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대륙이 춤을 추다 [댓글 이벤트 마지막회차]
58화 대륙이 춤을 추다
고구려의 막리지로서 성공적으로 외교를 해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국의 위엄과 체면을 고려해야 하며, 상대에게 아량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니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번 진나라 외교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처지가 어렵다고 하여 지나치게 베풀면 국익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색하게 행동하면 대국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다.
이 균형을 지킨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사신단이 떠날 때 배웅하며 전한 말은 나의 뛰어난 외교 감각을 입증해주는 위력적인 장면이었다.
-우리의 수군이 수나라의 해안가를 부지런히 타격하고 있소. 별 뜻은 없고 그냥 말하고 싶었소.
여차하면 너희 땅도 약탈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낸 말이었다. 외교적 수사라는 건 바로 이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감탄사만 튀어나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뿐이었다.
중국에서 사신단이 온다고 하여 덜덜 떨면서 국경에 호랑이나 배치한 어떤 소설 속에 담긴 허구의 이야기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유려한 외교라고 자평했다.
현실은 이토록 호쾌하거늘 뭐 하러 힘들게 호랑이나 잡고 있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가 진나라를 어찌할 건 아닐세.”
“그렇지요. 본국이 진나라를 타격하는 건 소모적인 행동입니다.”
연자유도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보탰다.
“단, 최악의 상황일 때 그 또한 방법이긴 합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나라와의 전선이 고착되거나 우리 내부의 사정이 다소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하면, 외부에서 물자를 대대적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어찌 진나라를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군.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연자유가 상당히 중요한 말을 했다. 이건 이는 상당히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였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일, 우리의 유목 동맹이 수나라의 발목을 완벽하게 잡게 된다면 양견은 절대 통일 전쟁을 꾀할 수 없게 된다. 남중국에서 어떤 일이 발생해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 역시 막대한 물자가 사용될 것인데 조금 부족하면 진나라로 갈 수도 있긴 했다.
어차피 수나라가 딴짓할 수 없으니 진나라가 몰락해도 또 다른 왕조가 잘 등장할 것이니 말이다. 아예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물론, 입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이러한 것이었다.
“약탈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어 물자를 내놓으라고 하면 알아서 하지 않겠나?”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진나라도 어쩔 수 없이 서토의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가진 건 없으면서 콧대는 하늘을 찌르는 무리입니다. 우리가 먼저 확실한 경고를 해줘야 말을 들어 먹을 겁니다. 이는 역사가 입증한 일입니다.”
“하하하. 그 또한 맞는 말일세.”
“물론, 지금은 그들의 국세를 잘 보존해줘야 하기에 그냥 두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아직은 아무것도 펼쳐진 게 없으니 말일세.”
참으로 애석한 부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리가 15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하는 마당에 취할 건 취해야 하는 법이다.
“제지와 제련 따위에 능한 장인을 추려 보내달라고 했네.”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수준이 서토보다 부족한 건 아니지만, 분명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들의 방법과 잘 비교하면 제법 괜찮은 결과가 도출될 겁니다.”
기술 이전을 위한 인력 지원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국력에는 도움이 되며, 진나라에 당장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었다.
기술자 몇 명 보낸다고 하여 나라가 휘청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일이 잘 풀리는군.”
“그렇습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 됐습니다.”
연자유는 단호하게 내 말을 잘라버렸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쳐다봤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느낌이군.”
“모릅니다. 그냥 듣고 싶지 않은 겁니다.”
“허.”
연자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다음에는 고구려의 농업에 일대 혁신이 발생했다는 문서를 들고 오지요.”
“거는 기대가 크네.”
“됐습니다.”
역시 내 뒤를 이을 차기 막리지답게 유능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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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북진을 준비하던 주라후는 너무나도 곤혹스러웠다. 진땀을 닦을 새도 없이 황제를 설득하기 위한 말을 꺼냈다.
“폐하. 어찌하여 북진을 윤허하지 않으시옵니까. 이미 초안보다 시일이 지났사옵니다.”
“알지요. 어찌 내가 그걸 모르겠소이까.”
수나라의 등장 이후 실의에 빠졌던 황제 진욱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던 용안도 참으로 평온했다. 늘 미소를 지으며 국사에 임했기에 진나라 조정도 생기가 돌았다.
