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고구려사, 그 전설의 시작(1)
60화 고구려사, 그 전설의 시작(1)
깃발은 곧 정체성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누구도 타국의 깃발을 사용할 수 없다. 심지어 부마의 깃발을 누군가 임의로 사용했다면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전쟁에서 위계를 사용할지라도 타국의 깃발을 사용하지 않는 건 사신을 죽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부분을 길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장성을 넘은 무리는 고구려의 부마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기병 2천이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수만의 대군을 동원해도 범하기 어렵거늘 고작 2천 명으로 무엇을 도모하고자 장성을 넘었다는 말인가.
‘약탈한다고 할지라도 2천 명으로 기주 내부로 진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약탈이라는 건 결국 물자나 사람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운송할 인원이 넉넉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지척에 있는 북평군을 넘었다는 건 아무리 봐도 단지 약탈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약탈 종말점을 아득히 넘어선 상황이었다.
차분하게 상황을 다시 정리하다 보니 문뜩 떠오르는 가정이 하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머릿속의 모든 상념을 치우며 중심을 차지했다.
아니,
‘설마······.’
애초 고구려군이 장성을 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떤 가정을 할지라도 현실성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풍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당장 황도로 전하라.”
주먹을 꽉 쥐며 외치듯 말했다.
“고구려의 선봉대가 장성을 넘었다. 이는 약탈이 아니라 명백한 전쟁의 서막이니라. 폐하께서 이를 아셔야 한다.”
고구려가 전면적인 전쟁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부마 온달의 공세는 기주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선봉대에 불과한 것이다. 차후 수만의 대군이 장성을 넘어설 것이니 반드시 몰아내야 했다.
‘하. 결국, 그동안 약탈이 빈번했던 것도 전선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그래. 거란의 대군을 앞세워 자신들은 교묘하게 숨은 것도 이렇게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참으로 비열한 나라구나.’
참으로 저열한 방법으로 전쟁을 준비하지 않던가.
대국의 법도처럼 당당하게 선전포고할 용기가 없는 나라가 분명하다.
풍욱은 숨을 고르듯 내쉬며 고구려를 비웃었다.
“아군은 당장 북상하여 고구려군을 요격할 것이다.”
자신 있었다.
그만큼 풍욱은 무예와 지략이 수나라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수였다.
게다가 상대는 고작 2천에 불과했다. 수나라의 병력은 무려 4만.
그러니 장성 이북으로 몰아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또한, 온달의 병력은 주력이 아니라 상황 파악을 위한 선봉에 불과한 것이니 치열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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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는 4만, 많게는 5만에 이르는 대군으로 추정됐다.
정찰병에 의하면 기세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하니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정예군이군.”
“정예군이로군요.”
온달과 을지문덕은 동시에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자네는 어찌 하는 게 좋겠나?”
“이런. 형님. 좋은 기회는 다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는데, 여기서 소제에게 슬쩍 상황을 미루시는 겁니까.”
고구려의 기병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적의 중앙으로 돌격하여 대열을 무너뜨리는 중장기병과 기동력을 이용하여 전술적 요충지를 선점하거나 중장기병의 좌우 측면에서 공세를 이어가는 경기병이었다.
애초 목표가 철저한 약탈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경기병이 다수였고, 중장기병은 수 백기에 불과했다.
그러하니 승리를 위한 전술을 꾸리자면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온달은 지독할 정도로 그냥 달려왔다.
“교전을 모두 피하면서 여기까지 돌격해왔습니다.”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아무리 고구려의 과하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할지라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온달이 이리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한 번의 전투로 상황을 마무리하실 생각이 아닙니까.”
“큭. 자네 말이 맞아. 한데, 막상 싸우려니 겁이 나서 그런다네. 어떤가. 신묘한 계책이라도 없나?”
“신라인이 평양에서 춤추는 소리는 그만하시지요. 게다가 그런 말씀을 할 거면 입가의 미소라도 지우십시오.”
“이런.”
“게다가 이는 오직 형님의 싸움입니다. 소제는 그저 충실하게 따르겠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은 오롯이 온달의 것이었다.
이미 그가 전장을 주도하고자 나섰는데 어찌 을지문덕이 개입할 수 있겠는가.
“나의 싸움이라.”
온달은 포근하게 웃었다.
“언제 내가 방법이 여러 개였나.”
“아니지요. 오직 하나였지요. 그리고 옳습니다.”
“자네가 보태주니 더 확신이 서는군.”
초승달처럼 휘어진 온달의 눈과 병사들을 향하였다.
그중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입니까?”
“이런. 내가 너무 끌었나?”
“지독하게 오래 걸렸습니다.”
호승심과 전의가 넘치는 병사의 말에 온달은 피식 웃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전을 하달하겠다.”
고구려 최강의 무장이 계책을 언급하였다.
일제히 허리를 펼치며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2천, 적은 5만에 이른다. 어찌해야 하는가.”
“두당 25명을 죽이면 되는 겁니다.”
