.”

“······.”

“땅을 탐하지 않은 돌궐이라고 하여 다르던가. 돌궐 역시 서토의 비옥함만 탐하였기에 그저 세폐만 받았네. 하지만, 이조차도 저들에게 그저 일어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네. 결과, 세폐를 중단하자 돌궐은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일세. 이는 참으로 비루한 행보가 아닐 수 없네.”

늘 완벽하게 제압하지 않았다.

그저 일시적인 군사적 우위로 찰나의 이익을 취했을 뿐이었다. 그새 서토의 나라는 끝없이 부강해졌기에 최후의 승리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작금의 천하가 이러했다.

“모두가 기회를 바라봤으나 절망하며, 통곡하였네. 그러나 우리 고구려는 다르네.”

고구려는 흥망성쇠를 거쳤던 무수한 세력과는 결이 달랐다.

“우리는 불나방처럼 땅만 바라보고 달리지 않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순간의 취기가 아니라 이 땅의 사수와 번영이니 말일세.”

고구려가 가장 중시하는 건 본토의 안정이었다. 원래의 영역을 버리고 서토로 미친 듯이 돌진했던 과거의 세력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여, 우리의 서진은 본토에서 비롯한 위력으로 구현되는 것이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네.”

그렇다면 대관절 승리란 무엇인가.

“수나라가 감히 요동을 범할지라도 패할 것이네. 이후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시작과 같은 가정을 다시 꺼내었다.

이제는 결과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저들의 땅을 도륙 내야 하네. 다시는 오만함을 꺼내지 못하도록 말일세. 아니, 아예 품을 수도 없도록 역사에 새겨야 하는 것이네.”

대관절 승리란 무엇인가.

“수나라의 공세로 성이 무너졌다면, 우리도 저들의 성을 무너뜨려야 하네. 우리의 농지가 불에 탔다면, 저들의 농지도 사라져야 하네. 우리의 백성이 죽었다면, 저들의 백성도 죽어야 하네.”

보탰다.

“백배로.”

고구려의 땅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종전 이후 역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적들은 백배로 감내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단지 싸워 물리치면 다행이었을 광개토태왕 이전과는 다른 고구려이기에 이리해야 하네.”

과거와는 위치가 달랐으며, 질서도 변하였다. 응당 고구려는 더 나아가야 하며, 그럴 힘도 있었다.

“방어전의 승리는 대승의 과정에 불과한 것일세.”

고정의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러한데 천하의 모든 기운이 모였네. 이제 우리는 더 압도적인 승리를 위하여 방어가 아니라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네.”

고구려의 토대가 유지될 때 수나라의 기반이 무너지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일이었다.

“고구려 서토와 싸워 이긴 역사는 이제 과거의 일이 아닐세. 오늘 우리가 입증하였고, 적게 되었기 때문이네.”

그러기에 온달의 승리는 실로 중요하였다.

“우리가 하북을 움켜쥔 나라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근거. 방어가 아니라 공격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 선대의 위대함을 우리가 올곧게 계승하였다는 자부심. 이 모든 걸 부마가 입증한 것일세.”

고정의가 하늘을 바라봤다.

“부마의 승리는 기어이 역사에 남을 것이네. 수적인 열세를 이겼다는 지엽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전선을 확고하게 구축한 전기로서 말일세.”

그의 말은 시원하게 이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일세.”

동시에 고정의는 앞을 바라봤다.

그 즉시 그의 시야가 확대되었다.

그것에는 수만 명의 거란족 병력이 대열을 갖춘 상태였다.

고정의의 시선이 향하였다는 걸 느꼈을까?

부족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대인.”

“늦었군.”

고정의의 입에서 나온 건 분명한 하대였으며,

“송구합니다.”

부족장들의 화답은 명확한 존대였다.

이는 양측의 위계가 명확하게 정리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미리 합의를 이룬 게 아니었다.

오직 온달의 승리가 일군 정세의 흐름이었다.

고정의는 부족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과 행동 아니 모든 건 고구려의 막리지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위엄이었다.

감히 항거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이곳이 곧 고구려였기 때문이었다.

“결정하였는가.”

“그렇습니다.”

“답을 하라.”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고구려가 너희의 영원한 방패가 될 것이다. 너희는 그 안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도록 하라.”

물론, 그 전에 시행해야 할 것이 있었다.

“본국의 부마께서 오만한 장성을 열어내셨다. 어찌 이를 바라만 보겠는가.”

“물론입니다. 태왕 폐하께 바칠 조공품을 확보하겠습니다.”

“출병하라.”

거란족과 고막해족의 대군이 장성 이남으로 향했다.

목표는 오직 약탈이었다.

기주에 이를 막을 수나라의 군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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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부마가 수나라의 대군을 격퇴했다는 소식은 돌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머지않아 출병하여 수나라와 일전을 치를 것이기에 군사 동맹을 체결한 고구려의 대승은 반가운 소식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나도 묘했다.

“마치 우리가 보란 듯 장성을 넘어 전투를 치른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 한데, 그의 우려가 절대 기우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군의 행보가 너무나도 괴이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상기한 이계찰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구려 부마 온달이 명장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주 전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피하자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굳이 싸우자고 한다면 다른 수도 있습니다. 한데, 2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대군에게 돌격했습니다. 도성을 지키는 결사대도 아닌데 말입니다.”

