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예정된 황금의 시대(2)
52화 예정된 황금의 시대(2)
늘 침착하고 차분하던 이문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다급함이 느껴졌다. 여차하다가는 숨넘어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령강 하류의 평야는 가뭄으로 인한 감수(減水)가 심하여 넓은 논을 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범람도 잦아서 최소 1척(尺)의 제방(堤防)도 필요합니다.”
정말로 속사포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구릉지의 토지가 참으로 부드럽고 좋습니다. 소생이 왕 대인께 배운 농법으로 접근해보았는데 목화를 재배하기에 적합했습니다.”
“허. 그런가? 목화라.”
문익점이 목숨을 걸고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목화는 애석하게도 이 시절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대중적으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고가의 제품으로 귀족층이 주로 사용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재배가 보편적으로 확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를 해낼 수만 있다면 가히 의류 혁명이라도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시대가 개막될 것이다.
“작은 지원만 있다면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준비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귀족들이 참으로······.”
“아. 아닐세.”
“예?”
“백성이라면 누구나 목화를 구할 수 있을 수준으로 확대해야 할 것이네.”
“그 말씀은······.”
“가뜩이나 추운 나라일세. 우리 백성도 따뜻하게 살아야지. 그럴 때가 됐어.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소생이 사활을 걸고 이를 준비해보겠습니다.”
“필요한 건 모두 말하게. 내가 다 준비하지.”
백성의 삶이 질적으로 발전한다는 건 곧 국력으로 직결된다.
아무리 생산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절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부분을 아예 놓치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문진은 정말 기뻤는지 그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반면, 상류의 지역은 관개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가뭄이 잦았고, 인근에는 배수가 불량한 토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꼼꼼하군. 일국의 농업을 이끌어 갈 동량지재(棟梁之材)다워. 혹시 더 있나?”
“물론입니다. 패수 안쪽의 평야는 밭을 꾸리기가 참으로 적합한데 2척 정도 되는 높이의 제방을 쌓을 수 있다면 큰 성과를 낼 겁니다. 그리고······.”
크게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분석이었다.
심지어 지역마다 재배에 적합한 작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왔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서 더 듣기가 힘들었다.
목화의 감동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문진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아직도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옹졸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연자유를 바라봤다.
“들었나?”
“······.”
“하. 문진이 얼마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나?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리 탄탄하게 파악해도 날씨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
“물론 그냥 집행해도 될 것이네. 그러나 우리 고구려는 전처럼 막무가내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기치에 걸맞게 체계적인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한데, 자네가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다 틀렸네.”
“······.”
“이게 뭔가? 이보다 엉망일 수는 없는 법일세.”
“······.”
연자유는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까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이 잘못한 일이 아니던가.
아니, 일국의 재상이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수동적이란 말인가.
이런 건 알아서 하면 얼마나 좋은가.
진짜 내가 더 화났다.
정말로.
“대, 대인. 이를 파악하는 건 정말 힘들었습니다. 유생을 동원하여 농부를 직접 만나서 경험을 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토지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며······.”
“내가 잘 알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네. 자네와 유생들의 노고를 어찌 몇 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태대사자가 일을 형편없이 했으니 내 심장이 찢어질 뿐일세.”
“하, 하지만 이대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소생이 지금이라도 날씨를 파악하겠습니다.”
“자네의 열의가 참으로 대단하군.”
“처음부터 날씨를 제외했다고 전달만 하셨더라도 소생이 함께 파악했을 것인데······.”
이문진이 화룡점정을 찍자 연자유의 안색은 썩었다.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그런데 잘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일을 이렇게 했는데 밥이 넘어가나?”
“······.”
다시 한숨을 쉬면서 이문진을 바라봤다.
“조정에서 준비한 5만 마리의 소를 지역마다 배치해야 할 것이네. 이는 가능하겠나?”
“음. 날씨를 몰라서 정확하게 배분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소생이 최대한 정확하게 진행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대인.”
“자네가 아니라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나? 고구려에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만 가득한데 유일하게 자네만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니 응당 믿어야 할 것이네. 그러니 이번 일도 잘 준비하게. 내년에는 고구려 전역에서 우경을 시행해야 할 것이니 말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훌륭하군. 그래. 어서 돼지고기를 먹게.”
나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식사를 권했다.
물론, 연자유의 표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제대로 반성도 하지 않고 원망만 할 것이다. 자고로 옹졸한 성격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고구려의 토지를 파악하는 건 얼마나 걸리겠나?”
“더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인원의 한계가 있습니다.”
“현재 인원이 300명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체 인원이 그러할 뿐입니다. 절반씩 나눠서 학문을 익히니 실제로 현장을 뛰어다니는 이들은 150명가량입니다.”
“음.”