병사들은 호탕하게 답했다.
온달은 다시 화답하듯 말했다.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그냥 보내주실 겁니까?”
“그건 곤란하지. 한 명이 빠지면 나머지 사람들이 25명보다 많이 죽여야 하니 말일세.”
“하하하!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 기회를 양보해야 합니까? 자고로 고구려인이라면 이런 욕심을 하나씩 품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이건 소인들을 위한 전투입니다. 다른 무엇을 위한 게 아니란 말이지요.”
누구도 이들의 대화만 들었다면 5만의 적과 마주한 2천의 병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원망하나? 참으로 어려운 싸움을 자초하여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피할 수도 있는 싸움이었기에 물어보는 것이다.”
“소인들은 삶이 다하기 전에 이런 싸움을 한 번 정도는 해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한 마씩 보탰다.
“심지어 전장은 서토입니다. 지키며 싸우는 전투가 아니기에 우리는 더 강합니다. 그래서 이깁니다.”
“가장 힘겹고 나약한 전투가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입니다.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지요.”
“자고로 전투는 즐겨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면 지켜야 한다면 비장해야 합니다. 이건 고구려답지 않은 싸움이지요. 우리는 즐거워야 하니 말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인들은 즐거운 겁니다.”
점차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모두가
“소인들은 이를 낭만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바보처럼 웃으면서.
마치 온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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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욱은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
하지만 놀랍게도 눈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남은 원인은 한 가지였다.
“고구려 부마의 이름이 온달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미친놈이군.”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지금 눈앞에 고구려군이 있었다. 어떤 보고가 당도하지도 않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밤낮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질주만 한 것이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
지금 고작 2천에 불과한 고구려의 기병이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회전이라도 펼치자는 것이었다.
기동력을 이용하여 기주를 유린할 것이라는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아니, 아예 보편적인 행동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진실로 광기였다.
“미친놈이 나를 조롱하는구나.”
볼이 씰룩였고, 눈을 부라렸다.
물론, 전면전이긴 했으나 기습 공격에 가까운 상황이었기에 당장 일사불란한 대열을 구축하는 건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고구려군의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당장 치워버려라.”
기병의 돌격은 4각형의 방진을 치고, 쇠뇌를 쏘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기어이 접근한다면 장창을 든 보병이 마무리하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적군은 중장기병이 수백에 불과했고, 다수는 경기병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고구려의 부마가 토사구팽을 당한 걸까?’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런데
“!!!”
풍욱은 눈을 의심했다.
현실이 너무나도 느리게 인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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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말의 숨소리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 날아오는 쇠뇌와 매섭게 겨눠진 장창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선두를 달리는 고구려의 중장기병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이었다.
함께 나아가는 이의 무릎과 나의 무릎이 닿을 정도의 밀집성을 무너뜨리지 않고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철저하게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속보(Trot)로 나아갔다.
닿았던 무릎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거리를 좁혔다.
점차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말은 온 힘을 다하여 질주를 시작했다.
맹렬하게 날아오는 쇠뇌를 뚫고 장창의 지척에 이르렀다.
무릇 기병의 돌격은
“압박한다!”
상대의 심리를 압박해야만 성공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병의 광기 어린 돌격은 장창을 무너뜨렸다.
좌우로 넓게 달리는 경기병의 손에는 굽고 짧은 활이 있었다.
활의 중앙을 중심으로 활채가 굽어 있었고, 양쪽은 굽은 부분인 활꼬지는 활채가 굽은 방향과는 반대로 굽었다.
세상은 이를 만궁(彎弓)이라고 불렀다.
중장기병이 적의 선두를 타격할 때.
바로 그 순간 일제히 화살을 쐈다.
수천 개의 화살이 적진을 향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건 을지문덕의 통제 아래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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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았다.
오직 창 머리를 휘두르며 나아갔다.
지금은 싸우는 게 아니라 밟아야 했다.
고구려의 기병은 야차처럼 창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병력의 열세라는 건 절대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혼전은 필연적이었다.
맹렬하게 돌격하던 기병은 결국 낙마하여 적과 조우하게 됐다.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둘렀으나 수십 명의 공세를 감당한다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부릅뜨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적군이 빨랐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는 그때
-퍼억!
아군의 손에 적이 죽었다.
목숨을 구해준 이가 외쳤다.
“죽지 말라고! 자네가 죽으면 그 몫을 우리가 더 치워야 한다고!”
“이런!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
“하하하! 맞는 말이군! 그러면 마음껏 죽어보자고!”
그야말로 혼전이었다.
낙마한 기병들은 수십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악귀처럼 싸웠다.
또, 여전히 돌격하며 적의 대열을 흔드는 기병도 존재했다.
이 순간 고구려군의 전술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냥 싸움이었다.
괴이한 건 이토록 치열한 와중에도 그들의 눈동자가 한 명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온달이었다.
그리고 온달의 눈동자는
‘이 전투 가장 빠르게 끝낸다.’
풍욱만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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