그래서 주라후는 더 다급했다.
‘이 모든 건 결국 수나라가 고립되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 사신단이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오면 폐하께서는 다시 좌절하여 실의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이를 상쇄할 수 있는 군사적 성과를 반드시 도출해야 한다.’
곪아가는 속을 겨우 숨기며 말했다.
“폐하. 하늘이 내린 적기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하여 청하온데 부디 북진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외다. 아직은 적기가 아니오.”
“폐하.”
“내가 며칠을 고민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더라는 말이외다. 아군의 준비가 부족하오.”
“폐하. 무려 10만에 육박하옵니다. 전조 시절 고작 수천의 병력으로 북진했던 것과 비교하면 본국의 국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사옵니다. 어찌 부족하다고 하시옵니까. 신이 기어이 승전을 폐하께 바칠 것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하하하! 내가 장군을 어찌 믿지 않겠소이까. 한데, 10만이 아니라 그저 10만이라고 부를 뿐이지요.”
이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10만 대군이라고 칭하였으나 보급을 책임지는 병력까지 포함한 수치였으니 말이다. 주라후는 곤혹스러움을 넣으며 쥐어짜듯 말하려고 했으나 진욱에게 막혔다.
“또한, 내가 장군을 믿지 못하는 건 더 아니외다. 그저 나는 더 철저하게 준비하자는 것이오. 이번에야말로 기어이 장안을 도모할 정도로 완벽하게 말이외다.”
“······.”
“장군. 나는 반드시 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보시오. 바야흐로 우리에게 천명이 내리고 있는 게 아니겠소? 북쪽에서 돌궐과 고구려가 비상하는데 이것이 천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
“북진의 시기는 북방의 대군이 남하할 때를 맞추는 게 옳소. 남북에서 동시에 대군이 진군하면 아무리 양견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외다.”
진욱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문제는 모든 건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기에 주라후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호한 진욱을 설득할 언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군은 최선을 다하여 북진을 준비하시오. 내가 모든 걸 지원할 것이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하하! 나는 장군을 믿소이다.”
좋은 일이지만, 좋아할 수도 없었다.
부디 하늘이 진나라를 살펴주길 바랄 뿐이었다.
주라후는 그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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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황제 양견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치솟는 노여움의 여파로 숨소리조차도 거칠어졌다.
“감히······.”
고구려를 다녀온 사신단의 보고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현실감이 없어서 믿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성적인 고찰보다는 화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감히 선전포고라니.”
지금껏 고구려는 한 번도 이 땅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무리 국세가 강대할지라도 제 영역을 사수하는 것만이 목표인 나라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비루한 전조 시절에도 고개를 숙였던 고구려가 감히 내게 선전포고했소이다.”
수치스러웠다.
“나를 얼마나 가볍게 여겼다면 그들이 이리 나올 수 있겠소.”
치밀어 오르는 화로 목소리까지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대군을 출병하여 고구려를 벌할 기세였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수나라 조정의 중추인 소위는 적극적으로 양견을 만류하고자 나섰다.
“허. 고정이라고 하였소? 고구려가 저토록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데 내가 어찌 참을 수가 있단 말이오.”
“폐하. 신이라고 하여 어찌 화가 치밀지 않겠사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대군을 동원하여 무도한 고구려를 벌하고 싶은 마음이옵니다.”
적극적인 만류에 양견이 숨을 고르며 말을 듣기 시작하자 소위는 차분하게 현실을 정리했다.
“고구려는 돌궐과 다르고 진나라와도 다르옵니다. 진나라는 응당 폐하께서 취해야 할 영토이기에 힘을 내어 정벌해야 하옵니다. 돌궐은 늘 근심이었으니 반드시 처리해야 하옵니다. 하온데, 고구려는 아니옵니다. 수백 개의 산성으로 방어할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건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는 일이옵니다. 하온데, 기어이 짓밟아도 본국은 아무런 이점이 없사옵니다.”
