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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64화 (64/199)
  • 64화 땅(1)

    64화 땅(1)

    찬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살이 따가울 정도로 몰아치기도 했으나 고정의는 오히려 즐겼다. 미소까지 보이며 뒷짐을 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간의 일을 빠짐없이 들었네. 참으로 자네다운 결정의 연속이었네.”

    “그렇습니까? 소장은 그저 동의하며 힘을 실어준 게 전부였습니다만.”

    고승이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그간 고승이 행한 건 절대로 흔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을지문덕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참으로 뛰어난 무장이지요.”

    “그래. 한데, 그의 뛰어난 능력을 누가 알겠는가. 입증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말일세.”

    고정의의 말대로였다.

    결과적으로는 을지문덕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을지문덕은 지금껏 검증을 거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승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을지문덕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니, 그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대 영주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 모든 건 고정의의 말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모든 사람이 자네와 같았다면 어떨까 싶네.”

    “허. 오늘 소장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 겁니까?”

    “괜히 하는 말이 아닐세. 되돌아보면 자네는 늘 귀를 열고 상대의 말을 경청했네. 아니, 이를 즐겼지 않은가. 하여, 신분이나 위치를 막론하고 의견 자체가 합당하면 늘 힘을 실어주었네. 또한, 능력이 있다면 대사를 맡기기도 했지.”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승의 진가는 이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역량이 뛰어나도 처음과 만나면 늘 실수하기 마련일세. 그래서 자네는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서서 그가 실수하지 않게 거들지.”

    고승의 진가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역량이 십분 구현될 수 있도록 최적의 요소를 제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을지문덕의 행보에 고승이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시작부터 그토록 거대한 성과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고구려의 최전방인 무려성을 책임지고 있는 걸세. 수년간.”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고승은 이미 고구려의 조정에서 높은 관등을 역임해야 했다. 더욱이 가문의 후광 역시 대단하였으니 부족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고정의의 강력한 주장으로 고승은 오랜 세월 무려성을 지켰다.

    “비록 자네가 서운했을지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네.”

    “서운했다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대인의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소장의 자리 정도는 찾아갈 능력은 있으니 말입니다.”

    “큭.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하나? 사람 무안하게 말일세.”

    “하하하. 대인께서 마음이 불편하신 듯하여 보탠 겁니다.”

    “됐네.”

    두 사람은 가벼운 웃음을 주고받았다. 고승이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기어이 천하의 격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 역사는 그 시발점을 부마의 대승이라고 기록할 것이네.”

    “그렇지요. 모든 사서가 응당 그리 기록해야 할 겁니다.”

    온달의 대승은 기주를 흔들었고, 영주까지 전해졌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흥분하거나 환호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이 일을 바라봤다.

    그래야 했다.

    한 명은 고구려의 막리지였고, 한 명은 고구려의 서쪽 전선을 지탱하는 가라달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막중한 위치에 있는 이에게 필요한 건 냉정함이었다.

    “혹자는 부마의 돌격을 무모하다고 바라볼 수도 있겠지. 한데, 작금의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하는 일은 무모하지 않던가.”

    “2천으로 수만 명의 대군을 향해서 돌격한 일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놀랄지라도 수나라 사신단에게 선전 포고를 한 고구려의 사람이라면 그저 고개만 끄덕여야 하지요.”

    고정의는 엷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2천과 수만 명. 고구려와 수나라 백성의 차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양국은 ‘국력’이라는 객관적인 지표의 차이는 컸다.

    그래서 작금의 대승은 거대한 의미가 있었다.

    “부마께서 복잡한 정치, 외교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는 않으셨을 걸세.”

    “소장이 어찌 섣불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마께서는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돌격을 감행하셨을 것이니 말입니다.”

    “내가 장성 이남으로 출병을 권하긴 하였으나 이런 일을 예상한 건 아니었네. 그런데 기어이 이루어내셨네. 이는 그야말로 대업의 성대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네.”

    온달의 대승이라는 현상 자체만을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의미심장했다.

    “천년. 이 나라 고구려 천년의 역사는 참으로 위대한 것일세. 하여, 이를 계승하는 우리는 정확해야 하네.”

    대화는 고정의가 주도했다.

    국내계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이의 안목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말에 담긴 본질을 잘 꿰뚫고 늘 경청하는 고승이 보탰기에 대화는 더 탄력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새롭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옳아. 나 역시 작금의 격동과 맞이하며 되돌아봤네. 과연 어떠하였는지. 한데, 참으로 놀라웠네. 어쩌면 잠시 잊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천년이라는 세월에 심장이 두근거렸기에 보고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네. 바로 세월 말일세.”

    “대인께서는 어찌 규정하고 계십니까. 소장은 놓치지 않겠습니다.”

