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대, 바보일 때
59화 그대, 바보일 때
고구려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절대로 약탈을 목표로 한 기병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정도로 느긋한 행보였다. 아니, 약탈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진군하며 여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나라의 영토인 기주의 중심까지 말이다.
그런데도 누구 한 명,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 평양 도성의 지척에서 말을 몰 듯 여유로웠다.
늦게나마 합류한 을지문덕은 말을 끌어 온달의 옆으로 가며 말을 꺼냈다.
“급보에 의하면 영지현(업)에 수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북상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들었네. 적장은 풍욱이라지? 수나라에서도 유명한 장수더군.”
“적장이 누구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전선이 약탈로만 그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러니 일단 물러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어째서라고 하셨습니까······?”
“공주께서 내게 이르시길 장수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네. 한데, 자네는 어찌하여 물러나자고 하는 것인가?”
온달의 말에 을지문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말 당황하여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만일, 적의 대군이 요동을 공격한다면 아무리 불리한 상황일지라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한데, 지금은 고작 2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대군이 지키는 적의 영토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주된 목적은 약탈이었으니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는 게 옳았다.
심지어 목표는 약탈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이대로 퇴각하는 게 백번 옳았다.
짧게나마 생각을 정리한 을지문덕이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온달이 빨랐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나는 어릴 적부터 자네를 알고 지냈기에 잘 알고 있네. 자네야말로 누구보다도 뛰어난 고구려의 무장이라는 걸 말일세.”
“······.”
“그래. 자네가 볼 때는 지금 물러서는 게 옳은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을지문덕은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온달은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기억나는가? 앞날조차 기약할 수 없었던 시절 말일세. 나와 자네 그리고 서일과 문진. 우리 네 사람이 청운을 꿈을 꾸며 하루를 버텼던 그때 말이네.”
“허. 소장이 어찌 잊겠습니까. 한데, 앞날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던 시절이었지요. 부마께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존재조차 박탈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뭘 또 그렇게 말하는가?”
“사실이니 말입니다. 한데, 소장은 기억만 할 뿐입니다. 만일, 되돌아가야 한다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마께서는 다르십니까.”
온달은 말을 유려하게 통제하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전장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잠시 옛이야기를 하는 걸세. 꼭 그리 딱딱한 호칭을 사용해야겠나?”
온달의 말에 을지문덕도 피식 웃었다.
지금은 복잡한 전략과 전술이 아닌 벗으로서의 대화를 바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그러면 처음부터 언질 주셨어야죠. 소제가 눈치가 빠르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하하! 이번에도 내가 실수했군. 한데, 자주 있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게.”
“하하하! 알겠습니다. 한데, 형님.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너무 춥고 배고팠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소제는 굶는 걸 정말 싫어한다는 걸.”
“그렇지. 자네는 정말 굶는 걸 힘들어했지. 그래서 왕 대인을 흠모하지 않았나. 아낌없이 밥을 나눈다고 말일세.”
“실은 그렇습니다.”
적당한 농이 오고 갔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유년 시절을 단지 청운의 꿈이라는 말로 미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정말 지독하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생존만을 바라봤다면 어찌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겠는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운용하여 서책을 구하는 데 사용했다. 힘겹게 구하면 이를 돌려보며 익혔던 시절이었다. 또 그러하기에 제대로 생계를 꾸려갈 일을 하지 못하였다.
오직 세상에 나아갈 때를 기다리며 현실의 어려움을 덮고 나아갔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치열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런데도 우리는 귀족이었네.”
“귀족이었으나 귀족의 명단에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세상 사람은 우리를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 우리는 귀족도 아니고 백성도 아니었네.”
분명 귀족이었으나 귀족처럼 부유한 삶을 살지 못했다.
너무나도 한미한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귀족 사회는 참으로 폐쇄적이었기에 시조신 혹은 중시조가 희미한 가문은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가문마다 선대의 업적을 부각하며 극진히 모시는 게 아니었다. 뿌리가 곧 영광인 나라였기에 온달과 을지문덕의 어려운 처지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난 좌절하지 않았다네. 때가 되면 고구려가 우리를 바라볼 것이며, 손을 내밀 것이라고 믿었으니 말일세. 기어이. 언젠가는.”
“소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분명 형님은 그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뚝 일어섰습니다. 오늘의 고구려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님이 아니었다면 소제들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가······.”
