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힘의 외교 [댓글 이벤트 5회차]
57화 힘의 외교
누군가 내게 수나라의 멸망이 목표냐고 물어본다면 크게 비웃어줄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진심이다. 우리의 목표가 고작 수나라의 멸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막리지로서 어찌 고작 수나라의 멸망 따위나 바라보며 달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의 끝에는 수나라의 몰락이 아니라 중국의 영원한 분열이 있어야 했다. 남북조가 유지되어도 좋고, 5호 16국 시대로 회귀하면 더 좋다.
유구한 역사가 입증한바, 파전처럼 찢어진 중국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쾌거다. 아울러 고구려는 보기 좋게 찢어진 파전의 가운데 위치할 간장 종지가 될 것이니 어찌 모두가 우리를 간절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데 내가 어찌 공고하게 한 축을 담당할 진나라 사신단을 홀대하겠는가.
국력을 동원하여 가장 열렬한 환대를 해주는 것이야말로 합당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이는 가장 이성적이고 완벽한 정치, 외교, 군사적 판단이 아닐 수 없다.
“하하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소.”
“하하하! 고구려의 콩과 상추는 천하제일이외다. 어찌 입맛에 맞지 않겠소이까!”
열과 성을 다한 환상적인 연회에 진나라 사신단의 정사 위정은 입은 귀에 걸려서 내려올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 고구려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눈치를 살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으나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그냥 고향을 찾은 연어처럼 팔딱거리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고구려를 무척이나 흠모하였기에 늘 땅을 밟고 싶었소. 하지만, 기회가 없었기에 늘 한탄했는데 오늘에서야 이를 이루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기쁘오.”
“하하하! 나 역시 진나라를 무척이나 갈망하고 있었소. 동이 트고 날이 저물 때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소이다. 그래서 다시 묻겠소. 왜 이리 늦게 오셨소이까.”
“하하하! 다 내 탓이외다. 내가 부족하여 서두르지 못한 것이오! 그래도 늦게나마 이리 달려왔으니 공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구려!”
“이런. 이렇게 빨리 인정하니 내가 괜히 민망하구려. 그러나 우리 고구려와 진나라는 피를 나눈 형제이거늘 어찌 좋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나는 그저 서운했을 뿐이외다.”
“하하하! 과연 호탕하시오!”
나와 위정은 아주 찰떡이었다.
이렇게 손발이 딱딱 맞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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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은 너무 즐거웠다.
도저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황도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험악한 분위기가 예고됐다.
그래서 구체적인 외교적 성과를 바라지도 않았다. 최악의 경우 문전박대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 각오했기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택하여 영주에서 돌궐과 일전을 치른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고구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 알아도 최고의 성과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고구려 땅에 발을 내밀었을 때 떨리던 심장의 고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건 기우였다.
하늘 아래 이런 환대가 또 있을지 모를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한 일정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심지어 고구려 평양계 귀족의 수장인 막리지 왕고덕이 매일 찾아와서 의리를 논하였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뻤다.
심지어
“일전에 수나라 사신이 왔었는데 감히 우리를 도발하기에 선전포고나 해줬소.”
대수 외교의 선이 아주 굵지 않은가.
그리고 기어이
“그래서 머지않아 본국과 돌궐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을 것이외다.”
하늘에 해가 솟았다.
위정은 하마터면 왕고덕을 끌어안을 뻔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환하게 웃었다.
“참으로 좋은 일이외다! 어찌 이렇게 뜻이 통할 수가 있소이까.”
“허. 하면······?”
“하하하! 본국도 북진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오! 대군이 꾸려졌소?”
“부끄럽소. 10만 대군이외다.”
“······.”
“하하하!”
그런데 왕고덕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내가 실언이라도 했나······?’
위정은 웃으면서도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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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서 웃는 건지, 부끄럽다는 말이 거짓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뭐가 됐든 내가 볼 때 분명 부끄러워할 일이긴 했다.
진나라와 돌궐이 손을 잡았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긴 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하지 않나?
아니, 그 넓은 땅을 통치하면서 고작 10만이 뭔가.
우리도 15만을 동원하고, 돌궐은 40만을 때려 박는 판인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고구려, 돌궐, 진나라 중에서 생산력이 제일 발전하고, 인구도 많은 나라는 진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판돈이라고 올린 게 고작 10만이었다. 이래서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하하하!”
“10만이라. 귀공이 민망해 할만 한 규모이긴 하군요. 이해하니 그만 웃으셔도 되오. 광대뼈 아프겠소.”
“······.”
계속 웃길래 너무 짠해서 자비를 베풀었다.
“괜찮소. 다 이해하오.”
“······.”
위정은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어쨌거나 10만 보태고 밥상에 숟가락을 올릴 생각에 기뻐하다니 참으로 양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수나라 관군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기주에서 약탈이나 한다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존재가 곧 압도적인 압박이니 말이다. 그러니 고구려와 진나라의 사정은 아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진나라의 곳간이 영 부실하다는 말을 듣긴 했기에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로써 양국은 피를 나눈 혈맹이 된 것이구려.”
“그렇소. 바로 그것이외다. 나는 이번 기회로 양국이 영원한 우호를 체결하길 바라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우리는 귀국을 위해서 대군을 장성 이남으로 출병하오. 하면, 진나라는 고구려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허. 고구려는 진나라를 위해서 수나라의 배후를 타격하지 않소이까. 이를 언급한 것이오.”