    “선대가 이룬 천년의 위대함에 압도되어 모두가 놓친 게 있네. 우리 고구려가 마지막으로 서토와 자웅을 겨룬 건 광개토태왕의 시절이라는 걸 말일세. 그 세월이 벌써 100년도 훌쩍 넘었지 않은가.”

    광개토왕 사후 고구려는 서쪽 전선을 확장하지 않았다. 요동의 확고한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즉, 불가침을 전제로 한 외교 노선으로 서쪽을 안정시켜왔다.

    “역사는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있네.”

    “되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는 고작 하북의 일부를 차지했던 연과 국운을 걸고 싸웠다고 말하지요. 한데, 작금의 고구려가 싸우고자 하는 수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비옥한 하북을 모조리 손에 올렸습니다. 허.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입니다. 소장 역시 천년에 취하여 잠시 잊었습니다. 어쩌면 아예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디 자네만 그러하겠나? 많은 이가 그러할 것이네. 그러나 이는 위대한 천년에 가려진 또 하나의 분명한 진실일세. 이제 우리는 이를 꺼내야 하는 걸세.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낼 수 있네.”

    담담했으나 심장을 찌르듯 아프고 정확한 말이었다. 고승은 생각이 많았다. 고정의는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이었다.

    “묻겠네. 과연 우리의 준비 태세는 완벽한가?”

    “어찌 쉽사리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차츰 완성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옳은 말일세. 참으로 정확한 답변이네. 하여, 고구려는 모든 걸 점검에 나서야 하는 것일세. 부마의 싸움은 이 준비 태세의 일부에 불과하네. 기어이 우리는 이런 각오로 대전을 준비해야만 또 다른 천년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일세.”

    살을 찢는 듯 따가운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정수였기에 고승은 놓치지 않고 경청했다.

    “만일, 수나라의 수십만 대군이 우리의 요동을 범한다면 총력으로 싸워야 할 것이네. 아군은 필히 승리를 거둘 것이네. 요동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까. 한데,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음. 대인. 작금의 태세로는 방어하여 대승을 거두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면, 기어이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대인께서 일러주신다면 소장은 놓치지 않을 겁니다.”

    참으로 적극적인 자세였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였다면 승리였네. 하지만, 작금의 고구려는 이미 방어를 승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일세.”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우리의 천년이 어떠한지 저들이 알기 때문일세.”

    모호하고 함축적인 말이었다.

    고승은 차분하게 되새겼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저 고정의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래전, 저들이 분열되지 않았을 때 고구려는 패권을 가지지 못한 나라였네. 하여, 분쟁이 발생하여 다퉜을지라도 국운을 건 원정은 없었네. 우리의 땅을 침범하였다가도 패하면 물러나고 다시 전선이 구축되었던 시절이었지. 그러했기에 방어는 곧 승리였고, 역사의 연속성으로 이어졌네.”

    과거 한나라 시절 양국의 관계가 그러했다. 적어도 당시 고구려는 한나라가 기어이 무너뜨려야 할 대적이 아니었다. 그저 변방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저들은 분열되었네. 단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내부에서 흩어진 게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 처참하게 찢어졌네. 그 세월, 고구려는 패권의 역사를 시작하지 않았는가.”

    5호 16국은 고구려로서는 기회의 시절이었다. 국운이 휘청였던 위기도 있었으나 기어이 승리하였다. 또한, 북위가 수립되기 전까지 고구려의 서진은 멈추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이 모든 걸 되새길 수나라가 아닌가. 하여, 저들은 국지전이 아니라 국운을 걸고 다가올 것이며,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공세를 이어갈 것이네. 어째서? 작금의 고구려는 다투면 끝을 봐야 할 수밖에 없는 패권의 나라이기 때문일세.”

    그 옛날과 같이 다퉜을지라도 다시 외교로 화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선을 넘으면 한 명은 죽어야 했다.

    이는 패권을 맛본 나라의 영원한 관계였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고구려와 싸워 패배한다는 건 전과는 다른 분열의 시대가 개막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세.”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애초 싸우지 않았다면 모르겠으나, 전쟁을 일으켰는데 패배하면 거대한 충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여파는 누구도 감히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며,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하여, 저들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네. 물론, 우리는 이겨낼 수 있네.”

    “물론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이길 수 있을까?”

    고정의의 물음에 고승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고구려에 패하여 수나라가 몰락해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뒤를 이을 세력이 다시 도전장을 내밀 것이니 말입니다.”

    “옳은 말일세. 공격이 아니라 오직 방어로 일국을 무너뜨린 것일세. 하면, 고구려는 패권의 한 축이 아니라 패권에 가장 가까운 유력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네.”

    “고구려가 언제라도 장성을 넘어서 하북을 도모할 수 있는 압도적인 공포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목숨을 걸고 우리를 멸하려고 할 것이네.”

    “하지만 대인. 우리가 요동에서 패배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요동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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