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예정된 황금의 시대(1)
51화 예정된 황금의 시대(1)
한심했다.
너무 이성적이지 못했다.
만인이 내게 돌팔매질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막리지라는 인간이 명백한 이적행위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항변은 하고 싶었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1~2년 만에 고향을 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비록 내가 고구려의 막리지가 되었으나 30년 넘게 살았던 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라여서 낭만인가를 무엇인가를 일러주고야 만 것이다.
명백한 이적행위지만 이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정말 겸허하게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물론, 신라가 변화를 도모할 리는 없다. 애초 그 나라는 낭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필시 옹기종기 모여서 욕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러고 보니 이적행위가 아니었다.
어차피 받아먹지도 못할 건데 굳이 왜 낭만을 말해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게 했단 말인가.
그래도 나와 아예 인연이 없는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후회지는 않았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어쨌거나 이처럼 뼈를 깎는 반성을 끝으로 대신라 외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일전의 대수나라 외교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치열함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서운합니다.”
가서일이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보자마자 헛소리했다.
“폐하께서 수나라 사신에게 일갈하셨다지요? 그토록 엄청난 일을 도모하시는데 소생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할수록 원통합니다. 기필코 후대에 남겨야 할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대인께서 후대가 흥겨울 일을 뺏으신 겁니다.”
“자네 그때 수나라로 갔네. 강이식을 따라서. 한데, 어찌 부르나?”
“핑계에 불과합니다. 대인. 소생은 보고 듣고 그려야 합니다. 이를 모르지 않으시는 분이 어찌 이러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두 발로 갔는데 내게 왜 그러나? 그리고 허구한 날 그린다고 하는데 대체 언제 그리나? 좀 보여주게.”
“지, 지금 소생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림을 언급하자 가서일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어찌 대인께서 소생을 이렇게 멸시하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언제 멸시했다고 그러나? 자네가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니 그러지. 얌전히 도성에 있으면 이것저것 볼 수 있을 것인데 뭐 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나?”
“이럴 수가······.”
가서일은 정말 충격받은 것만 같았다.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찍이 소생은 문진과 약조한 게 있습니다.
“무슨 약조를 했나?”
“소생은 그림으로, 문진은 글자로 고구려를 영원히 기록하자고 했습니다.”
“문진이 또 그랬나?”
“잊으셨습니까? 그는 늘 적습니다. 왜 적겠습니까? 그게 전부 기록입니다.”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문진은 늘 적고 다녔다.
그저 꼼꼼한 성격이라고만 여겼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하긴, 원 역사에서도 정사를 편찬한 사람인데 당연한 일인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그런 건 알아서 하게.”
“대인. 어찌······.”
“집현전은 어찌 되어가고 있나?”
유생들이 학문을 익힐 시설의 이름을 집현전이라고 정했었다.
특별하게 작명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가장 명당 느낌이 나는 집현전으로 한 것이다.
“소생은 설계도를 내렸기에 역할이 끝났습니다. 자리에 없다고 하여 문제가 생긴다면 진정한 설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가서일이 이런 건 정말 잘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일정을 정하여 역할을 맡겼다.
놀랍게도 인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서일의 지침을 완수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왕명도 그렇게까지는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가서일이 막리지 정도에 오르면 귀족들이 정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 같았다. 물론, 가능성을 떠나서 먼 미래의 일이었다. 아직은 영농 정책을 집행하는 나의 식객이었으니 말이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을 때 연자유가 문서를 잔뜩 들고 방문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평소 옹졸한 그의 성격을 고려할 때 필시 내가 간절하게 바라던 내용이 분명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어서 오게. 밤새 자네를 기다렸네.”
“입에 침이나 바르십시오.”
“발라도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건데 뭐 하러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가져온 보따리나 풀어보게.”
연자유는 살짝 울컥한 것 같았으나 말을 더 보태지는 않았다.
지도를 첨부한 문서를 툭 올렸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역시 기다리던 자료였다. 바로 토지의 실태를 파악한 것이었는데 가장 위에는 황해도 일대를 분석한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선 내미홀군(해주), 한성(재령) 등 4곳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어찌 사람이 모든 걸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전체 토지의 2할을 경작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2할은 논, 밭은 7할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기존 경작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연자유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평양 도성와 이북 지역을 8구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체 토지의 1할을 경작지로 개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중 논은 1할, 밭은 9할이 될 것이며······.”
평안도는 험준한 산악이 중첩되었기에 평지가 적었다. 그러다 보니 황해도보다 경작지로 발전할 수 있는 토지의 비율이 낮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율이었기에 절대적 수치로 규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평양 도성을 품은 고구려의 심장부였기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볼 때 가장 크게 경작지를 일궈낼 지역이 어디인가.”
“현재 파악한 바에 의하면 살수를 품은 증지현(안주)이 벼농사에 가장 적합합니다. 그 뒤로는 압록 일대가 좋을 듯합니다. 아. 물론 평양 도성의 경작지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밭농사에 더 적합합니다.”
