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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50화 (50/199)

50화 낭만의 역사

50화 낭만의 역사

고구려와 신라의 위치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차분하게 잘 설명해줬다. 그런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심지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어찌 타국을 이리도 희롱할 수가 있소?”

따지는 게 아닌가.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그래도 신라와 관련이 있던 나라에서 살다 온 원죄가 있다. 그래서 인내를 발휘하여 예의에 대해서 가르쳐주기로 했다.

“내가 어디 틀린 말을 했나?”

“알 6개는 가야의 일이외다!”

“아. 신라와 가야가 또 다른가? 나는 비슷한 줄 알았는데.”

“어찌······.”

“한데,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음. 6개 중 5개가 가야로 갔다거나 이런 게 아닐까 싶네만?”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제시하며 차분하게 논리를 펼쳤다.

“아니, 잘 한번 생각해보게. 별로 대단치도 않은 알을 여섯 명이나 챙겼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정말 그러하다면 이건 반역일세.”

“뭐, 뭐요? 반역?”

“필시 알은 여섯 개였을 것이네. 기어이 자네의 말대로 신라가 가야와 아예 별개라면 나머지 5개는 부실해서 남몰래 버렸거나, 5명이 열과 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이게 아니면 너무 말이 안 돼. 별로 대단하지 않은 알이거늘······.”

말의 시작과 끝에 핵심을 배치하여 강력하게 강조했다.

그런데 이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 묵직하게 스쳤다.

이는 그야말로 ‘유레카’였다.

결국,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한데, 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닌가? 실로 놀랍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자네 나라는 박 씨, 석 씨, 김 씨가 번갈아 가면서 왕을 하지 않나?”

“뭐요······?”

꽉 눌린 답변이 들렸으나 나는 할 말이 아직 너무 많았다.

“과거 왜군과 가야군이 더불어 침탈하였을 때 나라가 망할 뻔하지 않았나? 그때 김 씨가 본국에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난리를 쳤네. 간절한 애걸복걸을 보신 광개토태왕께서 5만의 강군을 파견하시었네. 이때부터 김 씨가 대대로 왕을 하지 않았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신라는 어쩌다가 알에서 나온 사람과 지금 왕의 성씨가 다른가? 참으로 괴이하지 않나? 한데, 나는 이를 ‘알지’.”

“뭐, 뭐요? 이보시오! 기어이 실성하셨소?! 당장 말을 취소하고 사죄하시오!”

“허. 지금 뭐라고 했나? 참으로 무례하군.”

어찌 이토록 예의라고는 없는 것일까?

좋게 넘어가고 싶었으나 안 되겠다.

나는 이미 노여움을 참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의 외교 참사는 바로 자네의 세 치 혀가 초래한 것일세.”

“지금 누가 누구에게 무례하다고 하는 것이오? 일국의 건국을 조롱하고, 왕실을 능멸했소. 심지어 선대의······.”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게 바로 그것일세.”

그냥 말을 잘라버린 뒤 빤히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예의가 없는 불한당 같았다.

그러니까 정말 우스웠다.

“이 나라 고구려가 네놈들을 상대할 때 격식이라도 차려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노려보지도 않고,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지도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했다.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해보지 그러나? 우리 고구려가 네놈들에게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나?”

“외교의 기본이외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데 어찌 외교를 하시오?”

“그래서 하는 말이니라. 신뢰라고는 흔적도 없는 네놈들을 상대하는데 무슨 예의를 갖출 것이며, 기본을 찾아야 하는가? 참으로 우습구나. 내 말이 틀렸는가?”

“그······.”

“나는 듣기 싫으니 내 말을 듣기만 하라. 아니면, 목을 벨 것이다.”

“······.”

지금 나는 되돌아본다.

한국‘인’으로서 내게 신라의 역사가 와닿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다시 되새긴다.

고구려부터.

고국원왕은 연나라와 일전을 치렀으나 대패했다. 급기야 백제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일국이 송두리째 흔들렸던 시절이었다.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고군분투하며 내치를 다졌고, 광개토왕에 이르러 선대의 굴욕을 모조리 되갚았다. 급기야 장수왕의 치세에는 고작 지역의 강국에서 동아시아의 4강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며, 오직 자력으로 일어선 역사였다.

이 사실에 과장은 없으며, 거짓은 뿌리내릴 수 없다.

물론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였기에 패배하였으나 고구려사는 서사가 있고, 감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였기에 고구려사로서 완성되었다.

고구려사는 고주몽이 나라를 세우며 시작한 게 아니다.

동명성왕이 활을 쏘며 세운 나라가 연개소문의 죽음 직후 장렬하게 무너지며 고구려‘사’가 ‘시작’된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머리 숙이지 않고, 기어이 쟁투했던 서사가 심장을 흔드는 감동을 만들어 내며 불멸의 역사를 창조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패배했으나 고구려사는 승리한 것이다.

하여, 고구려사가 천년을 넘게 이 땅을 호령하게 되었다.

한국인 아니 나와 우리가 고구려에 열광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한국사에서 ‘완성된’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사’는 가장 완벽한 역사였다.