“물론입니다. 실은 소제들은 너무나도 힘겹고 지쳤기에 서책을 내리고자 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형님만은 고구려에 대한 믿음과 열의가 있으셨기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형님께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을지문덕의 말에 온달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했다.
“한데, 그거 아나? 나는 믿음이 없었고, 열의로 불타지도 않았다는 걸 말일세.”
“예······?”
을지문덕은 하마터면 말고삐를 잡아당길 뻔했다.
온달의 입에서 온달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그저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 농으로라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보았다네.”
“무엇을 보셨습니까.”
“병법서를 읽던 자네가 귀족에게 멸시당하는 걸 말일세.”
“······.”
“과거 연나라와 싸울 때 고구려의 전략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자네를 조롱하며 비웃었지. 그런데 자네 말이 옳았다는 걸 그들이 몰랐을까?”
“······.”
“알았지. 모를 수가 없네. 만일, 같은 말을 백성이 했다면 크게 치하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일세. 하지만, 한미한 가문의 귀족이 말하니 불쾌하였던 것이지. 감히······이런 거 말일세.”
고구려의 귀족은 백성에게 관대하다.
그러나 또 다른 귀족에게는 싸늘했다.
심지어 상대가 뿌리조차 찾을 수 없는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그때 고구려는 분명 그러했다.
“지필묵과 서책을 구할 수 없었던 문진은 귀족의 집에서 일하였네. 귀족의 자제들이 익히는 글을 귀동냥으로 듣고, 사랑채를 정리할 때 눈치껏 서책을 펼쳐 남몰래 익혔네. 그리고 잊을까 두려워 늘 바닥에 글자를 적고 숙지하였지.”
“······.”
“한데, 그조차도 할 수가 없었네. 감히 엿듣고 훔쳐봤다는 이유로 매타작당하고 쫓겨났으니 말일세. 나는 당시 문진이 보였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네. 아니,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어.”
온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고 건조했다.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며 당시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웃고 있었네.”
“······.”
“웃으며 내게 ‘그래도 많이 익혔습니다.’라고 하더군.”
온달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다.
“서일은 또 어떠했나?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네. 세상을 자신의 붓에 담고 싶다고 늘 말하였네. 우리는 보았네. 그가 땅에 그린 그림이 얼마나 유려하고 위대하며 아름답고 패기가 넘쳤는지 말일세.”
가서일의 그림은 사람의 심장을 움직이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
고작 바닥에 그린 그림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나 지금껏 남긴 그림이 없네.”
가서일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무엇하나 구할 수가 없었으니 말일세.”
지독하게 어려운 형편은 가서일에게 그림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일은 늘 말했네. 죽기 전에 한 폭의 그림을 남기고 싶다고. 평생의 꿈이라고. 그러나 이룰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일세. 울부짖으며 내게 말했네. 참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네.”
가서일의 재능은 가히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무엇이든 빨리 기억했으며, 손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포기했네.”
“형님.”
“정말일세. 나는 입신양명을 포기했었네. 나의 생존을 위하여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네들을 위하여 내렸었네. 내가 대형으로서 뭐라도 한다면 자네는 병법서를 읽고, 문진은 서책을 탐독하며, 서일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여겼으니 말일세. 그래서 장시에 나가 뭐라도 팔고 재물을 구하였네. 나는 그러했네.”
언제부터였을까?
늘 무예를 갈고 닦던 온달은 병장기를 잡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독하게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다.
먹기 위해서 쌀 한 톨을 아낀 게 아니라 내 팔고자 아꼈다.
물건을 팔아야 했기에 늘 웃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들어도 웃었다.
귀족이 천한 일을 한다고 조롱해도 웃었다.
누군가 물건을 집어 던져도 웃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은 감정이 섞이기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웃었다.
“울지 않았네. 내게 눈물은 웃음을 박탈하는 사치였으니 말일세.”
“······.”
“인상 쓰지 않았네. 내게 감정이라는 건 자네들의 꿈을 앗아가는 불필요한 것이었으니 말일세.”
“······.”
“그래서 나는 늘 웃었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사람들은 맞고, 조롱당하고, 욕을 들어도 웃기만 하는 온달을 ‘바보’라고 불렀다.
“참으로······.”
온달은 숨을 들이쉬며 힘겹게 말했다.
“웃음이 가득한 세월이었네.”
그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표현하지 못하였을 뿐, 하지 않았을 뿐. 내 속은 망가졌었네. 자네들의 쓸모를 알아주지 않는 고구려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으니까.”