연자유가 에둘러 말하긴 했으나 현재 언급되는 토지의 상당수가 경작을 진행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개간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건 시대의 과업이 분명했다.
“그리고······.”
연자유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번에는 함경도였다. 경작지로 발전할 수 있는 토지가 10%가량이었는데 논은 거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농사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기후도 좋지 않았고, 기대 수익이 별로인지라 관개 수로를 크게 확충하기도 어려웠다.
어느새 연자유의 브리핑이 끝났다.
고구려 전 국토가 아니라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파악한 것인데, 이런 수준의 토지 조사를 해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국가 단위로 토지 조사 사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광범위하고 세밀한 조사가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문진이 참으로 일을 잘합니다. 참으로 감탄했습니다.”
우선 이문진의 활약이 대단했다.
“대인. 소생도 잘합니다.”
“자네는 그림을 잘 그리지.”
가서일이 대뜸 끼어들었으나 연자유는 가볍게 무시했다.
나도 대꾸 안 해줬다.
“문진이 경작지를 조사하는 기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유생들에게 하달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들고 귀족의 사가를 모조리 방문했지요.”
“하하하! 직접 간 게 아니라 귀족을 움직였다는 건가?”
“문진이 동원할 수 있는 유생의 수가 늘었다고 한들 이제 300명 남짓입니다. 그들로 고구려의 땅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귀족들이 나서야지요.”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귀족들 역시 경작지의 확대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으니 사병까지 동원하여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빠르고 정확하게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었지요.”
연자유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고구려가 이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래.
이 기력으로 내전이나 했으니까 문제였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좋군. 그래. 문진은 이제 어찌한다던가?”
“형님께서 일러주신 기준에 따라서 지역별로 재배하기 이로운 작물을 분류한다고 했습니다.”
이문진은 시키지 않아도 일을 알아서 참 잘했다.
역시 영농후계자다운 사람이었다.
“한데, 어째서 출사는 시키지 않습니까. 이문진이라면 능히 대사를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닐세. 그는 지금처럼 농업에 집중하는 게 맞아.”
지금은 관복을 입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에 따라서 농림부라도 만들어서 출범시키면 될 것 같지만, 이게 또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나라에 부서가 생겨서 일을 추진하려면 각종 절차와 규제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 또, 여러 귀족의 입김도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지금처럼 모든 걸 내게로 집중시켜 ‘사적’으로 집행하는 게 옳았다. 국가 차원으로 농림부를 출범하는 건 고구려의 농업이 반석에 오른 이후에나 고려할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오늘 연자유가 파악한 자료의 수준이면 대 개간 시대로 돌입할 수 있었다.
“백성이 자발적으로 황무지를 개척할 수는 있겠지. 이것과 별개로 광활한 평야는 조정에서 관리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만백성을 대상으로 전호를 모집하게. 우경을 할 수 있게 소를 대여할 것이니 조세는 수확량의 5할로 정하겠네.”
“고구려 전역이 황금으로 넘실대겠군요.”
“하하하! 소생이 다 그려내겠습니다!”
가서일까지 보태자 나도 그냥 웃었다.
연자유도 기분이 좋았는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식사나 하시지요. 모처럼 돼지고기를 좀 먹어야겠습니다. 아. 상추도 부탁합니다. 서일. 자네도 함께 들지.”
“아닙니다. 드시지요. 소생은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밥 먹는 건 왜 지켜보나?”
“소생은 그래야 합니다.”
“볼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일세.”
“거장(巨匠)은 이래야 합니다.”
“이런.”
밥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갑자기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문서를 뒤적거렸다.
돼지고기 먹을 생각에 신났던 연자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합니까? 벌써 기억이 안 나는 겁니까?”
“그게 아닐세. 음. 자네의 말을 곱씹고 문서를 아무리 다시 살펴도 없는 것 같네만.”
“없다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만 힘이 넘치고 활기차던 연자유의 목소리는 무서운 속도로 가라앉았다. 애석하게도 벌써 나의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낙장불입인데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아니, 아무리 살펴도 첫서리와 끝서리는 언제인지 없네. 어디 이것만 없나? 눈이 내리고 녹는 시기와 강우기는 언제인지도 전혀 나와 있지 않다는 말일세.”
“······그 내용을 미리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자네 토지는 왜 조사하고 다녔나? 결국, 농사를 잘 짓자고 한 게 아닌가?”
옹졸한 연자유의 볼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내가 더 화났다.
어찌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닌가. 농법을 아무리 보급한들 가뭄이나 홍수가 발생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하늘이 고약하지만은 않기에 늘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네. 하면, 당연히 이를 파악해야 하는데 자네가 다 빠뜨린 것일세.”
“······.”
“하. 자네 때문에 농사 망해버렸네.”
“······.”
“답답하군. 정말.”
가서일이 나와 연자유를 바라보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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