소위의 말대로 고구려 정벌은 정말 계륵보다 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일이었다. 넓지 않은 땅이었고, 백성의 수도 적다. 그런데 군사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그 작은 나라에서 단번에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한다는 건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수나라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대군을 움직이려면 국고가 휘청이는데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온 힘을 다하여 정벌할지라도 실제로 손에 올릴 수 있는 이권도 크지 않았다. 한 마디로 군사적 행보로는 당장 수나라가 얻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조에도 늘 고구려는 외교로만 응대했다.
싸우자니 부담스럽고, 싸워도 얻는 건 없는데, 말이 통하는 상대였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온데, 폐하. 신은 사신의 말을 다시 살펴야 한다고 여기옵니다. 고구려는 돌궐 사신단이 보는 앞에서 조롱했다고 하였사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사옵니까?”
“······.”
“단지 돌궐과 화친하여 제 영역의 안정을 꾀했다고 볼 수는 없사옵니다. 호시탐탐 본국을 노리는 돌궐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것이옵니다. 만일, 두 세력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일은 북방의 사정이 참으로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적극적인 협조라면 어떤 경우를 예상하는 것이오?”
“군사동맹이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었기에 양견의 안색은 와락 무너졌다.
광대 근처의 볼은 쉬지 않고 씰룩거렸다.
“폐하. 돌궐만으로도 버겁사옵니다. 하온데, 고구려의 대군이 함께 장성을 넘는다면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일단은 한 수 물려야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북방의 상황을 어찌 예단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두 세력이 기어이 힘을 보태어 장성을 넘고자 한다면 우리가 먼저 돌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옵니다.”
“······.”
“그리하여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를 틀어야 하옵니다. 반드시 이리해야 하옵니다. 폐하. 본국이 가장 중시해야 하는 건 결국 남쪽의 진나라를 도모하는 것이옵니다. 이를 수행하자면 북방이 일시적이라도 안정되어야 하옵니다.”
돌궐과 다시 화친해야 한다는 의견에 양견의 얼굴에는 탐탁지 않음이 가득했다. 이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아오. 한데, 돌궐에 다시 세폐를 바치면 남쪽을 정벌할 힘을 모아낼 수 없소.”
돌궐에 세폐를 바치면 북방은 안정된다. 그런데 그 수량이 국고를 휘청이게 할 정도였기에 절대로 진나라를 도모할 수가 없다.
해서, 양견은 북방의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돌궐과 단교를 선언하여 국력을 모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이리하지 않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게 수나라의 현실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 때였다.
“폐하. 황명을 내리시어 회군을 명하시는 게 우선이옵니다.”
고경의 말에 양견이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참으로 복잡하고 기괴하였다.
고경은 무거운 마음을 밀어내며 말했다.
“폐하. 수만의 대군이 북상하였사옵니다. 이는 고구려에 위협을 가하여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사옵니다. 하온데, 지금 고구려의 기조라면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오히려 도발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리되면 심각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사옵니다.”
양국의 군사가 대뜸 전투를 치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의 대군이 북상하여 기주까지 갔는데 고구려가 반응조차 하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수시로 세력의 강온을 보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북방인데 말이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물론 국지적인 전투가 발생할지라도 우리의 패배를 고려하는 건 아니옵니다. 행군총관 풍욱은 뛰어나기에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온데, 아직 북방의 외교를 마무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력 충돌은 불가하옵니다.”
고경이 소위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보탰다.
“무엇보다 북상한 대군은 전투를 치를 보급을 완비한 것이 아니옵니다.”
고구려를 위협하기 위한 허장성세에 가까운 출병이었기에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내정적으로나 모든 조건이 그러했다.
그러니 고경의 말대로 북방의 외교를 정리하기 이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양견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곧장 회군을 명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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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임무는 아니었다.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압박하는 역할이었다.
전투도 없을 것이다.
그저 적당하게 주둔하여 위세를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최근 장성 이남으로 약탈이 발생한다고 하였으나 자고로 수만의 대군이 진군하면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약탈이라는 건 결국, 빈틈을 노린 행위에 불가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서서히 북평군 일대로 북상하던 풍욱은 마음이 너무 여유로웠다.
그런데
“자, 장군!”
북평군에서 파발이 달려왔다.
풍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약탈인가? 거란인가? 누구인가?”
“고구려군입니다.”
“뭐라······?”
그리고
“고구려 부마의 깃발이었습니다.”
귀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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