“대인. 이대로는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문턱을 낮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농학자로 육성하고 있는 유생들은 기존 귀족 세력과 최대한 무관한 이들이었다. 이제 막 글자를 익힌 이들이거나 존재감이라는 찾아볼 수 없는 먼지 같은 가문의 출신이거나. 이는 기존 귀족이 농업의 일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억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장차 고구려의 기층을 통치할 하급 관리가 될 이들이었다. 즉, 기층의 통치는 왕권의 영향력이 짙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도 고려했다. 어쩌면 이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보는 고구려는 낮은 단계라도 관료제가 구축되는 나라이니 말이다.
“대인. 이미 귀족의 대립도 무의미합니다. 그들이 모두 결합하면 몇 배나 되는 인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긴.”
우려할 부분은 이미 제거한 지 오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고위 귀족부터 모두 농학을 익힐 수 있도록 하지.”
“참으로 바람직한 결정이십니다.
“그나저나······.”
사실 이문진의 보고 중에서 나를 유독 사로잡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고구려의 운명을 아예 바꿔버릴지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도랍현(배천군)의 사정을 다시 말해보겠나?”
“그곳은 썩 농경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가뭄이 발생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습니다. 3년에 한 번 수확하기도 어렵고 심한 곳은 10년에 걸쳐서 흉작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관개 시스템을 구축할지라도 백 리, 천 리 밖에서 물을 끌어올 수는 없다. 즉, 농사가 어려운 곳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방법이 없다. 그런데 내가 괜히 환경적으로 어려운 지역을 다시 물어본 게 아니었다.
“분명 강이 있는데 가뭄이 그토록 심하다는 건 상류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네. 어떤가? 상류는 상황이 다소 다를 것인데.”
“아.”
이문진은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상류는 농사가 잘 이뤄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의 전체 수확량이 형편없기에 상대적으로 도드라질 뿐입니다.”
“아닐세. 그게 아닐세. 이 문제는 그리 바라볼 게 아닐세.”
“예?”
“상류에서 하류로 물을 거의 보내지 않는 조건이라고 봐야 하네.”
하류를 말려 죽일 정도로 상류에서 물을 다 허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류는 물이 넉넉할 수밖에 없다. 자연적으로 그냥 넘치는 환경이었다.
“토양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했네.”
“예. 진흙이 적은 보드라운 흙입니다. 그리고······.”
몇 마디가 더 이어졌는데, 세상은 이런 흙을 사질 양토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농작물이 자라기 아주 좋은 비옥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런 곳은
“잘됐군. 이앙법을 도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일세.”
이앙법을 시도하기에 딱 좋다.
중국은 남송, 우리나라는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될 정도로 선진 농법이었다. 한 마디로 이 시절 이앙법을 전면적으로 보급해낼 수 있다는 건 농업 혁명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낙후된 고구려의 농촌 현실을 고려할 때 이앙법을 전면적으로 집행하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다. 여차하다가는 나라 전체에 쌀 한 톨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범적으로 한 지역에 해보는 건 정말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실패할지라도 이 정도 손해는 감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앙법이라고 하셨습니까?”
“잘 듣게. 이를 성공해낸다면 고구려는 영토가 두 배나 넓어질 것이네.”
“예······?”
이앙법은 단지 노동력을 절감하여 생산력을 확충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앙법은 반드시 이모작으로 이어진다. 이모작이라는 건 같은 땅에서 두 번 농사를 짓는 것이니 영토가 두 배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성공해내야만 하는 게 바로 이앙법이었다.
“일전에 소소하게 시행했던 밭작물의 이모작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것일세. 즉, 이앙법을 시행하면 수확량이 증가하니 백성의 수가 늘고, 이모작이 가능하니 영토는 두 배나 넓어지니 그야말로 환골탈태가 아니겠는가?”
그때
“내가 뭘 하면 됩니까.”
우거지상을 하던 연자유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무조건 해야지요.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날씨가 아니겠나?”
“그렇군요······하. 계속 이러실 겁니까?”
“농이 아닐세. 이앙법은 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농사를 아예 망칠 수도 있네. 그러니 날씨가 가장 중요한 것일세. 어떤가? 대안을 모색해보겠나?”
“······간단명료하게 일러주시지요.”
“조건과 부합한 지역을 찾아 최대 규모로 관개 시설을 축조해야 하네.”
이앙법은 섣불리 시행했다가는 흉년으로 직결된다.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였기에 단지 관개 시설만 확충할 게 아니라 자연적 환경을 더 살펴야 했다. 최대한 용수가 풍부하고 가뭄에도 잘 버텨왔던 지역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런 곳을 찾아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관개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이리해야만 고구려에 이앙법을 도입할 수 있다.
게다가 냉정하게 따져볼 때 고구려에서 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될 것이다. 놀랍게도 연자유가 바로 이 다섯 명에 포함되었다.
“어떤가. 해낼 수 있겠나?”
확실하게 하고자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이앙법. 이것이야말로 남진 정책일세.”
“하······.”
연자유는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절의 의미가 아니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명제를 꺼내시는군요.”
“하면?”
“내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성과를 가져오지요.”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로 고구려에 황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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