온달의 입에서 ‘자신’의 감정은 사라졌다.
오직 벗에 대한 걱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 바보였다.
“나는 고구려를 연모하지 않았네. 자네들을 바라보며 응원하였던 그저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일세. 그러니 원망했던 것일세.”
지금껏 알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를 오늘 대적을 만난 순간에 듣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심장이 아려왔다.
온달이 가고자 하는 길이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이었네. 그날은 무척이나 장사가 잘됐지. 그래서 더 맑고 밝게 웃었네. 내게 기쁨은 그게 전부일 때였으니 말일세.”
“······.”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 그날을.”
어느새 온달은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찬 표정을 한 여인이 내게 말하였지. ‘당신들의 내일을 사러 왔다.’ 이렇게 말했네. 내가 아니라 우리를 사러 왔다고 하였지. 나와 을지문덕, 가서일 그리고 이문진. 우리 네 명을 말일세. 그래. 바로 공주셨네. 그녀였지.”
평강공주의 방문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행보는 고구려에서 가장 정치적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거절했네.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때 나는 이미 웃는 것만 익숙한 사람이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공주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하하. 그랬지. 매일 내가 가져오는 물건을 몽땅 사가셨지.”
“참으로 대단했지요.”
“그렇지.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났으며 한 달을 그리하니 내가 웃지 않고 있었네. 물건을 팔아서 자네들의 꿈을 응원할 때 늘 짓던 웃음이 사라진 것일세. 왜? 더는 작은 재물이 내게 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네.”
평강공주의 재력은 온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렇게 온달은 이유 없는 웃음을 치우게 되었다.
“웃지 않으니 과거의 내가 떠올랐네. 그래서 다시 손에 병장기를 들게 되었어. 하. 아직도 잊을 수 없네. 너무나도 격렬하게 심장이 떨렸지. 나는 웃지 않고 오열했다네.”
“······.”
“진정 기뻤을 때 나는 웃지 않고 울었어. 그게 나 온달이었네.”
병장기를 잡은 바보는 웃지 않아도 되었다.
편히 울 수 있었다.
눈물이 허락되는 삶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었다.
“내게 공주는 환의였네. 아니, 희망이었네. 아니, 존재였네.”
온달은 평강공주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참으로 고결했으며, 그 손을 잡고 따라간 세상은 참으로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고구려 최강의 무장, 온달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연모하네.”
온달은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참으로 좋았다.
그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비록 그녀의 눈이 고구려의 왕실을 향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심장이 고구려의 천년에 맞춰 움직일지라도, 그녀의 발걸음이 오직 고구려의 패권을 위할 때만 움직일지라도······.”
온달이 고개를 내려 정면을 주시했다.
미소는 걷어졌고, 눈동자에는 힘이 실렸다.
“공주의 삶에 내가 오롯이 남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연모하네. 진실로.”
온달의 뜨거운 진심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끝은
“연모의 끝은 결국 고구려였네.”
오직 고구려였다.
고구려.
지독하게 원망했던 나라, 고구려.
이 나라를 지금 온달은 연모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니, 뒤늦게.
“문덕. 물러서자고 하였는가?”
“······.”
“전장이 아니기에 물러설 수도 있을 것이네. 한데, 이는 우리가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적의 대군이 있기에 물러설 수 있겠는가. 진군과 퇴각은 오직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들의 선택은 방어와 퇴각만 있어야 하는 걸세.”
“······.”
“나 역시 전략과 전술로 바라볼 때 물러섬이 옳다는 건 알고 있네. 한데, 꼭 옳은 길을 가야 하나?”
을지문덕은 답할 수 없었다.
아니, 이미 생각은 바뀌었다.
온달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이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거 아는가?”
2천의 기병이 일제히 멈추었다.
“내게 삶이란 결사(決死)이며, 신념은 관철(貫徹)일세.”
그러기에
“하여, 나아갈 것이네.”
온달이 고구려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그리고
“적의 군세가 수만에 이를지라도 나는 나아갈 것이네.”
결사와 관철을 말하였다.
온달이 고개를 돌려 을지문덕을 바라봤다.
“내가 틀렸는가?”
그러자
“소제가 틀렸습니다.”
을지문덕이 화답했다.
그리고 온달이 웃었다.
그 옛날처럼.
그 순간 2천 기병이 일제히 진군했다.
결사의 각오로 승리를 관철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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