2천의 기병으로 수만의 대군을 격멸하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을 살피며 고민하여도 순수한 전술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수시로 내전이 일어날 정도로 귀족의 갈등이 첨예했소. 귀족 수천 명이 도륙될 정도로 말이외다. 이런 갈등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내가 파악하기로는 부마는 평양계 귀족이외다. 반면, 영주를 총괄하기 시작한 고정의는 국내계의 수장이지요. 게다가 무려성의 가라달인 고승도 국내계 귀족이오. 하면, 이번 온달의 행보도 정치적 갈등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지근찰은 온달의 행보를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원인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계찰은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 개 버릇은 어디 버리지도 못하는구나.’

지근찰은 돌궐 내부의 일도 지독할 정도로 정치 역학 관계를 따졌다. 만일, 이번 고구려 외교가 실패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인사였다.

설령 당장은 조용했을지라도 수나라 원정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대카간의 입지를 흔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매사 이렇듯 사안을 정치적으로만 바라보니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하면, 국내계가 부마를 제거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하달했다는 것이오?”

“고정의는 막리지요. 아무리 부마라고 할지라도 명을 따를 수밖에 없지요. 만일, 싸우지 않으면 군기를 문란한 죄로 다스리고자 했을 수도 있소.”

“허······.”

이계찰은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고구려의 도성을 다녀왔소. 그들은 태왕을 중심으로 공고하게 뭉쳐 있었소. 이는 분명한 사실이외다.”

“하면, 사신이 보는 앞에서 권력 다툼을 하겠소? 고구려가 그렇게 우스운 나라는 아니외다.”

언변에서 우위를 차지한 지근찰은 기세를 더해갔다.

“수나라의 병력이 수만 명이었다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소. 장성을 넘은 고구려의 기병이 고작 2천이었다는 것이외다. 한데, 영주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절반도 안 되는 규모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

“2천 명. 결국, 이는 무슨 의미겠소? 잃어도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오.”

“······.”

“그러나 고구려의 부마는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지요. 한데, 참으로 운이 좋았던 것이외다. 하필이면 수나라의 풍욱이 방심하였고, 행군 중이었으며, 보병 중심의 병력이었소. 이때 돌격하였으니 온달이 풍욱의 수급을 취할 수 있었소.”

“······.”

“기습하면 다 되오. 먼 과거를 되새길 필요도 없소. 고막해족이 단번에 고보령의 수급을 취한 일을 잊으셨소?”

지근찰은 정치술이 뛰어난 인사였다. 그러니 언변으로서 이계찰의 논지를 교묘하게 흔들었다. 일목요연하게 따지자면 틀린 말이지만, 하나의 내용만 본다면 반박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계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라고 반박할 논거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하면, 자네의 결론은 무엇인가? 이번 일이 고구려 내부의 정치 싸움이었으니 그저 지켜만 보자는 것인가?”

“고구려가 추가적인 행보를 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고작 2천에 불과한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차라리 잘됐습니다. 수나라의 분노가 고구려로 집중될 것이니 우리 돌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정세가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고 장성을 넘어야 한다. 목표한 군세는 40만 명이었으나 아직 내부적인 준비가 부족했다. 몇 달은 더 필요한 일이었다.

이럴 때 수나라의 시선이 고구려로 향한다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더 나아가 양국이 혈전을 펼치면 더 좋은 일이었다. 수천이 사라져도 좋고, 수만이 죽으면 더 좋다.

“옳지. 하면, 이대로 방관하는 게 가장 좋겠군.”

“하지만, 만에 하나 고구려가 추가적인 행동을 감행한다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계찰은 재차 반대의견을 펼쳤다.

아사나 섭도가 쳐다보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만일, 고구려가 더 성과를 얻어낸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여러 유목 세력은 대수 전쟁을 주도하는 건 고구려라고 인지할 겁니다. 이는 우리 돌궐에게 절대 호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음.”

“게다가 우리에게도 더 큰 요구를 할 겁니다.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수나라를 굴복시킨다면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할 것도 없소.”

지근찰의 개입에 이계찰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렇소? 그 고구려 공이 감당하실 수 있소?”

“······.”

“선봉에 서서 싸울 생각이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 줄 알고 가볍게 전쟁을 운운하시오.”

“두 사람 모두 그만하게.”

결국, 아사나 섭도가 개입하여 논쟁을 끊어냈다.

“훗날 고구려와 싸울 일은 그때 생각하게. 지금 우리의 대적은 수나라이며, 고구려는 아군일세. 그러니 수나라와의 전쟁이 최선을 다하는 게 옳지 않겠나?”

“이번 고구려의 출병은 북방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가 분명합니다. 2천의 돌격은 이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이를 그냥 넘기시면 안 됩니다.”

이계찰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또한, 대군이 패퇴했기에 기주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릅니다. 기어이 사정이 어렵다면 소수의 병력이라도 출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되었네. 아무리 정국이 요동칠지라도 일시적으로 거란과 고막해가 흔들릴 정도일세. 그러나 얼마 뒤 40만 대군이 수나라 황제의 항복을 받아낸다면 어찌 되겠나? 곧장 신속을 청할 것이네. 온달의 작은 승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일세.”

“······.”

“그러니 두 사람 모두 전쟁 준비에 집중하게.”

아사나 섭도는 축객령을 내렸다.

이계찰은 입술을 깨물었고, 지근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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