“본국을 위해서라니요······?”
말이 왜 이렇게 안 통할까.
나는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보시오. 고구려가 수나라와 무슨 감정이 있어서 갑자기 대군을 일으키겠소? 아니, 좋소. 말이 나왔으니 되새겨보시오. 고구려는 줄곧 화북의 나라와 우호를 체결했소. 한데, 이번은 아니외다. 왜? 귀국을 어려운 처지를 알기에 거들고자 한 것이지요.”
“······.”
“어디 이뿐이오? 적대국이었던 돌궐과도 우호를 체결했소. 이토록 큰 결단이 어디 있소? 한데, 귀국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겠다는 것이오?”
“······.”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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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은 여러 번 눈을 껌뻑였다.
‘본국의 대군을 조롱하다니 갑자기 대가를 내놓으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일까?
유사 이래 이런 외교 문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 사신단 정사의 얼굴을 보면서 누가 멸시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어찌 출병이 본국을 위해서라는 것인가. 고구려도 고구려의 길을 가는 것인데.’
살다 살다 이런 억지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역사책에도 없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소? 설마 혈맹이라고 말하더니 막상 곳간을 열자니 아깝소?”
“그, 그런 게 아니외다.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소.”
정말 생각할 문제였다.
‘본국이 무언가를 할 여력이 되는가. 되었다면 고작 10만을 일으켰겠는가.’
강남의 혼란을 힘겹게 수습한 진나라는 아직 반석 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상이 명군이긴 하였으나 수나라의 건국 이후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 병마와 싸우고 있다. 내정은 아직 어지럽고, 힘을 한데 모아내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 원정이 중요했다. 일국의 사활을 걸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힘을 동원한 병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하하······실은 귀국에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있었소.”
고구려의 무례함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수나라의 영토가 필요한 건 진나라이지 고구려가 아니니 말이다.
물론, 흐르는 진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고구려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어찌해야 할지 벌써 걱정이 태산이었다.
“음.”
왕고덕은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대뜸 관모를 벗어서 가리켰다.
“어떻소?”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 고구려의 관모가 어떠한지 귀공의 생각이 듣고 싶소.”
“참으로 화려하오. 또한, 기풍이 느껴지니 고구려의 기백을 잘 담은 것 같소.”
“그렇소. 바로 이것이오.”
“무슨 말이오?”
“100년 전 남제의 사신은 이 관모를 보며 비웃었소.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이외다.”
“그건······.”
“똑같이 생긴 관모요.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한들 사람이 보는 눈이 어찌 많이 달라지겠소? 물론, 100년은 참으로 긴 세월이오. 한데, 외교 석상에서 비웃을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기풍 있게 보이려면 100년은 짧지 않겠소?”
“······.”
위정은 왕고덕의 눈을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피하고 싶었다.
“결국, 국세와 정세가 만든 결과가 아니겠소?”
“······.”
“과거의 일이외다. 한데, 이 땅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소. 아시겠소? 고작 50년도 버티지 못하는 강남의 비루한 나라와 천년을 지탱하며 천하를 호령한 거목은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소.”
“······.”
“내게 할 말이 없소?”
위정은 결국 시선을 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의 일을 내가 대신 사죄하리다.”
“고려해보겠소.”
“······.”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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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의 나라는 비루했다.
진나라 이전에 존재한 송, 제, 양나라의 수명은 고작 50년 전후였다. 이런 혼란이 수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남조는 역사 자체가 비루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국력도 비루했다. 그러니 10만을 동원하며 헐떡이는 것이다. 그 땅을 차지하고도 말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비루한 역사와 거목이 일궈온 천년을 명확하게 비교한 것이다.
“본국이 귀국에 딱히 바라는 건 없소. 나라를 지탱하는 것도 버거운 걸 알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요구하겠소이까.”
또한, 현실적으로도 이게 옳았다.
가뜩이나 수나라와 비교할 때 절대적인 열세인 진나라에 물자 따위를 요구하는 건 부적절했다. 힘을 키워줘도 부족할 때가 아니던가.
그리고 자연스레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노고를 위로하며 내려야 할 일이지요. 바로 그래서 귀국에 가장 필요한 군사력, 즉 고구려의 대군이 장성을 흔드는 것이외다.”
위계를 정리했다.
우리가 우위라는 걸 명확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묻겠소. 이 관계를 유지할 것이오?”
선택권을 내밀었다.
만일 거절한다면 아군은 장성을 넘지 않겠다는 걸 각인시킨 것이다.
어차피 이번 정벌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혹은 최고의 결과는 초원을 지배하는 것이다.
원정의 승리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본국은······.”
“웃으며 답하시오.”
“하하하······이미 언급한바, 본국은 귀국과 영원한 우호를 체결할 것이외다.”
그러면 이제 진나라의 국력을 손상치 않고, 고구려에 보탬이 되는 지침을 하달할 때가 됐다.
바로
“백제의 사신이 귀국을 방문하면 전하시오. 수나라와 단교하라고.”
외교였다.
“엄중히 경고하여 압박하시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앞으로 이 정도는 알아서 좀 하면 좋을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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