최후의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바로 이러하여 고구려는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아니었다.

고작 만주를 상실했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만주의 상실은 고구려가 아니라 발해의 멸망이 원인이었다. 이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런데도 모두 잊고 산다. 이는 신라가 만든 천년의 업보였다.

신라의 역사는

“신라의 역사에 신뢰가 존재하긴 했더냐? 일찍이 네놈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역사는 늘 배신과 만나지 않았던가?”

감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어쩌면 세계사에도 사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해보라.

분명 바닥에서 시작하여 오욕을 이기며 바득바득 정상을 정복한 역사였다. 그런데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무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버텼는데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광개토태왕의 일은 꺼내지도 않겠다. 보라. 너희는 고작 땅을 탐하여 백 년의 혈맹이었던 백제를 배신했다.”

신라‘사’가 너무나도 저열하기 때문이었다.

일국이 생존하기 위한 처절함을 보여준 치열한 역사임에도 감동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바득바득 기어서 정상을 정복한 위대한 역사가 분명한데도 눈물이 허락되지 않았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걷어내게 하는 역사였다.

왜?

“신뢰를 배신으로 화답하는 나라가 바로 신라다. 한데, 감히 외교를 운운하는가.”

대의가 아닌 생존만을 보여준 역사였기에 그러했다.

신라는 이겼으나 신라사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바로 그러하기에 신라가 역사의 승자가 되었으나 신라사는 영원히 완성될 수 없었다.

천년을 버틴 나라였으나 천년이 지난 뒤에도 미완성이었다.

그러기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나라의 역사가 승리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사는 승리하고 있으며, 신라사는 패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역사가 아닌 현실에서도 고구려가 승리할 것이다.

“모든 걸 배신으로 화답하는 너희와 어찌 대화를 할 수 있나?”

이미 외교는 틀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불쾌함에 볼을 씰룩이고, 눈동자는 흔들렸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말이다.

지금도 신라의 사신은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나도 놀라운 건 고작 너희 따위가 이 땅에서 우리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신라사에 감동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도 저열함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은 저열한 외교의 결과였다.

순간의 욕망에만 최선을 다하는 비루함의 결과였다.

상당한 국세를 이뤘으나 순간의 이익에 취하여 신뢰를 헌신짝처럼 버린 나라가 신라였다. 더 우스운 건 이조차도 백년대계가 아니라 찰나의 판단에 불과했다.

백제를 배신했다면, 백제를 감당해야 하거늘, 이조차도 하지 못했다.

신뢰를 깬 대가로 시작된 반목의 역사, 백제‘만’의 공세도 버거워서 망국을 걱정하며 여기저기 구걸이나 하러 다녔다.

신라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오직 배신으로 역사를 이어가며, 신라‘만’의 생존을 갈구한 나라다.

배신할 나라가 없어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신라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나라는 ‘아직’ 배신을 주고받지 않은 당나라였다. 두 나라는 참으로 호흡이 잘 맞았다. 서로를 배신할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당나라가 먼저 한반도 지배 야욕을 보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신라는 무슨 짓을 했을 것이다. 무조건.

아니, 애초에 전성기조차 자력을 일궈내지 못하고 책략과 배신으로 열어낸 나라의 역사가 아닌가. 고작 이러할 뿐이다.

이 저열함은 위대함이 될 수 없다.

이 생존‘사’는 승리의 징표가 아니다.

신라의 생존‘사’는 오직 하루를 살고자 하루를 일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일을 바라보지 못한 하루살이의 삶이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하루살이에게 역사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신라사는 비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이를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있었다.

하루살이의 퍼덕거림을.

“외교 그리고 예의라.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겠다.”

“······.”

“이 시간 이후 우리와 네놈들의 외교는 오직 한 가지만 있을 것이다.”

바로

“항복 사절이다.”

망국을 청하는 것이다.

“그전에는 감히 이 땅을 넘지 말라. 기어이 죽게 될 것이니 말이다.”

이제 이 대화는 끝을 내야 할 때가 됐다.

“그래도 궁금할 것이니 살 방법을 알려주겠다.”

“······.”

“어차피 배신할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너희는 삶의 의미조차 찾지 못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제 서토에서 물색하라.”

“······.”

“서토로 가서 수나라 황제인 양견에게 빌어라. 다리를 부여잡고 애걸복걸하는 게 너희가 가장 잘하는 것이 아니더냐. 너희는 필시 양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양견은 아직 너희에게 배신당하지 않았으니 승산이 아주 크다.”

“······.”

할 말은 다 끝냈다.

남은 건 축객령이었다.

“처음 나는 너에게 건국을 말하였다. 여섯 명인지 여섯 알인지 모를 그 건국 말이다.”

비릿하게 웃었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알인지 사람인지가 아니라 건국은커녕 국호조차 불분명해질 정도로 너희의 시작은 역사에서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

새로운 한국‘사’에는 저열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사’만이 아니라 고구려도 이길 것이니까.

고구려, 이 석 자의 불멸은 다시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낭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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